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 - 생명을 위해 삶을 던진 모험가』를 읽고
(위) 슈바이처가 어려서 보고 큰 인상을 받은 오귀스트 바르톨디의 <아프리카의 알레고리>. 콜마르 태생 바르톨디는 <자유의 여신상>의 작가이다.
『슈바이처 - 생명을 위해 삶을 던진 모험가』. 닐스 올레 외르만 지음. 염정용 옮김. 텍스트. 2012
10년 전 나온 책을 이제야 읽고 묵은 숙제를 마쳤다. 닐스 올레 외르만이 쓴 전기 『슈바이처』이다. 흔히 ‘적도의 성자’라 불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어릴 적부터 나의 우상이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 점유했던 알자스 태생인 그는 칸트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역사적 예수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신학 박사가 되었다. 대학 교단에 서던 그는 다시 진로를 돌려 의사가 되었고, 이후 오늘날 아프리카 가봉의 오지 랑바레네에서 병자를 치료했다. 파이프오르간에 깊은 조예가 있는 연주자였고, 바흐의 전기를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말로 썼다는 얘기까지 슈바이처는 꿈 많은 청소년이 모델로 삼기에 차고 넘치는 위인이었다. 나는 그가 쓴 『나의 생애와 사상』과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가운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대학노트에 옮겨 적고 거의 외우다시피 한 적도 있다. 가령 바흐를 회화적 작곡가로, 바그너를 시적인 작곡가로 이해한 것이나,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차이를 정원과 숲, 데카르트와 니체를 들어 설명한 대목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종교개혁 시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라는 그림을 찾아 알자스의 콜마르라는 도시를 취재하러 갔다가, 지척인 슈바이처의 탄생지 귄스바흐를 못 가고 발길을 돌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언젠가 다시 가면 좀 더 시간을 내야지 하고 벼르던 무렵, 노르웨이 작가의 최신 전기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그에 대한 의혹이 생기고 말았다. 당시 신문에 실린 서평에 따르면 슈바이처는 ‘자기 연출에 능한’ 위선자나 다름없었다. 기차에 4등석이 없어 3등석에 탔다는 일화나, 니체를 본뜬 수염 등이 전형적인 가식의 예라는 것이다. 또한 흑인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체벌을 일삼았으며, 에미 마르틴이라는 여성 비서가 사람들에게 아내로 오해받을 때 부인하지 않는 바람에 헌신적인 아내의 원성을 산 것이 그의 민낯이라 하는 주장이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의 적기를 놓고 저울질했다는 언급은 차라리 덕담이었다.
나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사두었지만, 읽는 것을 차일피일 미룬 것도 어쩌면 슈바이처에 대한 나의 믿음이 상처 입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기우였다. 책을 읽고 그를 향한 존경심은 전혀 줄지 않고 도리어 더해졌다. 훨씬 가깝기 힘든 존재가 되고 만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출간 당시 몇 개 신문에 실린 서평이 대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식의 비슷한 내용이고, 책 뒤표지에 적힌 슈바이처에 드리운 신화적인 요소를 벗겨냈다는 요약으로 보아 대부분 필자가 짧은 시간 동안 책을 깊이 읽지 않고 선입견에 기대어 썼거나 보도자료를 대충 옮긴 듯하다. 저자가 굳이 머리말에서 그동안 전기들이 슈바이처를 흠집 낼까 봐 의도적으로 피했던 진실을 가감 없이 전한다고 한 것이 본뜻과 달리 오해의 여지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외르만은 슈바이처의 삶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와 사상을 소개하는 데에도 적잖은 분량을 할애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더욱 반갑다) 책의 중반부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100년 전 유럽 전성기 막바지에 철학과 신학에 대두된 문제의식을 따라가기 버겁고 오늘날 추가된 연구 성과를 모르기에 조심스럽지만, 슈바이처의 사상이 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데는 저서의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아는 것이 필수적이고, 또 그만큼 잘 요약되었다.
