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 니스, Nice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다치거나 질병으로 아픈 곳을 찾아 치료받으면 된다.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심리상담 선생님을 찾아가서 상처 받은 이야기를 비밀스레 꺼내어 마음을 추스른다. 몸이 아플 때 병원을 찾는 것만큼 익숙하지 않지만 심리상담 선생님은 나를 환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입은 친구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어주시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병은 꽤 치료가 되었다고 기억한다.
문제는 스트레스라는 놈인데 몸과 마음을 동시에 아프게 한다. 누적되며 심각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건강 검진을 받아도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고, 심리상담 선생님과의 약속된 상담 회차가 끝나면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들로 마음에 상처가 났다. 몸이 문제인 것 같아 운동을 하고 요가도 배워보았다. 마음이 황폐해진 것 같아 꽃을 바라보고 만지기도 하고 예쁜 케익을 만들어 보지만 그때뿐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강철 멘탈이 있을지 모르겠다. 존재감은 확실히 느껴지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왜 나를 자꾸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다.
화려한 리조트의 아늑함 그리고 끝내주는 풍경은 갖은 스트레스에 찌든 서울 사람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멀리 유럽이나 북미의 대도시로 떠나면 물리적인 거리만큼 현실의 문제 상황들과 짧지만 완벽한 단절을 맞아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서울에서 먼 리조트에서의 휴식과 유럽의 풍경은 스트레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다.
휴가로 만든 스트레스와의 단절은 첫 출근날 퇴근 즈음이면 끝이 났다. 잠시 잊었을 뿐이지 해결해야 할 일들은 이메일 박스에 고스란히 쌓여가고 있었고, 장시간 비행으로 생긴 피로는 또 다른 휴식으로 풀어야 했다. 달콤한 단절은 너무 짧았다. 내 맘대로 잘 풀릴 땐 천국 같고, 잘 안 풀릴 땐 지옥 같고 그 천국 같은 시간은 항상 너무 짧게 느껴지는 인생처럼, 휴가의 달콤함도 마찬가지로 너무 짧았다.
관찰 예능이 대세이다. 서울 시내 좋은 동네에서 젊고 멋있는 독신들이 혼자서 살고, 남자가 혼자 살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면 일상의 고통을 잠시 잊고 대리 만족하며 티비의 즐거움에 빠질 수 있다. 재미있는 몰입을 느낄 수 있어 일상 속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스트레스를 잊을 수도 있다. 그들이 멋있게 일하는 모습과 여유로움은 눈을 즐겁게 하지만, 끝에는 종종 뭔가 모를 부러움이 생기기도 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생각하기 싫은 허전함이 찾아오는 날도 있다.
반대로 '삼시세끼'라는 관찰 예능을 더 좋아한다. 도시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니 부러움이나 박탈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겨우 세끼 밥을 해 먹기 위해 파도치는 갯바위에 올라가서 되지도 않는 낚시를 하며 어렵사리 잡아온 물고기 한두 마리에 즐거워한다. 마트에 가서 손질된 생선을 사 오면 될 일인데 고생스럽게 잡아온 조그만 물고기 몇 마리가 그렇게 즐거울 수 있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파뿌리를 뽑고 시골 장터에 나가 반찬거리를 사 오며 뿌듯해한다. 멋있는 커리어의 모습이나 화려함을 동경할 기회는 원천적으로 없다. 때로는 한심할 만큼 느리지만 맑은 공기 속에서 친구와 삼시세끼 밥을 먹는 모습에는 도시의 분주한 스트레스는 보이지 않았다.
출연자들의 미숙함이나 외딴 상황에서 나오는 웃프고 답답한 장면이면 낚시도 요리도 내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레 감정이입이 생기기도 했다. 바닷가와 시골의 건강한 밥상을 경험해 보고 싶어 설레기도 했다. 서울의 삶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시간이었지만 출연자도 시청자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화려한 대도시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니스'로 향했다. 20년 만에 다시 온 니스는 태어나서 자란 부산의 해운대와 많이 닮았다. 니스와 해운대에는 거닐고 싶은 멋진 해변이 있고, 그 해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니스와 해운대에는 미술관이 많다. 여유와 예술적인 감성으로 이 곳에서의 시간을 풍족하게 채우겠다는 설레임을 안고 도착했다. 당연히 샤갈과 마티스의 미술관뿐만 아니라 니스파(Ecole de Nice) 현대 작품들을 다시 만나러 니스현대미술관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현대미술을 즐기고 호사스러운 휴가의 모습을 그리며 니스 역을 빠져나왔다.
