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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23. 2022

넬슨 제독, 하이든과 만나다

해밀턴 여사의 역할

1790년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하이든은 쉰여덟 살이었다. 1761년 니콜라우스 공의 형 파울 안톤의 부악장으로 이 가문과 인연을 맺은 지 거의 30년이 흐른 뒤였다. 새 후작 안톤은 음악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선대의 위신을 생각해 궁정악단은 유지했지만, 하이든에게 특별한 요구는 않았다. 그런 하이든에게 콘서트 기획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요한 페터 잘로몬이 런던 행을 제안했다. 영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음악 시장이었다.


하이든은 두 차례의 런던 방문을 통해 열두 교향곡을 작곡했고, 1795년에 빈으로 돌아왔을 때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자기 가문이 배출한 노대가에게 매년 아내 마리아 헤르메네길트의 명명축일마다 미사를 위촉했다. 이렇게 해서 하이든 만년의 최고 걸작인 여섯 편의 미사, <오피다의 성 베르나르다의 미사>(1796), <큰북 미사>(1796), <넬슨 미사>(1798), <테레지아 미사>(1799), <천지창조 미사>(1801), <하르모니 미사>(1802)가 작곡되었다.

이 가운데 1798년에 작곡된 <넬슨 미사>는 원제목이 ‘미사 인 앙구스티스 Missa in angustiis’, 곧 <깊은 슬픔의 시대 미사>이다. 무엇이 이 시대를 슬프게 했을까? 1796년 당시 채 서른 살이 되지 않았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이미 1100년을 이어 오던 베네치아 공화국을 접수하면서 이탈리아 정복을 마친 상태였다. 다음 차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였다. 나폴레옹은 1797년 알프스를 넘어 오스트리아를 목전에 두었다. 온 유럽이 풍전등화처럼 떨었다.

장 레옹 제롬이 그린 <스핑크스 앞의 나폴레옹>, 1868

이어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인도 무역을 차단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했다. 그는 영국을 무력하게 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로 둘러싸인 지중해를 정복하고 나아가 인도까지 영향력을 넓힐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은 분명 자신을 카르타고의 한니발이나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이든이 불안한 예감 속에 한창 미사를 쓸 때 기적이 일어났다. 1798년 8월 1일 이집트 나일 강에서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아부키르 만에 정박한 프랑스 함대를 기습 격퇴한 것이다. 넬슨은 상례를 깨고 해질녘에 해상 접근전을 시도했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프랑스는 브뤼에 부제독을 비롯해 1천7백여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영국군 사상자는 218명에 불과했다.

한 팔 상실, 1799년의 초상, 나중엔 눈도..

그러나 하이든이 <깊은 슬픔의 시대의 미사>를 초연한 9월 23일까지 넬슨의 승전보는 오스트리아에 도달하지 않았다. 이 미사에 ‘넬슨’이라는 또 다른 제목이 붙게 된 것은 2년 뒤인 1800년 넬슨과 그의 연인 해밀턴 여사(Lady Hamilton)가 에스테르하지를 방문했을 때 하이든과 조우했기 때문이다. 하이든은 넬슨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많았지만 이 위대한 전쟁 영웅을 높이 평가했다. 넬슨과 동행한 해밀턴 여사는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해밀턴 경의 아내였다. 그녀의 본명은 에이미 리온이었다. 대장장이의 딸인 에마는 젊어서 드러리 레인 극장의 하녀로 일하다 사창가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워위크 백작의 막내아들 찰스 프랜시스 그렌빌의 눈에 들어 그의 정부가 된다. 그렌빌은 에마를 사랑해 친구인 화가 조지 롬니에게 그녀를 그리게 했다. 그녀의 미모는 그렌빌뿐만 아니라 롬니까지 사로잡을 정도로 빼어났다. 롬니는 평생 그녀에 몰두했다. 왕실 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도 그녀를 그렸다.