슈바이처의 철학 학위 논문 주제는 칸트 비판이다. 그는 칸트의 가장 큰 오류가 ‘선험적’이라는 말을 만든 것이라 지적했다. 뒷날 누구보다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슈바이처 사상의 씨앗인 셈이다. 철학에 이어 신학의 영역으로 넘어간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매진한다. 20세기 들어 가장 크게 대립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 사이에서 전자의 선두에 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계몽의 영역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교조적 예수상에서 벗어나 실존적인 예수상을 찾자고 주장했다. 그가 괴테의 범신론을 열렬히 지지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뒷날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라는 책으로 집약되는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생각은 바흐 전기 집필로 이어진다. 보수적 교회의 시각으로 급진적이었던 슈바이처가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에 파이프오르간 스승 샤를 마리 비도르가 주선한 일이었다. 슈바이처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종말론과 메시아론에 젖었다가 예수 사후 절망한 사람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길임을 설교한 인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흐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현세에서 천국의 문을 열어 보인 신비주의 설교자였다.
슈바이처가 보통 사람은 한 가지도 힘들 공부와 직업을 자유자재로 섭렵한 것을 흔히 다빈치나 괴테에게 견준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 시작한 의학이 이전처럼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는 인간적이다. 남다른 전력 탓에 슈바이처는 의학으로 넘어간 뒤에도 예수의 실증에 매달렸다. 그는 예수가 정신병자나 편집증 환자였던 것이 아닌가를 학위 논문 주제로 삼았다. 어쩌면 답이 정해졌을 수밖에 없던 이 연구는 슈바이처에게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그가 맹목적으로 달달 외우다시피 해서 최종 의사 변허 시험을 통과한 대목에서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떠올랐다. 평생 쫓던 사기범을 잡은 연방 수사관이 변호사 자격증을 어떻게 위조했는지 묻자 범인은 답한다. 위조가 아니라 진짜 시험에 합격한 것이라고!
영화보다 더욱 슈바이처에 가까운 이야기가 있다. 그와 동갑내기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파우스트 박사』에서 예술가와 악마 사이의 영혼 거래를 다루었다. 철학과 신학을 차례로 시시하게 여긴 천재 주인공은 창작의 영역에서 신과 겨루고자 음악가가 된다. 토마스 만은 결국 파멸에 이른 작곡가가 용서받는 설화의 영역에 그치지만, 현실의 슈바이처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라는 괴테 파우스트의 주장을 밀고 나아가 아프리카로 떠난다. 사후 2005년에야 출판된 초기 저작 『우리는 아류들』을 통해 슈바이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좌초한 유럽 문명에 작지만 소중한 돌파구를 제시했고 이를 실천으로 보여줬다.
슈바이처는 괴테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를 깊이 연구했고, 물질적인 발전이 아니라 고귀한 인간성이 실현되는 문화를 지선으로 보았다. 여러 민족과 문화의 긍정적인 면을 보려는 노력은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의 본질을 이루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소에게 풀을 먹이고 돌아오는 목동에게 무심결에 길가의 풀을 밟지 말라고 가르쳤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에서 태어나 양차 대전을 겪었고 핵전쟁이 위협하는 냉전의 소용돌이를 산 그는 본능적으로 국경을 초월했다. 그렇기에 식민 통치에 대한 슈바이처의 생각도 때로 오해받았다. 그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기 전에 독립하는 것에 반대했다. 경제나 문화의 수준을 떠나, 총성이 있거나 없거나를 떠나 거의 전 세계가 내전 중인 오늘날을 비춰보면 매우 타당한 생각이 아닐까? 그가 흑인을 체벌한 이유는 그들에게 (우리가 과거에 그랬듯이) ‘사랑의 매’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에게 맞거나 그가 퉁명스럽게 응대한 흑인들이 앙심을 품었다면 그가 평생 적도의 병원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마지막 페이지의 언급이 가장 큰 울림을 준다.
“랑바레네의 많은 아프리카인은 어쩌면 슈바이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병원을 지은 것이 아니라, 그가 그곳에서 갈로아족에게 서로 적대 관계인 팡족과 함께 들것을 옮기게 한 일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바이처는 “니체가 2000년 전에 살았더라면 바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니체처럼 수염을 기른 까닭은 그 자신이 바울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행히 아무도 그를 ‘역사적 예수’일지 모른다고 주장하지 않아, 이단으로 몰리지는 않았다. 분명한 점은 인류 개개인이 슈바이처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생명 존중을 실천한다면 우리 별은 훨씬 천국에 가까우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