각자의 도시 생활
ʻ서점 존ʼ, ʻ다이닝 존ʼ, ʻ자신감 상승 존ʼ
각 구역을 채우는 책, 사진, 포스터, 패브릭, 식물 등 어느 하나도 허투루 들인 건 없어 보인다. 7평 남짓한 작은 공간 속에도 집주인의 고민과 관심사, 사유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리고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에서 실천하고 나아가 프로젝트까지 만드는 혜란. 그녀와 마주한 테이블을 채운 것은 시원한 매실차만큼이나 청량감 가득한 에너지였다.
이혜란
자연을 사랑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지향하는 커뮤니케이터.
환경 NGO를 거쳐 현재 소셜 벤처에서 마케터로 일하며 소속 조직과 사회적 문제를 연결해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에 호기심이 많아 질문 던지기를 좋아하고 하우두유두, 재미탐구소, 동네의자콜렉터 등 일상 속에서 새로운 일들을 실험 중.
거주지 망원동
거주기간 2년 차
구조 원룸
면적 20.6m2
하나. ʻ세린ʼ이와 ʻ조채린ʼ
집에 식물이 참 많아요.
제가 자연을 사랑하다 보니 협소한 공간에 두기에 다소 큰 화초들을 키우고 있어요. 저건 셀로움이라는 종인데 이름이 너무 예뻐서 발음 그대로 “세린”이라고 부르고 이건 극락조라는 식물이라 “조채린”이라고 이름 붙여줬어요. (웃음)
저는 다육식물도 기르기 쉽지 않던데 혜란 씨네 화초들은 잘 자라고 있네요.
화초들을 잘 보살피는 게 저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인 것 같아서 계속 주기적으로 물도 주고 먼지를 닦아주고 있어요. 그동안 저만 잘 챙기면서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화초들은 제가 관리해주지 않으면 안 되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더라고요. 요즘같이 더운 여름엔 화초들이 축 처져 있는데 이 친구들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느껴져요. 제가 생활의 루틴을 놓거나 번아웃이 오는 때에는 집도 지저분하고 화초들도 시들더라고요. 그렇게 시들어가는 화초들을 보면 ʻ내가 얘네를 못 챙길 만큼 바쁘고 나를 못 지키면서 살고 있구나ʼ를 깨닫게 해줘서 제 일상의 ʻ나침반ʼ 같아요.
우리 같은 1인 가구한테는 반려동물이나 식물, 사물들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도 하죠. 또 혜란 씨가 아끼는 대상이 있나요?
화초들 못지않게 제가 애정을 갖는 것이 이 옷장이에요. 집에 이사 올 때 큰 결심을 해서 산 가구거든요. 스무 살에 서울에 와서 지금껏 제대로 된 옷장을 가져본 적 없이 대충 행거에 사계절 옷들을 모두 걸어두고 살았었어요. 늘 ʻ임시ʼ의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ʻ이렇게 사는 거 너무 별로다. 내 서울살이 진짜 재미없다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이사를 오면서는 옷장을 사고 싶어 졌어요.
옷장 사려면 목돈이 들었을 텐데, 그렇게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예전에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에서 ʻ행복을 유예하지 말라ʼ는 구절을 읽었던 게 기억에 남았거든요. 결혼하면 좋은 가구, 좋은 생활 제품 살 건데 하면서 행복을 유예했다는 거죠. 저도 더는 막연한 미래를 위해 지금의 편안함을 미루고 싶지 않더라고요.
ʻ행복은 빠다야ʼ라는 말처럼 진짜 별거 아닌 것들에 행복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너무 큰 행복을 위해서 작은 행복들을 미루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면 이 집에서 작은 행복을 실현해나가기 위해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저는 늘 이 집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잘 쓸고 닦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람이 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하거든요. 공간에 사람이 없으면 금방 폐허가 되거나 망가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면에서 이 공간의 팔 할은 친구들이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기도 해요. 이 안에 친구들과 같이 돌려 읽은 책과 친구들이 찍어준 사진, 함께한 추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아마 친구들이 없었으면 이 공간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거예요.
둘. ʻ같이ʼ 그리고 ʻ가치ʼ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집이 갖는 의미가 더 커진 것 같네요
저에게 집은 새로운 작당을 벌일 수도 있고, 새로운 영감이 되기도 하는 무궁무진한 공간이더라고요. 정신적으로 저의 ʻ지지대ʼ 같은 곳이 된 것 같아요.
그렇다면 꿈꾸는 집의 모습이 있을까요?
바라는 집의 특정 형태가 있다기보다는 집을 중심으로 ʻ누군가와 관계 맺을 것인가,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며 살 것인가ʼ를 고민해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저희 엄마가 사람들 초대하는 걸 되게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집에 사람들이 늘 많았어요. 그런 걸 보고 자라서 당연히 집에 사람이 많은 게 좋고, 우리 집이 사랑방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이 집이 앞으로도 제가 쉴 수 있고 주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 ʻ사랑방ʼ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셋. 언젠가 책방 주인
미래 책방 주인을 꿈꾸신다고요? ʻ서점 존ʼ을 소개해주세요.
