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친구_괴산 이지현 님
7년 차 농부 | 농업법인회사 ㈜뭐하농 대표 | 불도저
인스타그램 @mohanong_official
작은 행복들이 저를 채워주니까 행복감은 훨씬 커지고 그래서 정말 한 번도 제가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몸은 괴로워도 후회가 된다거나 이런 경우 정말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여름이라기엔 다소 이르고 봄이라기엔 조금 뜨거운 5월의 어느 날, 괴산의 뭐하농하우스에서 다섯 번째 시골친구를 만났다. 청명한 하늘과 초록 초록한 식물이 보이는 뒤뜰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기가 윙윙 날아다니고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작은 일들에도 감사하고 즐겁다는 그 ‘행복’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지현 님은 원래 서울에서 직장 생활했던 걸로 아는데 어쩌다 귀농하셨어요?
회사를 위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서 서울 생활에 현타가 왔어요. ‘이렇게 말고 우리를 위한 인생을 오늘 좀 살 수 없을까?’ 그 당시 맨날 남편과 몇 살 되면 시골에 가서 전원주택 짓고 편하게 살자는 얘기를 했었는데 그게 있지도 않은 미래 같은 거예요. 오늘 나는 너무 불행한데 왜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희생해야 하는지, 고민되더라고요. 오늘 감사한 인생을 살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 봤는데 자연의 시간에 맞춰서 산다면 가능할 것 같았고 그게 바로 농부였어요.
괴산으로 오게 된 이유가 있나요?
농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후부터 현실적으로 접근했죠. 매달 나가는 지출을 감당하려면 어따ᅠ간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알아봤고, 아주 현실적으로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게 표고버섯이더라고요. 작목반을 찾다 보니 오래전부터 표고버섯을 재배해 오신 분들이 괴산군 감물면에 계셨어요. 작목반에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니까 그래도 내가 망하게 두지는 않을 것 같아서(웃음) 귀농하기 전부터 주말마다 내려와서 선생님들께 물어보며 준비했어요.
그래도 농사짓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저희가 7년 전 5월에 내려와서 4개월 동안 여기에 있는 작목반 선생님들 농장에 가서 살다시피 했어요. 선생님들이 처음에는 저희보고 안 될 거라고, 망한다고 돌아가라 하시면서도 엄청 자세히 잘 가르쳐주셨어요. 막 배지를 부숴 보라고도 하시고 어떤 느낌, 어떤 강도에서 버섯이 잘 나는지, 촉각적으로까지 세세하게 가르쳐주셨어요. 그렇게 배워서 9월 9일에 첫 배지를 개봉했고 5천 개로 시작해서 1년, 2년, 3년 지나며 3만 개까지 늘려갔어요.
그 정도 규모이면 농사로 생계유지가 되나요?
2인 가구가 먹고살려면 한 3만 개는 해야 해요. 마지막 3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 저는 학원 강사랑 과외 투잡 뛰었어요. 저희는 겁이 많아서 내려오기 전부터 전지 크기의 엑셀 표를 짜서 준비했거든요. 가락시장 표고버섯의 일일 경매 금액 10년 치를 뽑아보고, 최하가보다 10% 더 낮은 금액으로 우리가 벌 수 있다고 가정했어요. 그 단가로 했을 때 재배 규모별 예상 수입을 월별로 적어놓고 그에 맞춰서 세부 계획을 세웠죠. 그래서 내려오기 전부터 미리 면접 봐서 오자마자 투잡을 뛰었고요. 다행히 저희가 내려온 해 12월에 청년창업 후계농이라는 정부 사업에 선정되어 3년 동안 지원을 받게 되어 바로 다음 해부터는 남편이 농사에만 몰두할 수 있었죠. 그렇게 3년을 정말 치열하게 농사지었고 그러다 보니까 경제적으로도 빠르게 안정될 수 있었어요.
엄청 현실적이고 계획적으로 준비하셨네요.
