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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Feb 25. 2019

파리 개선문

몰리에르에서 병사 이야기까지

프랑스를 미술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어떠한가? 프랑스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는지, 20세기에 이곳에 온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눈으로 살펴본다. 개선문에서 시작이다.


2017년 12월 23일, 인천공항은 아수라장이었다. 전날부터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 탓에 항공기 이착륙이 멈춘 상태였고, 정오부터 파리행 탑승을 기다리던 나는 결국 밤 10시가 넘어서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10시간의 기다림과 10시간 넘는 비행 끝에 새벽 3시에 도착한 크리스마스이브의 파리 샤를 드골 공항, 나를 기다리는 것은 새벽의 정적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체크인한 것은 새벽 5시가 넘어서였고, 잠시 뒤 첫날 일정이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파리는 날씨라도 좋았으면 다행이련만 가랑비가 오락가락했다. 기온이 낮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호텔은 파리의 중심인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과 루브르 박물관 가까이에 잡았다. 짧은 시간 동안 동선을 줄이고 최대한 여러 곳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호텔을 나선 지 1분 만에 몰리에르의 동상을 마주쳤다. 살아 있는 몰리에르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반갑습니다. 장 바티스트 포켈랭 씨

루이 14세가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월트 디즈니나 스티브 잡스에 버금가는 비전을 지닌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태양왕은 발레의 창시자이다. 왕의 두 예술가가 베르사유 궁전을 예술로 채웠으니,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와 극작가 몰리에르이다. 이들은 따로이가 아니라 함께일 때 최고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귀족놀이Le Bourgeois gentilhomme>로 알려진 공동 창작물은 20세기 들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언어로 재가공된다.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평생 몰두할 인형극, 곧 발레 예술을 만들어준 루이 왕과 그의 예술가들에게 감사해 마땅하다.

(38:15) 춤선생에게 귀족의 인사 예법을 배우는 졸부, 이어서 검술 교습, 음악, 철학... 아수라장

몰리에르의 동상이 선 리슐리외 거리 끝에는 그의 작품들이 상연되는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이 아침을 맞는다.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등장해 악인이라는 인상이 짙지만, 루이 13세의 수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를 근대 강국으로 이끈 철혈재상이다. 때문에 국립 도서관과 국립극장 같은 주요 건물이 들어선 거리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리슐리외 거리 뒤에 있는 팔레 루아얄 극장은 발레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장소이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곳에서 어린 왕자(뒤의 루이 14세)를 위해 <프랑스 군대의 영광을 위한 발레>라는 작품을 공연했다. 이것이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발레가 공연된 효시로 꼽힌다. 그리스 로마의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프로시니엄 무대는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극장식 공연장을 말한다. 관객과 무대가 분리되어 이른바 ‘제4의 벽’이 쳐지는 구조이다.


그 전에는 그저 넓은 홀 중앙에서 발레가 진행되는 것을 주빈이 둘러서서 지켜보았다. 결국 프로시니엄 무대 때문에 관객의 몰입과 또 단절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극장을 극작가 몰리에르가 물려받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몰리에르의 동료였던 장 바티스트 륄리가 왕립 음악원의 건물로 사용했다. 이것이 파리 오페라의 시작이다.

길 건너 루브르 광장에 바로 루이 14세의 동상이 나를 맞는다. 아직 문도 열지 않은 박물관 앞에 관광객이 줄을 섰다. 다음 날 크리스마스에 대부분의 박물관이 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잠시 파리의 대기를 숨 쉰 뒤 바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한가로이 다 빈치의 <모나리자> 관람 인파에 합류할 때가 아니다.


21세기 파리에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비단 파리뿐만 아니라 나는 이번 여정의 도시들마다 제일 첫 방문지로 그곳 러시아 정교회를 택했다.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가 고향을 떠나 스스로 러시아인임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들만의 공동체가 바로 정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개선문이 있는 샤를 드골 에투알 역에 내렸다. 여기서 알렉산데르 넵스키 교회까지는 지척이다. 그러나 파리에 온 기념으로 개선문에 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광객이 북적이는 에펠탑이나 몽마르트르 언덕에 비하면 개선문은 한적한 편이다. 안내를 보니 50미터, 234개의 계단을 오르면 문 위에 오를 수 있다. 힘이 더 들었더라도 올랐을 것이다. 어느 영화 장면 때문이다.

