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안녕> 중에서 -
얼마 전 대통령 선거를 마치고 평일 휴무의 여유를 즐기고자 오랜만에 동네 카페로 향했다. 카페 입구를 들어서는데 ‘매장 이전 안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카페는 후암동이라는 꽤 먼 지역으로 이전한다고 한다. 마지막 영업일은 3월 12일. 최근 방문이 뜸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엄청난 소식을 3일 전에야 알게 되다니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동네는 당산 귀퉁이에 붙어있는 주거/오피스 혼합 지역으로 9호선 역이 생기면서 뒤늦게 상권이 들어선 탓에 딱히 맛집이라고 할만한 곳들이 별로 없다. 그런 지역에 서울 3대 로스터리 카페 1세대로 꼽히는 ‘엘 카페’의 존재는 참으로 귀했다. 내가 퇴사한 시점에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멀리 놀러 나가지 못하고 집 주변 카페를 나들이 삼아 다니곤 했는데 엘 카페도 그 시기에 알게 되어 종종 들르곤 했다. 낡은 공장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실내 인테리어와 적절히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는 코로나 속 지루한 백수의 일상을 함께 해주었다. 편한 복장으로 집 밖에 나가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오거나, 아이스커피를 한 잔 하며 여름 대낮의 더위를 식히고 오기에도, 외출이 귀찮을 때 더치 원액을 배달시켜 먹기에도 부담 없는 곳이었다.
마침 3월 12일은 내게 이 카페를 처음 알려준 동네 지인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던 터라 우리의 약속 장소도 자연스레 엘 카페가 되었다. 오픈 시간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매장에 들어섰는데, 이미 카페는 만석이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일행 덕에 다행히 테이블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마지막 커피라고 생각하니 메뉴 주문에도 더 신중해야 할 것만 같았다. 주로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나는 라테를 주문했고 지인은 새로운 원두를 추천받아 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근 1년 만에 만난 지인과 밀린 근황을 업데이트하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 사이 카페에는 원두를 대량으로 쟁여두려는 손님, 우리처럼 마지막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 그리고 사장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 광경이 신기하면서도 참 따스워서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뒤 사장님께서 우리 테이블에도 오셔서 이전할 장소에 대한 안내와 작별 인사를 건네셨다. 우리는 각자 커피 한잔을 비우고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일시적으로 엘 카페의 공백을 대신할 드립백과 원두를 사고 또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아쉬움을 달래 보았다.
지척에 스타벅스 매장 두 곳을 두고도 나와 이웃들이 굳이 엘 카페를 찾아갔던 마음, 그게 단순히 커피 맛이 더 좋아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런 마음과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는 안녕할 수 있었다.
(2022년 3월 말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