그래야 내가 여기에 평생 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실험을 하거나 환상을 가지려고 온 게 아니었고, 농촌에서 살고 싶은데 평생 여기에 정착하려면 경제적으로 안정이 돼야 하잖아요. 내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계속 주어지는 계획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엄청나게 현실적인 고민과 걱정에 기초한 계획을 짜서 미리 대비를 해왔던 게 저희가 버티면서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인 것 같아요.
대게 소‧중농들은 판로를 개척하기 어렵다고 하던데요.
저희도 1년 차에는 마켓에 진짜 많이 나갔어요. 2년 차부터는 기존 고객들이 재구매를 많이 해주셔서 표고버섯은 거의 90% 직거래가 되었고, 저희가 다른 농산물도 재배하면 사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유기농 밭농사도 하게 되면서 한살림 생산자로 들어가게 됐고 비교적 빠르게 안정이 되다 보니까 다른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이 있나요?
고객 관리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정성을 다해 키운 작물들이다 보니 저한테 굉장히 소중하더라고요. 스마트스토어 같은 데서 불특정 다수에게 팔고 싶지 않았어요. 그 정성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분들에게 팔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초기에는 지인 판매가 많았죠. 그렇지만 모르는 분들께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포장부터 굉장히 신경 쓰고 각 농산물의 재배 과정과 손질 및 요리 방법, 단/장기 보관 방법 같은 것들을 정말 자세하게 편지에 적었어요. 고객이 주문하지 않은 다른 농산물도 조금씩 넣어주고, 고객별 맞춤 관리를 하다 보니 빠르게 팬층이 생겼어요. 재주문이 늘어나는 건 기본이고 저희가 한 번도 홍보해 달라고 부탁을 안 했는데도 계속 주변에 홍보를 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마케팅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고도 엄청 빠르게 직거래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규모 대비 높은 소득을 올릴 수가 있었죠.
정착 과정에서 시행착오나 어려움은 없었나요.
진짜 어려운 게 없었어요. 물론 몸은 좀 힘들죠.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니까 목 디스크가 오고 손목이 다 망가져서 힘을 못 써요. 요령이 없어서 몸이 망가질 정도로 일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농사라는 게 그 이상의 행복감을 주더라고요. 회사 다닐 때는 나의 어떤 결과물에 대해서 비난받고 공격받고 계속 경쟁해야 했는데 농사는 그럴 게 없는 거예요. 가끔 잔소리는 듣죠. 주민분들이 지나가다가 저희 밭을 보고 한 마디씩 하시는데 저희 같은 초짜에게는 되게 고마운 말이에요. 우리가 밭을 잘하는지 못 하는지 모르는 때에 아저씨들이 그렇게 얘기해 주는 건 그럼 내가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거잖아요. 농사는 나의 노트북과 모든 파일이 모두에게 다 열려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어느 정도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농촌에서 살기 힘들죠. 그런 잔소리를 오히려 관심으로 고맙고 즐겁게 받아들이면 말씀해 주시는 분도 쟤네는 열심히 하는 애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가르쳐주기 시작하시거든요. 그런 거를 받아들이면 사실 어려운 건 없었어요.
지현 님이 생각하는 농사의 매력이 뭔가요?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잖아요. 나의 하루의 노동을 이만큼 해서 이만큼 해냈다는 것에 잠들 때 되게 행복감이 컸어요. 풀을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뽑으면은 깨끗한 밭이 보이니까 되게 하루가 행복해요. 그리고 탓할 곳도 자연밖에 없는 거예요. 봄에 장마가 와서 싹 망했으면 가을 작기는 잘 된다더라고요, 근데 정말 가을 농사가 잘됐어요. 봄이 잘됐으면 가을이 망하고요. 연달아 잘되는 경우는 로또예요. 7년간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 의연한 태도도 배우게 되다 보니까 일희일비할 일도 많이 없어지고 사람에 대해서도 미워할 일도 많이 없어요.