예술가의 초상을 20세기 역사의 소용돌이에 투영한 서사시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로 유명하다. 그러나 20세기 예술에 대해 뭔가 얘기하려는 사람은 그의 또 다른 걸작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를 봐야 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삶을 하나로 녹인 서사시이다. 독일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러시아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 미국의 재즈 음악가 글렌 밀러가 그들이다. 때문에 이들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풀어가는 영화의 원제목도 <사람과 사람들Les Uns et les Autres>이다. 일본에 소개될 때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가 되었고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였다.

내가 찍은 것도 같은 흐린 날인데, 영화 촬영 당시 파리의 스모그가 훨씬 심했음을 보여준다

카라얀에 해당하는 지휘자 카를 크레머 역은 폴란드 태생의 명배우 다니엘 올브리흐스키(영화 <양철북>에도 나왔던 사람이다)가 맡았다. 젊은 시절 나치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얻은 크라머였지만, 자신도 전쟁으로 아이와 모든 것을 잃은 희생자였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인류에 호소하려는 그는 다시 찾은 파리에서 다른 어느 곳도 아닌 개선문을 연주 장소로 택한다.

크리스티안 틸레만도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다면 겪었을지 모를 인생이다

크라머는 리스트의 <전주곡Les préludes>을 지휘한다. 낭만주의 시인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고 쓴 교향시이다. 영화에서 리스트의 호연지기를 담은 관현악이 개선문으로부터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삶은 곧 죽음을 위한 전주곡이다”라는 시인의 주제가 세상에 전해지는 것 같다. 나도 카메라를 들고 몇 번을 빙글빙글 돌았다. 에펠탑과 몽마르트르 언덕, 라데팡스가 저 멀리서 손짓한다. 

현재 노란조끼 시위대의 거점이 된 개선문

개선문의 양쪽 기둥 내부는 각각 오르고 내리는 계단이다. 옥외로 나가기 전 상층부는 작은 전쟁 박물관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무명용사의 석상은 곧바로 스트라빈스키의 <병사 이야기L'Histoire du soldat>를 떠오르게 했다. 


1913년 발레 <봄의 제전>의 성공으로 파리의 총아가 된 스트라빈스키. 이듬해 5월에는 첫 오페라인 <나이팅게일>까지 선보이는 의욕을 보였다. 안데르센 원작 ‘황제와 나이팅게일’에 붙인 작품이었다. 서유럽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 막 스위스에 자리 잡은 스트라빈스키는 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가족의 여름 별장이 있던 우스틸루크(현재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로 가서 개인 작업에 필요한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나이팅게일>의 초연으로부터 그가 러시아에 다녀온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두 달이었다.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그는 국경이 봉쇄된 스위스에서 지내게 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 이 스위스 체류 기간 동안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민담에 붙인 음악 무용극 <병사 이야기>와 <여우 르나르>를 작곡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의 람보 의상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도 6.25 전쟁 참전국가의 이모저모를 전시해 놓은 공간이 있다. 그런데 개선문 전시관에는 프랑스가 속한 연합국뿐만 아니라 적군인 동맹국의 참전 현황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전쟁에 피아가 없이 모두가 희생자라는 공통의 인식 덕분일까. 독일과 프랑스가 역사 교과서를 함께 만들어 쓰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발레 <병사 이야기> 또한 원래는 러시아 민담집으로부터 가져온 이야기이지만, 딱히 주인공의 국적을 따질 것 없이 보편적인 정서를 대변한다. 스트라빈스키의 ‘병사’는 시대와 나라를 초월해 어느 곳에나 있었던 소외된 참전용사이다. ‘디어 헌터’나 ‘람보’의 원조인 것이다.

아파나시예프 민담집

러시아의 ‘그림 형제’에 해당하는 작가 알렉산데르 아파나시예프(Alexander Afanasyev, 1826-1871)는 6백 여 편의 민담을 수집했다. 그 가운데 스트라빈스키가 고른 것은 악마와 술내기를 하는 병사의 이야기였다. 병사가 악마에게 보드카를 계속 마시게 만들고, 마지막 한 잔을 캐비아라고 속여 더 권하자, 그것을 받아먹은 악마는 죽고 만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원작을 직접 손보았다.


