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테네
아침 드라마 같은 막장 스토리와 판타지 영화 같은 픽션이라 재미있었던 그리스 신화의 핵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테네 호텔의 조식 테이블 풍경이다.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호텔 조식을 종종 '패스'해버리는 남편과 달리 와이프는 호텔 조식을 생명수처럼 여기고 절대 빠뜨리지 않는다. 출장을 다니며 아침에 잠을 더 자기 위해 조식을 포기하는 습관이 든 남편을 버려두고 함께 여행 중인 와이프는 가끔 혼자서 조식을 먹고 오기도 할 만큼 조식에 대한 굉장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매일 조식 뷔페가 끝나는 시간이 다가오면, 여행 중에 계단을 만난 내 캐리어보다 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엘리베이터에 타야 했다. 여전히 아침 커피 말고는 아무것도 먹을 힘이 없는 남편을 위해서 조식 플레이트 셔틀 서비스를 해준 와이프 덕분에 무사히 아침 식사를 마쳤다.
커피를 마시고 잠이 깨고 보았던 아테네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날 아침 SNS에 썼던 것처럼 "내가 여기를 오다니, 내가 이런 데를 오다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을 만큼 기분 좋은 풍경이었다. 그리스 최고 유산을 배경으로 먹었던 나의 그리스식 아침식사였다.
일주일 전 산토리니를 가기 위해 피레우스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처음 보았고, 지난밤 야경으로도 보았지만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은 가까이서 바라본 아침의 모습이 가장 멋있고 아름다웠다. 부팅을 완료하고 20분 정도 걸어올라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에 다녀왔다.
Vandalism, 밴덜리즘
야만적인 문화재 파괴행위를 밴덜리즘이라고 한다. 최근의 밴덜리즘 사례는 IS가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문화재들을 파괴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문화재들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기록이 있다. 수백 년이 지나고 일제 강점기에도 많은 우리 문화재들을 또다시 빼앗겼다. 파괴하지 않아 밴덜리즘의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중에 빼앗긴 것으로 추정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지금도 일본의 대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19세기 초 그리스를 찾은 영국 외교관 '엘긴, Elgin'은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과 예술품들을 영국으로 가져갔다. 그리스는 당시 터키의 식민지배를 당하던 중이라 10년에 걸쳐 엘긴의 도난을 겪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문화재와 예술품들을 빼앗겨 버렸다. 영국에서는 외교관 '엘긴'이 런던으로 가져왔다고 해서 '엘긴 마블'이라고 부른다. 파르테논 신전에 부착되어 있던 많은 예술품들과 벽면이 이때에 뜯겨나가 지금까지 망가진 채로 200년이 흘러왔다.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일본에 전시되고 있는 것처럼 영국인들은 '엘긴 마블'을 가져가서 지금도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에 전시 중이다. 영국도 파괴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밴덜리즘의 선을 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을 넘지 않았더라도 다른 문화재 도굴과는 규모가 다른 심각한 약탈 행위였음은 분명하다. 영국의 정치인들은 그리스의 능력으로는 세계 최고의 유산을 온전하게 보관할 수가 없고, 또는 악명 높은 아테네의 대기오염에 최고의 유산들을 상하게 둘 수 없으니 런던 대영박물관에 두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유산이라고 말하면서 도둑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것도 자가당착이다. '엘긴 마블'이 아니라 그리스 대통령의 말처럼 '파르테논 마블'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20대 초반에 런던 대영박물관에 갔을 때 미라를 처음 보고 신기해했고, 아름다운 대리석 예술품을 보면서 유럽 문화재의 아름다움만을 머릿속에 담고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유물들은 대부분 훔쳐온 것임을 알고 그 거대한 감옥 같은 건물을 '대영박물관, The British Museum'이라고 부르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살아왔다.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진 유물들은 런던에서 문화재라기보다 제국주의의 상징일 뿐이다. 아테네 호텔의 조식 테이블에서 아크로폴리스와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엘긴의 악행에 대해서는 밴덜리즘으로 다루고 있지 않는 현상을 고민해 보게 되었다. IS의 밴덜리즘과 다르게 야만적인 파손행위는 아니지만, 2,500년 전에 만들어진 파르테논 신전과 런던으로 옮겨진 예술품들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도둑질을 당한 것이었다. 영국 정치인들은 반복되는 그리스의 반환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도난당했다는 감정적인 상처는 뒤로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엘긴 마블'은 법적으로 도난품이자 장물이다. 원상회복이 되어야 하고 처벌이 이루어져야 마땅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현실의 법으로는 시효가 지났으며 국제법은 구속하거나 강제할 방법이 없다.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리스는 돌려받을 길이 없어 보인다. 자발적으로 시민의식이 반성하고 돌려주기를 반복적으로 설득해야만 가능할 것일까.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테러리즘으로 희생되지 않아야 하듯이 소중한 문화유산은 밴덜리즘으로 파괴되거나 약탈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200년 동안 런던에 두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구매하여 소장 중이던 이집트의 황금관과 그 속에 있던 사제의 미라가 2011년 아랍의 봄 민중봉기로 혼돈의 상황 속에 도난당한 유물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2017년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구매금액인 400만 달러(대략 48억)의 손해를 보았지만, 도난품이라는 사실에 즉시 반환을 결정했다고 한다. 뉴욕 메트는 인도와 이탈리아에도 문화재를 반환한 적이 있다.
길을 가다 주운 지갑을 꿀꺽해도 크게 욕을 먹지는 않겠지만, 신분증을 확인하고 우체통에 넣거나 경찰서를 통하여 돌려주려고 하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직접 훔치지 않았고, 구매하여 소장하게 된 유물임에도 반환을 결정하였다. 파르테논 신전에도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처럼 이성이 올바르게 작동하면 도난품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도리인지 쉽게 알 수 있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면 불행한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반환을 계기로 이집트와 미국의 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한다.
큰 공적이 있거나 모범적인 인생을 살았던 유명인의 죽음을 통해서 배움과 고마움을 생각한다. 그런데, 테러리즘으로 희생된 죽음을 통해서는 배움과 고마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억울함을 일으키고, 최종적으로 보복이라는 살벌함을 떠올리게 한다. 문화재 약탈이나 밴덜리즘의 피해를 겪은 그리스와 우리에게도 비슷한 감정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다행으로 삼을 수 있다면 테러리즘의 결과는 번복이 불가능하지만, 밴덜리즘은 완벽하게 파괴된 경우가 아니라면 복구나 복원이 가능하다.
벽체의 예술품과 기둥이 뜯어지는 아픔을 겪고 뼈대만 남아 있어도 멋있었던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은 무거웠던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려 신전의 아름다움과 아테네의 풍경을 눈에 담아 주었다. 언젠가 신전의 벽이 온전하게 예쁜 마블로 다시 채워지고 석상과 기둥들이 제자리를 찾으면, 완벽한 황금비율의 더 아름다운 최고 유산으로 살아날 것이다. 2,500 년 전에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풍경을 엘긴이 망가뜨려도 그렇게 멋있는데, 영국은 '파르테논 마블'을 반드시 그리스에 반환해야 한다. 최근에 그리스의 대통령이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다시 반환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옥스포드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는 영국의 새 총리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문화재의 반환과 작은 반성을 시작한다면 이웃 섬나라에 대한 우리의 마음도 조금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