시골 생활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거 같아요.
정신적으로 정말 행복해요. 자연을 항상 만지고 스킨십하면서 순간순간 감사하고 이렇게 바람이 불어도 즐겁고 지나가다가 친구가 들려도 참 기분이 좋고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다 보면 그런 작은 일들 감사할 일들이 많아져서 보상의 개념이 없어지더라고요. 회사 다닐 때는 월화수목금 너무 괴롭다가 주말에 한번 맛집에서 2~3시간 줄 기다렸다가 비싼 거 사 먹거나 3~4개월 월급 모아서 명품 하나 사는 걸로 나에게 보상을 줬는데, 여기선 그냥 하루에 몇 번씩 되게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이 있는 거예요. 작은 행복들이 저를 채워주니까 행복감은 훨씬 커지고 그래서 정말 한 번도 제가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몸은 괴로워도 후회가 된다거나 이런 경우 정말 단 한 번도 없어요. 항상 잘 내려왔고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지, 농촌 생활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그리고 괴산이 참 좋았던 게 어르신들께서 되게 저희를 응원해 주신 분들이 많으세요.
귀촌할 때 걱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텃새나 이웃 주민들과의 갈등이잖아요.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작목반 분들이나 동네 어르신들은 젊은 애들이 고생한다고 격려해 주시고 농업을 해줘서 고맙다고 해주신 분들이 훨씬 많았어요. 대부분 부모님 세대이시다 보니 저희가 처음 왔을 때 아들, 딸 대하듯이 애틋하게 많이 챙겨주셨던 것 같아요. 저희가 몰라서 전화하면 바로 달려와 주시고 지나가다가도 그냥 한번 들렀다 가세요. 그냥 궁금해서, 걱정돼서, 그런 부분들 때문에 저희도 작물 잘 키우는 요령도 빨리 배울 수 있었고 잘 키워서 잘 팔 수 있었어요. 저희가 잘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응원과 여기 먼저 와있던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얻은 그런 안정감 덕분에 저희도 농촌과 농사에서 얻은 ‘함께 한다’는 가치를 더 많이 생각하면서 ‘뭐하농’을 친구들이랑 꿈꾸게 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뭐하농은 괴산 여섯 명의 청년들이 모여 농촌에서의 삶과 농업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만든 농업 콘텐츠 그룹이다.
그렇게 ‘뭐하농’이 시작되었군요.
네, 농부들이 그냥 농산물만 생산하는 것 이상으로 분명히 누리고 만들어 내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가치를 농부들이 직접 전달하기 어려우니까 ‘뭐하농’을 만들어서 해보자고 했죠. 물론 농사로 돈 벌어서 나 혼자 여기서 유유자적 살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작목반 형님들이 맨날 저희보고 뭐라 하세요, 왜 사서 고생하냐고. 그냥 그 시간에 버섯 농사만 지으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그런 농사가 얼마나 나한테 치유가 되었고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공유하고 싶어 졌어요. 작물만 팔아서는 우리가 농산물 판매하는 그 이상, 이하도 될 수 없거든요. 그래서 농부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농사를 짓고 농사라는 게 지금 시기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중간에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달하는 역할을 제가 피를 토해내며(웃음) 열심히 하고 있죠.
그렇게까지 ‘뭐하농’을 지속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요?
어차피 ‘뭐하농’을 돈을 벌려고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이렇게 농업과 농부의 어떤 생각이나 마음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전하는 자체가 되게 즐겁고 행복해요. 제가 이 일에서 가치를 느껴서 하는 거지 어떤 비즈니스적으로 미래가 있거나, 무슨 독립투사나 농업의 혁명가가 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처음에는 농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건 조금 교만인 것 같더라고요. 그저 저희가 하는 이야기나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이 저희가 참 재미있고 농부들도 즐겁고 거기에 참여하는 일반인 분들도 재밌어하시니까 같이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주 큰 뜻은 없습니다.
