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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Feb 26. 2019

알렉산데르 넵스키 교회

살 플레옐과 파리의 러시아 공동체

프랑스를 미술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어떠한가? 프랑스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는지, 20세기에 이곳에 온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눈으로 살펴본다. 파리의 러시아인을 만나보자.


개선문을 내려와 향한 곳은 파리의 러시아 정교회인 알렉산데르 넵스키 대성당이다.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교회까지 가는 중에 살 플레옐(Salle Pleyel)이 있다. 포부르 생 오노레 거리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의 대사관이 밀집해 있고, 고급 상점이 즐비하다. 그러나 좁은 길 안에 위치한 살 플레옐은 이제 공연장 기능보다는 옛 유물로 기억될 만큼 쇠락해 보인다.

파리 필하르모니가 문을 열면서 살 플레옐은 세종문화회관이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피아노의 명가인 플레옐 집안은 아버지 이그나츠(원래 보헤미아 태생으로, 프랑스식으로는 이냐스이다)에서 아들 카미유에 걸쳐 파리 콘서트 문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1807년 피아노 회사를 차린 플레옐 부자는 1830년에 살롱 연주를 열었다. 여기에서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 데뷔 연주를 가졌다. 1839년에 550석 규모로 문을 연 홀은 파리 콘서트의 중심이 되었다. 쇼팽이 다시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848년에 마지막 콘서트를 여기서 가졌다.


열한 살에 데뷔 연주를 치른 생상스는 살 플레옐에서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제5번을 초연했다. 20세기 들어서 리카르도 비녜스가 친구 라벨의 곡 <하바네라>,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 등을 초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플레옐의 대표 귀스타브 리옹은 현대적인 홀을 필요로 했다. 현재의 자리에 3천 석의 대강당과 5백 석의 쇼팽홀, 150석의 드뷔시홀까지 갖춘 다목적 음악당이 문을 연 것은 1927년 10월 18일의 일이다. 이날 스트라빈스키와 라벨이 파리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음악원 콘서트 협회 오케스트라(Orchestre de la Société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를 지휘해 자신들의 작품과 바그너, 파야, 뒤카, 드뷔시의 곡을 연주했다. 

살 플레옐에서 초연된 또 다른 걸작,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뒤에 미국에서 잠시 파리를 다니러 왔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이 홀에서 만년 작인 <아곤>과 <트레니>를 지휘했다. 파리 살 플레옐은 파리 콘서트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한 요람이었다. 21세기 들어서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정명훈이 여기서 말러의 교향곡 전곡과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같은 작품에 혼을 불어넣었다. 정명훈은 낡은 홀을 대신할 새로운 콘서트홀의 건립을 요구했지만, 2015년에 문을 연 최첨단 파리 필하르모니는 파리 오케스트라에게 돌아갔다. 그는 그 무렵 서울과 파리의 두 오케스트라를 차례로 내려놓게 되었다.

살 플레옐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마침내 나의 진정한 첫 목적지인 알렉산데르 넵스키 교회가 보인다. 러시아 정교는 예수 탄신일을 1월 7일에 쇤다. 그러나 일요일에 맞은 12월 24일은 종파에 무관하게 뜻깊을 것이다. 한창 예배가 진행 중이다. 정교회당은 러시아에서도 여러 번 가보았지만 실제 예배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러시아의 크리스마스 장면

스트라빈스키는 1926년 <주기도문Pater Noster>을 작곡했다. 처제 류드밀라 벨랸키나의 장례예배에서 아폰스키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이 예배가 바로 알렉산데르 넵스키 교회에서 열렸다. 이곳은 1930년대 스트라빈스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차르 알렉산데르 2세 시대 스타일로 지은 이 건물은 단조로운 파리에 위치한 러시아 색깔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 더욱이 이는 고도(孤島)가 아니라 러시아 서점과 상점, 레스토랑, 카페, 보석상, 골동품상이 함께 있는 군도(群島)였다. 축제일에 교회 주변은 동방장터 같았다. 그는 성삼위일체 축일에 교회에 쌓을 자작나무 가지를 파리 가까운 숲에서 모으기도 했다.