조지 롬니가 키르케로 그린 에마 하트

그렌빌은 에마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고, 심지어 이를 위해 재산이 많은 여인과 결혼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에마를 숙부인 나폴리 대사 해밀턴 경에게 잠시 맡기기로 했다. 일단 결혼한 뒤 다시 그녀를 데려올 생각이었지만, 그러는 사이 그녀는 이미 숙모가 되어 버렸다. 해밀턴 경 또한 에마에 깊이 빠졌고, 그녀는 나폴리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 그녀가 입는 옷, 자태, 파티의 메뉴가 빠짐없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롬니의 모델이었고, 롬니의 화실은 그 자체가 공연장이었다. 그녀는 나폴리의 영국인 앞에서 그림과 조각의 모델이 되어 보이는 활인화(Tableau vivant)를 연출했고, 이를 ‘애티튜즈Attitudes’라 불렀다. 전 유럽의 시선이 모였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그녀에 주목했다.

칼라로 리메이크하면 좋겠는데, 비비안 리를 대체할 사람이 없네!

바로 그때 나일 강 전투에서 승리한 넬슨이 나폴리로 개선한다. 원래 나폴레옹을 두려워한 나폴리 왕은 넬슨의 정박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때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와 가까운 해밀턴 여사가 왕을 설득하도록 중재했다. 위풍당당한 제독과 아름다운 대사의 아내가 사랑에 빠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넬슨은 해밀턴 경의 존재를 아랑곳하지 않고 여사와 지냈다. 전쟁 영웅과 절세미인의 사랑 소문은 런던까지 자자했다. 넬슨은 부상 치료를 핑계로 귀국을 미루고 해밀턴 여사와 지냈고, 추문이 퍼지는 것을 꺼린 상관 키스 제독은 치료를 위해서라면 더더욱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권했다. 마침 해밀턴 대사가 송환되자 넬슨도 공사 부부와 귀국을 결심한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마침 나폴리 왕비가 친정인 오스트리아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넬슨의 여정에 대해서는 위의 책 참조.

당시 합스부르크 왕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했고, 황제 프란츠 2세는 나폴리 왕비의 조카이자 사위였다. 왕비가 딸인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손녀)를 방문하는 데 측근 해밀턴 여사와 동행을 원한 것이다. 해군인 넬슨은 당연히 함대와 함께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육로로 가는 왕비 일행의 호위를 자처했다. 팔레로모에서 리보르노까지 배로 이동한 뒤 피렌체, 아레초를 거쳐 앙코나에 도착한 이들은 그곳에서 러시아 배를 타고 트리에스테로 갔다. 당시 오스트리아 배에서 반란이 일었다는 소식에 왕비가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두대에서 죽은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바로 윗 언니였다.

넬슨의 육로. 본인 제작

트리에스테에서 류블랴나, 클라겐푸르트, 브루크 안 데어 무어, 바덴, 마침내 빈에 이르기까지 넬슨을 환영하는 인파는 일행을 으쓱하게 했을 것이다. 빈의 가스트호프 알러 비더멘너에 머무는 3주 동안 넬슨과 해밀턴 부처는 각종 연회에 참석했다. 쇤브룬 궁전에 초대받고 도나우 강에선 ‘나우마키아Naumachia’, 곧 해상 전투의 재연도 열렸다. 넬슨은 코르넬리아 나이트가 쓴 <나일 전투 송시Ode on the Battle of the Nile>의 사본을 황실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이때 황제도 자리를 빛냈다. 뒤에 이 송시에 하이든이 곡을 붙인다.

에마 커크비가 부른 <나일 전투 칸타타>. 같은 에마이니 빙의한 것으로!

하이든이 모신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당시 유럽에서 제일 명망 있고, 부유한 귀족이었다. 원래 이들의 저택은 하이든이 태어난 아이젠슈타트에 있었는데, 가문이 융성함에 따라 이 성이 비좁았다.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형의 뒤를 잇기 전에 노이지들 호수 근처 사냥관에 살았다. 후작은 이 늪지대에 성을 짓고, 사람들은 거침없이 이곳을 베르사유에 비교했다. 1766년부터 이 저택은 그대로 가문의 이름을 따서 ‘에스테르하자’라고 불렸다. 하이든과 궁정 악단은 1768년부터 이곳으로 이사해 살았다. 공사는 그 뒤로도 계속되어 1784년 중앙 궁전 맞은편에 폭포가 완성되고서야 끝을 맺었다.