서점 존에는 제가 만든 나무 책장이 있어요. 서점처럼 책의 앞면을 볼 수 있게 제가 원하는 사이즈와 각도에 맞춰 공방에서 직접 만든 거랍니다. 언젠가 서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데, 그때를 준비하면서 나름의 큐레이션으로 책들을 구분해놓고 있어요. 제가 환경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첫 번째 칸에는 관련 이슈들을 다룬 책들을 두었습니다. 다음은 저의 두 번째 키워드 ʻ일ʼ에 대한 섹션이고 그 아래 칸에는 라이프 스타일의 측면에서 재밌는 관점들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마케팅·홍보 직무와 관련된 브랜드나 콘텐츠에 관련된 책들이 많아요.
정말 집주인의 뇌 구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책장인데요. 혜란 씨의 관심사와 고민을 우선순위에 따라
파악할 수 있어서 재미있어요. 최근에 읽으셨던 것 중에 추천해주실 만한 책이 있나요?
제가 좋아하는 책은 이길보라 감독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예요.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인 자질이라고 굳게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분이세요. 페미니즘이나 장애, 예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풀어낸 책이에요. ʻ당신을 이어 말한다ʼ는 건 잃어버린 말들 즉, 소수가 목소리를 내고 미투처럼 누군가를 이어 내가 말했듯, 나를 이어 또 다른 사람이 목소리를 내면서 연대해 나가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어서 좋아해요.
그리고 ʻOh Boyʼ라는 환경과 동물복지를 다룬 잡지는 제가 대학생 때부터 엄청나게 좋아해서 계속 모아 왔고
편집장님 인터뷰도 했었어요. 환경문제를 어렵지 않게 다뤄도 된다는 가능성을 처음 보여줬던 매체라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책이에요
넷. 망원동, ʻ영감ʼ을 말하다
몇 달 뒤면 이 집에서 지낸 지 만 2년이 된다고 들었어요. 계속 이 동네에서 살고 싶으세요? 그 이유는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망원동을 떠나는 날이 서울을 떠나는 날이다'라고 말하고 다녀요. 그만큼 이 동네가 저한테 큰 안정감을 주고 처음으로 ʻ동네 같다ʼ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해 준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채식을 하다 보니 이 주변 홍대·합정·망원 지역이 비건 친화적인 편이라 살기 좋아요. 단순히 비건 식당들이 많을 뿐 아니라 음식의 특정 재료를 제외해달라는 요청에도 흔쾌히 응해주는 식당들이 많거든요.
저도 최근 망원동에 있는 식당 몇 군데를 갔었는데 중식이나 카레 메뉴에 ʻ비건 옵션 가능ʼ이라고 자연스럽게 명시되어 있는 게 인상 깊었어요.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느낌이랄까요.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비건의 삶을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저는 오래전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환경 NGO 커뮤니케이션 팀에서도 일을 하여서 그런지 지속 가능한 삶과 비건 지향적인 삶이 체화되어 있어요. ʻ제로웨이스트를 한다ʼ, ʻ비건을 한다ʼ고 하면 되게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냥 ʻ내 삶을 좀 단순하게 만든다ʼ라고 하면 하나도 안 어렵거든요.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는 것도 ʻ내가 한 번 더 나가서 구경하면서 뭔가를 사 온다ʼ라고 재미있는 포인트로 바꿔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거라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관련된 사이드 프로젝트도 다양하게 하시던데 소개 좀 해주세요.
환경문제가 되게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친구들과 이걸 좀 재미있게 탐구해보자는 취지에서 ʻ재미탐구소ʼ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어요. 크리스마스 때 소비하고 육식을 먹는 대신에 각자의 소장품을 나누고 비건 음식과 비건 와인을 먹는 크리스마스 파티나 비건 버터를 같이 만들어보는 워크숍과 같이 환경문제를 쉽고 부담스럽지 않게 접근하는 방식을 시도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유 옵션을 가지고 있는 동네 카페 정보를 모으고, 두유에 대한 니즈가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진행했던 게 ʻ하우두유두ʼ라는
프로젝트였고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행동하며 실천하고 계시네요. 그런 혜란 씨에게 망원동이라는 동네는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대안 문화를 좋아하다 보니 이런 나와 맞는 곳에 살고 싶었어요. 문밖을 나섰을 때 나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해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는데 딱 이 동네가 그런 것 같아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고 아이들도 많아요. 빌라만 혹은 아파트만 줄지어진 것도 아니고 골몰 골목 주택들도 있고 재래시장도 있고요. 20대가 밀집되어 있는 대학가보다 활기 있고 사람 사는 느낌이 든달까요. 다양한 삶이 섞여 있다는 점이 이 동네의 큰 매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