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크리스마스이브
오전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잠시 쉰다. 오후와 저녁엔 크리스마스이브 공연을 두 개나 예매했기 때문이다. 4시에 샹젤리제 극장으로 향한다.
1913년 5월 29일은 음악사상 가장 유명한 날이다. 댜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가 신작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을 샹젤리제 무대에 올렸고 그날의 소동은 최악으로 기록된다.
<봄의 제전> 초연 때 빚어진 난리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전에는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다.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들으러 온 음악가들은 호기심을 가졌고, 무대도 폭동을 야기할 만한 점이 없었다. 드뷔시는 나중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긴 했으나(“흑인 음악 같다”) 리허설 때는 열성적이었다. 사실 그는 그럴 만했다. <봄의 제전>은 다른 누구보다 그에게 많은 것을 빚졌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부분(전주곡)이나 그렇지 않은 부분(2부 시작과 끝 사이 전부)이나 모두 그랬다. 몇 달의 리허설을 거친 뒤에야 무용수들은 자기 할 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별로 음악과 상관없는 경우도 있었다. 니진스키는 내게 말했다. “연주하는 동안 마흔을 셀게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알게 되겠죠.” 그는 우리가 어떤 지점에 함께 도착했을지라도 그것이 각자 다른 방법으로 온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용수들은 음악이 아닌 니진스키의 박자를 따랐다. 그는 물론 러시아 말로 수를 셌는데, 러시아 수는 10 이상은 여러 음절로 되어 있다. 빠른 박자에서는 그도 그들도 모두 박자를 맞출 수 없었다.
공연 시작부터 작은 저항이 일어났다. 커튼이 올라가고 긴 머리의 안짱다리를 한 소녀들이 뛰어다니자 소동이 일어났다. 내 뒤에서 “닥쳐”하는 소리가 들렸다. 플로랑 슈미트가 이렇게 외쳤다. “조용히 해, 이 16구 창녀들아!” 16구는 파리 상류층이 사는 동네였다. 홀은 혼란이 계속되었고, 나는 화가 나 자리를 떴다. 나는 오케스트라 근처 오른쪽에 앉아 있었는데, 문을 쾅 닫은 것이 기억난다. 그렇게 화가 난 적은 다시없었다. 음악은 익숙한 것이었고 마음에 들었다. 나는 왜 사람들이 듣기도 전에 도발부터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무대 뒤에서 나는 댜길레프가 청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불을 껐다 켰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무대 옆에 있는 니진스키 곁에서 그의 연미복 꼬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키잡이처럼 무용수들에게 숫자를 불러주고 있었다.
무대보다 몽퇴의 뒷모습이 더 생생했다. 그는 꼿꼿이 서있었고 악어처럼 냉정했다. 그가 오케스트라를 끝까지 이끌고 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공연 뒤 우리는 흥분했고, 화가 났고, 역겨웠고 그리고 즐거웠다. 댜길레프는 말했다. “정확히 내가 원하던 바야” 그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보다 더 흥행 가능성을 빠르게 알 수 있는 사람은 다시없다. 아마 그는 1912년 8월에 내가 베네치아의 그랜드 호텔에서 완성된 부분을 미리 피아노로 연주했을 때부터 소동 가능성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얼마나 유명한지 이 <봄의 제전> 초연 소동은 여러 영화에서도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었다. 2009년에 나온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영화 초반 30분을 전술한 스트라빈스키의 얘기에 할애한다. 초조해하는 발레단 구성원들과 이를 예견했다는 듯 조정하는 단장 디아길레프 그리고 모든 것을 신비롭고 차가운 미소로 바라보는 샤넬까지. 그보다 앞서 1970년에 나온 허버트 로스 감독의 <니진스키>에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봄의 제전>의 충격적인 음악을 가장 잘 보여준 예는 초연을 옮긴 영화가 아니라 1933년 이래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킹콩>이다. 정글의 거대 고릴라가 미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봄의 제전>의 내용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이 음악을 피터 잭슨이 만든 2005년 영화 장면에 입혀서 들려주곤 한다. 영화의 소리를 죽이고 대신에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더빙한 것인데, 신기하게 영상과 음악이 잘 맞아떨어진다. 디즈니의 만화 <판타지아>를 모범으로 한 이런 동기화 편집을 ‘미키마우징’이라고 부른다. 나의 ‘킹콩/봄의 제전’은 딱히 대단한 공을 들인 것도 아니지만 매우 실감 나서 종종 “영화 음악이 정말 좋다”라는 찬사를 듣는다. <봄의 제전>을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으로 오해한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 소동이 빚어진 샹젤리제 극장에서 내가 볼 공연은 <비바 모믹스 포에버Viva Momix Forever>였다. 모믹스는 미국 안무가 모제스 펜들턴이 창단한 무용단이다. 펜들턴은 1949년 미국 버몬트에서 태어났다.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버몬트에 가본 적은 없지만, 두 가지 정보가 그곳을 그리게 해 준다. ‘바몬드’라는 분말 카레 상표가 바로 버몬트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바몬드 카레가 주로 내세우는 마케팅 포인트가 벌꿀과 사과를 첨가했다는 것이다. 특산품이 벌꿀과 사과라면 일단 맑은 공기와 많은 일조량을 떠올리게 된다.
캐나다와 접한 미 북동부의 작은 주 버몬트를 자신들이 떠나온 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실제 모델인 폰 트라프 가족이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하다가 자리 잡은 곳이 버몬트였다. 눈 덮인 산과 맑은 호수가 보이는 이곳에서 호텔을 연 것이다.