커뮤니티 멤버십, 채소 구독, 팝업 식당, 옥상 정원 등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고 계세요.
농부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자연도, 사람도 살릴 수 있는데 몇천 평의 땅에 작물을 재배해서 생산성을 올리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떤 농사를 지어야 하는가, 그런 걸 고민하다 보니 ‘모두의 밭’이라는 것을 만들게 됐어요. 모두의 밭에서 3년 동안 실험하다 보니 노하우가 쌓여 밀양 도시(마이그린 멤버십)에도 유사한 공간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또 커뮤니티 멤버십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도시에 있는 분들이 괴산에 와서 같이 활동을 해보게 되었죠. ‘밭’이라는 공간을 경작한다는 의미를 조금 더 자기 삶에 적용할 수 있게 해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3년째 달리다 보니 조금씩 저희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다행히 참여자분들의 좋은 호응을 얻고 있고요.
농사는 돌봄의 미학이거든요. 생명에 집중해서 돌보고 밖에 내놓고 물 주고 상태를 살피는 과정이 결국 나를 돌보는 시간이에요. 자연적으로도 생태적으로도 순환이 되게 만든 그 자연 순환형 밭에서 우리가 충분히 자연과 함께 회복해 나갈 수 있다는 지점들을 공유하고 있어요.
청년 마을같이 지역에서 살아보는 프로그램을 통해 괴산으로 유입되는 분들도 꽤 있겠어요.
저희는 많았어요. 두 달 살이 참여자가 총 23명이었는데 그중에 18명이 괴산과 인근 지역에 정착했어요. 엊그제는 1기 때 만난 두 친구가 여기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고요. 그럴 수 있었던 거는 ‘뭐하농’이라는 회사도 스스로 여기에 정착하고 이제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보니까 저희를 보면서 청년들도 희망을 봤던 것 같아요. 농촌에서 창업할 때 저런 과정을 밟아간다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까 말씀드린 지역 주민분들이 되게 환대하는 분위기이고, 저희를 예뻐하면서 도와주려고 하시는 걸 청년들도 많이 보면서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지현 님은 10년 뒤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사실 저희가 농촌에 올 때도 ‘뭐하농’ 같은 걸 해야지 하고 내려왔던 게 아니라 그냥 정말 남편이랑 밥 한 끼 먹고 싶고 도시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왔던 건데 그때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예 그림조차 그릴 수 없었던 삶을 살고 있는 거라서 10년 뒤에는 내가 어떤 모습일까, 몇 년 뒤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가 전혀 그려지지가 않는 것 같아요. 조금조금씩 하고 싶은 일은 있지만 그것들도 내가 하겠다고 계획을 하기보다는 그냥 계속 주어진 일들을 되게 재미있게 열심히 하다 보면 또 재미난 일이 앞에서 문이 열리는 것 같아요.
그 새로운 문을 여는 게 쉽지 않은 이들도 있거든요.
그 새로운 문에 들어가는 용기가 저는 조금 더 많은 것 같아요. 지금 놀고 있는 들판이 너무 안정적이고 재밌어서 그냥 거기서만 놀아도 되는데 제 눈앞에 새로운 문이 열렸을 때 거기 들어가는 걸 저는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뭐하농’도 계속 농업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고 시도하고 있고요. 앞으로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계속 더 재미난 일이 생기면 좋겠어요. 고인 물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계속 머물러서 거기에 만족할까 봐 그게 제일 두렵고 경계하고 있어요. 여기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뭔가 새로운 것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그 친구들이 ‘뭐하농’을 징검다리 삼아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볼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도 지속하고요. 초심을 잃지 않고 즐겁게 가벼운 마음으로 계속하려고 합니다.
*해당 인터뷰는 2023.06.02에 발행된 뉴스레터 <안녕시골>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