(3:00) 주기도문

교회 정원을 한 바퀴 도는데 길고양이 여럿이 눈에 띈다. 파리는 고양이 천국이다. 스트라빈스키도 고양이를 좋아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러시아 방문 때 키레예프의 민담집을 챙겼다. 책에서 가져온 가사로 1915년 <고양이의 자장가Berceuses du chat>라는 곡을 썼다. 1918년 파리에서 피아노 반주로 초연되었지만, 원뜻인 석 대의 클라리넷 반주로는 이듬해 쇤베르크가 빈에서 주최한 음악회에서 초연되었고, 이를 들은 쇤베르크의 제자 베베른이 열광했다. 짧지만 장차 쓸 대곡 <결혼>을 예고하는 중요한 음악이다.

일본 사람들이 연주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일본풍이다

스트라빈스키가 1966년에 쓴 마지막 작품도 <부엉이와 고양이>이다. 소프라노가 부르는 12음 기법의 노래이니, 스트라빈스키의 고양이들은 쇤베르크에게 진 빚이 많다. 창가에 걸터앉은 녀석의 먼 조상이 스트라빈스키와 만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위 사진과 같은 고등어 고양이이다

알렉산데르 넵스키 사원 방문을 통해 ‘파리의 러시아인’이 된 스트라빈스키가 숨쉬었던 공기를 여전히 느낄 수 있다. 니스와 제네바, 로잔에서 계속해서 가장 먼저 정교회를 찾을 것이다. 예배가 끝날 무렵 밖으로 나와 교회를 한 바퀴 돈 뒤 거리로 나섰다. ‘페트로그라드 마을A la Ville de Petrograd’이라는 레스토랑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다루Daru’라고 쓴 곳은 영업 중이다. 러시아 말로 ‘작은 선물’이라는 뜻이다.

조금만 걸어가면 몽소 공원(Parc Monceau)이 나온다. 몽소 공원은 여느 파리의 공원과는 달리 영국식이다. 작지만 판테온을 닮은 입구의 원형 건물과 그리스, 이집트를 떠오르게 하는 구조물들이 영국식 정원의 대표 격인 스투어헤드의 축소판 같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좋아했고, 클로드 모네가 이곳을 배경으로 다섯 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산책한 곳으로 유명하다. 몽소 공원에는 그 밖에도 쇼팽, 기 드 모파상, 알프레드 드 뮈세, 샤를 구노, 앙브루아즈 토마 등의 동상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조깅과 복싱 레슨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평화로운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여기서 책을 펴고 요즘 유행하는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클로드 모네, 몽소 공원
아버지 뒤마의 동상

오페라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3호선 말제르브 역으로 가면 삽화가로 유명한 귀스타브 도레(1832-1883)가 만든 아버지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상이 나타난다. 들라크루아와 더불어 쇼팽 주위의 친구 그룹이었고,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라>의 원작인 《동백 아가씨》를 쓴 이는 아들 뒤마이다.


나는 프랑스 소설 가운데 읽는 재미로 아버지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따라올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숱한 시간을 그의 《삼총사》, 《철가면》과 보냈다. 뒤마 동상의 뒤편에 가스코뉴 촌구석에서 올라와 국왕의 총사대장이 된 다르타냥이 앉아 있다. 채플린의 절친한 친구이자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다르타냥을 연기할 때 이 동상이 모델 아니었을까? 페어뱅크스가 발코니에서 맨 밧줄 타고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액션이야말로 오늘날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과 같은 히어로 무비의 뿌리였던 것이다.

뒤마의 뒤편에 앉은 다르타냥
밧줄을 타고 뛰어내리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아이언 맨의 절친이었던 쾌걸 조로이다. 에 그러니까 케빈 클라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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