이런 버몬트의 배경은 펜들턴의 안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의 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펜들턴은 버몬트 낙농가에서 태어났고, 장터에 젖소를 내다 팔기도 했다. 인근 다트머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무렵 동료들과 현대무용단 필로볼루스(Pilobolus)를 창단했다. 곡예와 마임을 무용에 도입한 이들을 눈여겨본 패션계의 거물 피에르 카르댕이 브로드웨이 진출을 도왔다. 4년 뒤 독립한 펜들턴은 모 믹스를 창단한다.
언급한 대로 펜들턴은 자신이 나고 자란 버몬트, 나아가 야구와 같이 미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주제에 주목한다.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동계 올림픽 폐막식 연출을 통해 일약 미국을 대표하는 안무가가 된 펜들턴은 정통 오페라 발레와 창작 무대 양쪽에서 맹활약한다. 스트라빈스키와 무소륵스키, 라벨과 같은 화려한 색채의 음악이 그의 장기이며, 록가수 프린스가 제작한 영화 <배트맨>의 사운드트랙 가운데 ‘배트댄스’를 안무한 이도 펜들턴이다.
팬들턴이 샤를 뒤투아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와 작업한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파월과 프레스버거가 영화로 만든 <호프만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초현실적인 상상력의 중간중간에 펜들턴이 어릴 적 버몬트 가축시장에 몰고 갔음직한 젖소 장면이 나온다. ‘비들로’라는 악장은 달구지를 찬 소를 말하는데, 끝없는 밭 사이로 나체의 히피들을 태운 젖소가 지나가는 장면이 웃음 짓게 한다.
샹젤리제 무대에 펼쳐진 모믹스의 공연은 눈을 잠시도 뗄 수 없었다. 카네이션이나 선인장, 민들레 홀씨와 같이 자연 그대로를 묘사한다. 또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중독성 강한 미니멀 음악과 함께 보여주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전반부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쿠아플로라Aquaflora’라는 꼭지였다. 쉽게 말해 무용수가 머리에 촘촘한 우산살과 같은 모자를 쓴다. 춤을 추며 회전하면 그 움직임에 따라 우산살이 원심력을 갖고 같이 돌며 반짝이는 것이다.
펜들턴은 이 아이디어를 러시아 소치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사용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리나 디아나 비슈네바가 이끄는 설원의 요정들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맞춰 군무를 추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이른바 ‘발레 블랑Ballet blanc’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낭만주의 시대 발레에서 흰옷을 입은 발레리나들이 추는 군무를 말한다. 이는 요정이나 정령을 묘사하는 일종의 정형이었다. <지젤>과 <백조의 호수>의 장면들이나 디즈니의 <판타지아> 가운데 ‘꽃의 왈츠’가 대표적인 발레 블랑이다.
모믹스의 마지막 순서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배경으로 꼭두각시 인형과 짝을 이뤄 군무를 추는 내용이었다. 상상만으로도 근사하지 않은가? 19세기 후반 발레의 전성기를 맞으며 안무가들은 꼭 줄거리가 없더라도 기존의 음악과 결합한 비서사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쇼팽의 음악을 편곡해 만든 <공기의 정령Les Sylphides>이 대표적이다.
이것이 성공하자 거꾸로 기존의 스토리를 위해 필요한 음악을 가져다 쓰는 발레가 등장한다. 바로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이다. 그는 이탈리아 광대극을 위한 음악으로 바로크 시대에 작곡된 여러 곡들을 끌어와 자기 스타일로 매만졌다. <풀치넬라>에서 더 나아가 <카프리치오>, <바이올린 협주곡>, <덤바턴 오크스 협주곡> 같은 순수 기악곡들이 발레로 추워진다. 현대무용단이라면 한 번쯤 꿈꾸길 바라는 레퍼토리들이고, 펜들턴도 오래전 <풀치넬라>를 공연한 적이 있다.
이렇게 파리는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그것이 이들로 하여금 만국 박람회, 곧 엑스포라는 행사를 주도하게 했다. 그 시기가 보불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황금기 ‘벨 에포크’와 겹친다. 파리 엑스포 덕분에 벨 에포크의 수많은 미술가와 음악가가 다른 나라의 진기명기를 접했고, 그것이 다시 그들 예술의 자양분이 되었다.
벨 에포크의 막바지에 디아길레프가 발레 뤼스를 이곳에 데려왔고, 때마침 스트라빈스키라는 무명의 작곡가가 파리의 기대에 부응한 것이다. 샹젤리제 극장 로비는 시작부터 온통 풍선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안내원들이 난간에 매달린 풍선을 풀어 관객들에게 나눠주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개막 공연에서만 제공한 서비스일까?
모믹스의 환상적인 공연을 뒤로하고 다음 공연을 보기 위해 생트 샤펠 성당으로 서둘러 이동한다. 해가 진 센 강 너머로 에펠탑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에펠탑 또한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 박람회의 선물이 아니던가!
센 강 위 시테 섬에 자리한 생트 샤펠은 빛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는 곳이다. 크지 않지만 내부 전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고딕 건축의 정수이다. 그러나 해가 진 뒤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없다. 다만 오늘은 성탄 전야 음악회가 소수의 청중을 기다린다. 이름 난 음악가가 출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바로크 곡들로 꾸민 전반부와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려준 후반부가 총천연색이 사라진 심야의 예배당을 훈훈한 공기로 채웠다. 해가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생트 샤펠에 다시 오기를 기약하며, 비행기의 연착으로 본의 아니게 새벽부터 시작한 파리의 첫날은 이것으로 마감했다.
한 세기 전 파리 러시아인 공동체의 터전이었던 알렉산데르 넵스키 사원, 스트라빈스키의 서명과도 같은 <봄의 제전>의 초연 무대인 샹젤리제 극장, 그 사이사이로 만난 수많은 파리의 이정표가 앞으로 찾아갈 이야기들의 책갈피처럼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