차르 니콜라이 1세 시대에 크림 전쟁에 강제 징병되었던 젊은이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초연 때 스트라빈스키는 병사에게 스위스 군복을 입혔고, 지명을 모두 스위스로 지시했다. 러시아의 주제인 동시에 당시 유럽이 처한 상황과도 맞물리게 한 것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셉 이폴리트 베르크만이라 부르자. 무명용사라는 뜻이다
참전군인 조셉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짐에는 아끼는 바이올린과 약혼녀의 사진이 들었다. 노인 모습을 한 악마가 다가와 부자가 되는 책을 줄 터이니 바이올린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제안을 받아들인 조셉이 사흘 동안 악마와 지낸 뒤 고향에 돌아왔더니 그간 3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사람들은 유령이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조셉은 상인으로 변장한 악마를 보고 달려드나 악마는 자기가 준 돈 버는 책이 새로운 삶을 줄 거라며 진정시킨다. 조셉은 금방 부자가 되었지만,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노파로 변장하고 나타난 악마에게 바이올린을 되사지만, 어쩐 일인지 전처럼 연주할 수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조셉은 공주의 병을 낫게 하는 사람을 부마로 삼겠다는 임금의 포고에 귀가 솔깃한다. 궁에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변장한 악마가 와 있다. 조셉은 아직 악마의 돈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조종에 따를 수밖에 없다. 꾀를 낸 조셉은 악마와 벌인 카드 게임에서 돈을 모두 잃고 그에게서 벗어난다.

자유가 된 조셉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음악 소리에 병에서 나은 공주는 함께 춤을 춘다. 두 사람을 훼방하려던 악마도 조셉의 바이올린 연주에 쓰러진다. 악마는 조셉이 성을 나서면 자신이 다시 힘을 얻을 것이라 말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조셉과 공주 앞에 악마가 나타난다. 조셉은 어머니와 아내 모두를 원했지만, 이내 악마의 뒤를 따르게 된다.
이르지 킬리안이 안무한 <병사 이야기>

<병사 이야기>에는 줄거리를 낭독하는 해설자, 병사와 악마, 공주를 연기하는 배우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를 발레로 묘사하는 무용수도 나온다. 해설자는 등장인물을 이어줌과 동시에 무대와 객석을 중재한다. 또한 무용의 삽입으로 극이 단조롭게 되는 것을 피했다.

표지에 장 콕토의 이름을 더 크게 적고, 그의 사진을 썼다

그러나 나는 무용극 <병사 이야기>를 소리로만 처음 접할 수밖에 없었다. 이고르 마르케비치 지휘, 장 콕토 해설, 피터 유스티노프가 악마를 연기한 음반이었다. 장 콕토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하겠지만, 음반에서 내게 가장 가깝게 느껴진 사람은 피터 유스티노프였다.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의 <나일 살인 사건>은 초호화 캐스팅으로 영화화되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로 유명한 데이비드 니븐, 영원한 줄리엣 올리비아 허시, 쟁쟁한 성격파 배우 앤젤라 랜스베리, 미아 페로, 매기 스미스에, 누구보다 주인공인 명탐정 에르퀼 포아로를 피터 유스티노프가 맡았다.

벨기에산 수염을 한 에르퀼 포아로
<쿼바디스> 가운데 네로로 분한 유스티노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상 바티아투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유스티노프는 일찍이 <쿼바디스>에서 자신의 눈물을 단지에 담고, 로마를 불태우는 네로 황제 역으로 등장했다. 프랑코 체피렐리가 만든 미니시리즈 <나사렛 예수>에서도 네로와 비슷한 캐릭터인 폭군 헤롯 왕을 연기했다.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하고 로런스 올리비에가 열연한 <스파르타쿠스>에서 검투 흥행사 바티아투스로 등장한 유스티노프는 그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쿼바디스>와 <벤허>의 음악을 작곡한 미클로시 로자는 유스티노프에게 자신의 현악 사중주 1번을 헌정했다.


연기자로뿐만 아니라 음악 해설가로서 피터 유스티노프의 활약은 눈부셨다. 나는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만든 다큐멘터리를 통해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를 처음 보았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유스티노프였다. 모차르트 오페라를 인형극으로 만든 영상물이나 프로코피예프 동화극 <피터와 늑대> 역시 그의 해설이 돋보인다.

카라얀의 <피터와 늑대> 음반에서 내레이션을 맡은 유스티노프

유스티노프는 <병사 이야기>의 악마로 출연한 것보다 스트라빈스키와 좀 더 긴밀한 인연이 있다. 유스티노프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유대계 러시아 귀족 가문이었다. 어머니 나데주다 브누아는 화가이자 무대 디자이너였다. 그녀의 아버지 레온 브누아는 러시아 황실 건축가였다. 레온의 동생이 바로 댜길레프 발레단의 미술을 담당했던 알렉산데르 브누아이다. 그가 바로 피터 유스티노프의 외종할아버지인 것이다.