에스테르하자. 로빈스 랜던은 쇤브룬이 모델이라 지적했다

성에는 126개 방이 있었고, 공사비용은 1천3백만 플로린이 들었다. 1천3백만 플로린은 당시 하이든의 연봉이 400플로린이었으니까, 그 3만2천500배가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산술적으로는 하이든이 3만2천500년을 일해야 지을 수 있는 건물이지만,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의 아버지’인 그가 후대에 남긴 업적으로 보면 그 액수를 갚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에서 여름마다 연주회와 오페라, 연극 상연이 끊이지 않았다. 하이든은 여기서 셰익스피어의 연극도 몇 편 보았다. 1778년에는 이미 총 242회의 각종 공연이 있었으니, 그 규모와 화려함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이든이 집에 돌아가고픈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려 <고별 교향곡>을 쓴 곳이 바로 에스테르하자이다. 자신들의 영지에 있는 두 거성 말고도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빈 성내에도 두 개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넬슨이 찾은 곳은 어디일까?

부르겐란트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테르하지 궁전

앞서 말한 대로 넬슨은 빈에 3주 동안 머물렀고 그 사이 나흘간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테르하지 궁전을 방문했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은 빈 성내에 있던 ‘팔레 에스테르하지Palais Esterházy’를 링크했는데 이는 오류이다.) 이때 하이든은 손님들을 위해 <나일 전투 송시>를 칸타타로 만들었다. 짧은 체류 동안 작곡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또한 황실 도서관 증정식에 참석해 사본을 전달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해밀턴 여사가 이를 직접 노래했으니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었으리라. 그밖에 하이든은 종교곡도 연주했다고 전한다. 확실하진 않지만 <깊은 슬픔의 시대 미사>가 포함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감동한 넬슨은 아부키르 만에서 자신이 찼던 금시계를 하이든에게 선물했고, 하이든 또한 해밀턴 부인을 위해 짧은 칸타타를 쓰면서 사용한 펜을 제독에게 주었다. 이후로 <깊은 슬픔의 시대 미사>는 ‘넬슨 미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렸다.

베네딕투스

하이든은 <넬슨 미사>에 후배 모차르트로부터 받은 영향을 고스란히 녹였다. 하이든은 이 곡을 쓰기 10년 앞선 1788년에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빈 초연을 보았다. 특히 그는 기사장의 석상이 돈 조반니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넬슨 미사를 D단조로 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며, 트럼펫과 팀파니의 강렬한 타격으로 끝을 맺는 ‘베네딕투스’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는 석상의 모티프를 이어받는다.

같은 D단조인 돈 조반니 서곡을 피아노 협주곡 20번 앞에 연주한 시프. 비첸차 테아트로 올림피코 2009년 실황.

직전에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통해 음악으로 그리는 드라마를 완벽하게 구현했던 하이든은 <넬슨 미사>에서 어둠과 빛을 끊임없이 교차시켰다. 과연 이것이 고전주의 시대에 작곡된 것인가 귀를 의심케 하는 ‘키리에’의 공포는 ‘글로리아’의 환희로 물러난다. 2부 합창의 장대한 카논으로 시작하는 ‘크레도’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은 굳어 간다. 석상의 모티프가 비추는 ‘베네딕투스’의 일말의 불안감도 ‘호산나’와 ‘아뉴스 데이’의 영광 속에 말끔히 가신다.


넬슨과 해밀턴 여사는 귀국해 머지않아 딸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해군은 곧바로 그를 새 전장으로 보냈다. 1801년 10월에 귀국해 다시 연인과 재회했고, 이듬해에는 영국 전역을 여행했다. 1803년 함대에 복귀한 뒤로는 다시 맛보지 못할 꿈 같은 시간이었다. 넬슨은 1805년 스페인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의 영국 본토 침공을 사전에 봉쇄하는 대승을 거두고 전사한다. 뒤에 남은 에마 하트는 가난과 빚에 쪼들린 채 1815년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헝가리인, 파파 하이든

이에 앞서 1809년 나폴레옹은 마침내 빈을 침공했다. 바로 이웃에 대포가 떨어지고 하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하이든은 “두려워 마라, 하이든이 있는 곳은 다치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수많은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 위대한 미사와 오라토리오를 남긴 일흔일곱 살의 용감한 노인은 숨을 거두었다. 보름 뒤 쇼텐 성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는 그의 친구였던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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