아파트형 숙소에 도착하니 침실 테라스에서는 파란 지중해 바다가 보이고, 거실 테라스 쪽 건물 뒤편의 거리는 트램이 다녀 이국적인 신비로움을 더해 주었다. 거리의 풍경을 가리고 있던 트램이 천천히 움직이고 그 자리에 내일 꼭 가야겠다고 점찍은 동네 빵집을 발견하였다. 호텔이 아니어서 주방이 딸린 숙소는 처음이었다. 주방에서 우리와 조금 다르지만 유럽 냄새가 듬뿍 나는 식기와 주방용품들을 보고 레스토랑 식사 대신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장을 보고 저녁을 요리해 먹기로 했다. 니스의 동네 슈퍼는 기대했던 것만큼 다양한 종류의 치즈로 가득했고, 비닐 팩으로 꽁꽁 포장을 해두었지만 치즈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럽의 식재료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들고 해변을 따라 걸으며 사진을 찍다가 돌아왔다. 배가 고팠지만 천천히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저녁을 먹었다. 멀리 페스티벌 음악소리를 들으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알람 없이 배고플 때까지 자고 일어나 아침을 간단히 해 먹고, 오후엔 어제 테라스 풍경에서 발견한 동네 빵집에 나가 맛있는 브리오슈를 사 먹고 커피를 마셨다. 다시 숙소에 들어와 낮잠을 자고 요리를 했다. 그렇게 늦잠을 자고 아침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피씨로 음악을 듣고, 빵을 사 먹고 요리해 먹으며 며칠을 삼시세끼만 꼬박꼬박 챙기다 보니 미술관을 잊어버렸다.
서울 광화문의 외국계 회사에 일하는 30대 독신남이었던 나는 별종이다 싶을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다. 옥션 프리뷰 전시에 가고 보너스를 받는 달이면 호텔 객실을 전시장으로 꾸미고 그림을 파는 행사에서 그림을 사 올만큼 미술을 좋아하는 놈이었다. 그러던 놈이 미술관 투어가 필수인 니스에서 삼시세끼 삼식이의 빈둥거림에 만족하며 미술관 투어를 포기했었다. 생각해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게으름을 피웠던 니스 여행이었지만, 그런 여행의 시간을 지금 그리워하고 있다.
홍콩으로 해외 도시로 한 달 파견근무를 가서 일해본 적이 있는 나는 요즘 핫한 유행인 한 달 살기 휴식을 꿈꾸고 있다. 다시 니스를 찾아 한 달 정도 지내보고 싶어 한다. 한 달 니스 여행의 플랜, 계획을 물어온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I am planning to do nothing."
그래도 남프랑스 니스까지 갔는데 뭔가는 하고 싶은 게 하나는 있을 텐데... 라고 의심한다면 이런 여행을 한번 해보라고 말할 것이다.
"Eat till you are sleepy, Sleep till you are hungry."
- 졸릴 때까지 먹고, 배고플 때까지 잠자기.
그리고 쪼리를 끌고 동네 빵집에 가서 커피와 브리오슈를 먹을 것이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도 좋고, 비가 쏟아져도 좋을 것이다.
니스와 삼시세끼의 조합은 미술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서울 사람의 니스 여행에서 미술관을 빼앗아 버렸다. 장을 보고 빵을 사 먹고 낮잠을 자던 모습은 장소만 다를 뿐 '삼시세끼'에 출연한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미술관 투어라는 욕심이 빼앗기니, 니스 여행의 시간은 뻔하고 단조로운 삼시세끼로만 채워졌다. 게으름의 끝을 보고 온 것 같아 아쉬워해야 하는데 대신 시간을 이렇게 채워도 괜찮았다는 생각이 남는다.
바쁘게 여러 미술관을 다니지 않았으니 발바닥도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서서 그림과 오브제를 보고 전시실을 옮겨 다니지 않았으니 컨디션은 늘 좋았다. 그래서인지 늦은 오후 천천히 걸었던 니스 해변의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담을 수 있었다. 해변의 아름다움과 슈퍼마켓의 먹거리, 빵집만 생각하고 게으름을 피우다 왔는데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해변을 산책하고 샤워를 하고 나면 통증치료를 받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도 뻐근하게 아팠던 어깨와 목 근육도 말랑말랑 풀어져있었다. 다음에 꼭 해야지 가야지 하는 것들이 없어도 충분히 즐거웠는데 결국 모두 과한 욕심이었다.
며칠의 시간 속에는 삼시세끼만 있었지만 니스 여행을 떠올려보면, 스트레스 프리한 상태로 사는 것도 어쩌면 쉬운 일 일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한다. 장을 볼 수 있는 작은 마트와 걸으며 즐길 공짜 풍경하나, 동네 빵집과 맛있는 커피만 있으면 된다. 모두 서울에서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분주하게 일을 해야 하는 서울에서 삼시세끼만으로 스트레스 프리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가 생길 수도 있지만, 니스에서의 경험처럼 욕심을 줄이고 삼시세끼의 즐거움을 잊지 않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It's my life.
모든 인생에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지점을 두고 줄어들기만 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갈수록 남아있는 소중한 시간도 일 년씩 줄어든다. 인생에서 커리어는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인생이라는 큰 배에서 하나의 중요한 부속일 뿐이다. 커리어를 위해 나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으며 살 필요는 없다. 욕심을 내고, 남들을 부러워하며, 난치병 스트레스를 키우고 아파하며 살 필요는 없다. It's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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