외종조부 브누아와 함께한 유스티노프

댜길레프보다 두 살 많았던 알렉산데르 브누아는 발레 뤼스의 핵심 멤버였다. 댜길레프가 발레에 앞서 미술 전시 기획을 할 때부터 단짝이었고, 발레단에서는 <공기의 정령>, <지젤>, <페트루시카>의 무대와 의상을 차례로 맡았다.


브누아의 외할아버지 알베르토 카보스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였고, 브누아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작업은 파리 오페라 극장 설계였다. 그가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일을 맡은 사람이 샤를 가르니에이고, 극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가르니에 궁전(Palais Garnier)으로 불리게 되었다. 만일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우리는 ‘오페라의 유령’을 가르니에 궁전이 아닌 카보스 궁전에서 만날 것이다.

유스티노프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가 남았다. 1992년 모스크바에서 제정된 ‘브누아 드 라 당스’는 해마다 무용에 기여한 안무가와 무용수에게 주는 ‘발레의 노벨상’이다. 우리나라 무용수로 1999년 강수진, 2006년 김주원, 2016년 김기민, 그리고 2018년에 박세은이 상을 받았다. 이 가운데 안무가로 다시 수상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한다. 브누아 드 라 당스의 트로피를 디자인한 사람이 피터의 아들 이고리 유스티노프이다. 

브누아 드 라 당스 트로피

수년 전에 세종 예술아카데미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병사 이야기>를 다룰 때 나는 문학적인 문맥을 끌어왔다. 원작인 아파나시예프의 민담은 사실 유럽 문화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악마와 벌이는 영혼 거래는 《파우스트》를 아는 사람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거기에 더해 하나 더 떠오른 것은 톨스토이의 단편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이다.

바홈은 평범한 농부였다. 어느 날, 땅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그의 바람을 악마가 엿듣는다. 큰 욕심 없이 정직하게 땅을 일구던 바홈은 점차 내 밭을 직접 경작하고 싶은 꿈을 부풀린다. 마침 계속되는 기회가 그의 땅을 넓혀준다. 작은 밭이면 부러울 것이 없겠다던 바홈은 어느덧 제법 큰 땅을 소유한 지주가 되었다.

하루는 볼가 강 아래쪽에서 온 나그네가 바홈의 집에 묵는다. 그는 조합에서 땅을 공짜로 나눠주는 지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홈은 가진 것을 팔고 새 고장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는 훨씬 많은 밭을 경작하게 되었지만, 매년 윤작해야 하는 밀농사의 특성 때문에 땅은 여전히 부족했다. 

또 한 사람의 나그네가 바홈에게 같은 돈으로 훨씬 넓은 땅을 배당하는 지방 얘기를 해준다. 바홈은 다시 가족과 함께 새 보금자리로 떠난다. 그곳 촌장은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올 수 있을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보장했다.

전날 꿈자리가 사나웠지만, 바홈은 아침 일찍 자기 땅을 얻을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응원하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그는 제법 멀리까지 왔다. 갈수록 비옥해지는 땅을 보고 욕심이 생겼지만, 해지기 전에 출발지에 돌아가지 않으면 허사가 되기 때문에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돌아온 바홈. 그러나 그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이를 본 촌장은 배를 쥐고 웃었다. 그는 다름 아닌 바홈에게 땅 욕심을 갖게 한 두 나그네이자, 맨 처음 바홈의 이야기를 엿들은 악마였다. 바홈의 하인은 주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길이의 땅을 파고 그를 묻었다.

재물을 향해 욕심을 그치지 않는 바홈과 그의 곁에서 모습을 바꿔가며 유혹하는 악마까지, <병사 이야기>와 똑같은 설정이다. 아침에 호텔을 나설 때마다 한 곳이라도 더 가야지 하고 아등바등거릴 때마다 나는 바홈을 떠올렸다. 1910년 파리에 도착한 28세의 스트라빈스키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나라도 더 보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고픈 발레 뤼스의 막내였다. 바홈처럼 중간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커피와 달달한 것으로 충전했다. 프랑스의 과한 디저트 문화는 주위의 시선을 불러 모았다. 아무도 이런 것을 시키지 않았다. 나는 이 디저트에 브누아가 무대를 디자인한 발레 ‘페트루시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 부인에게 내놓은 카페촐리 디 베네레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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