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그의 시대
파리의 이틀째, 크리스마스 당일 파리에서 문을 여는 유일한 곳은 퐁피두 센터였다. 루브르 박물관이 고전미술, 오르세 미술관이 인상주의 미술에 집중되어 있다면 퐁피두 센터는 20세기 모던 아트의 요람이다. 당연히 이 한 곳으로 사람이 몰릴 터.
퐁피두 센터를 뒤로 미루고 내가 택한 곳은 오늘 같은 날 아무도 없을 장소, 페르 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였다. 라셰즈는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Père)였다. 파리 시내 네 개의 큰 묘지 가운데서도 제일 규모가 크고 많은 위인의 묘가 있다. 페르 라셰즈가 도심 동쪽에 있다면 다음으로 갈 몽마르트르 묘지는 북쪽에, 몽파르나스 묘지는 남쪽에, 드뷔시와 포레, 마네가 잠든 파시 묘지는 서쪽에 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로시니의 묘에 이르렀다. 이탈리아 작곡가로 파리가 요구하는 벨칸토 예술을 이곳에 가져다준 로시니였다. 뒷날 그의 유해는 피렌체의 성십자가(산타 크로체) 교회로 옮겼고, 지금은 빈 무덤만 남아 있다. <세비야의 이발사>와 <도둑까치>, <윌리엄 텔>과 같은 오페라로 유명한 로시니는 만년을 이곳 파리에서 지냈다. 이때까지 나는 바젤의 송년 음악회에서 로시니의 <체네렌톨라>를 듣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묘지 지도를 펼쳐보니 차근차근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이 아니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묘를 다 찾아보려면 하루 종일도 모자랄 판이었다. 목표를 정해 동선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역시 중심부에 있는 쇼팽의 무덤이다. 1849년 폴란드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이 3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마들렌 성당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쇼팽이 존경했던 모차르트의 <레퀴엠>에서 독창을 부른 네 사람은 소프라노 잔 아나이스 카스텔란, 메조소프라노 폴린 비아르도, 테너 알렉시스 뒤퐁, 베이스 루이지 라블라슈였다. 모두 로시니나 마이어베어 같은, 당대 파리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일급으로 소화하는 성악가들이었다. 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 루이 르페뷔르 벨리가 쇼팽의 전주곡 4번과 6번을 연주했다.
페르 라셰즈 매장 때에는 폴란드에서 온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 친구인 화가 들라크루아 등이 자리를 지켰고, 나폴레옹 앙리 르베르가 기악으로 편곡한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의 ‘장송 행진곡’이 흘렀다. 무덤을 장식한 조각은 뮤즈 가운데 하나인 에우테르페가 부서진 리라를 타는 모습이었다. 조각을 한 오귀스트 클레쟁제는 솔랑주의 남편이었다. 솔랑주는 한때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가 쇼팽과 만나기 전에 낳은 딸이다.
장례식 비용과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의 여비 일체는 쇼팽의 제자였던 피아니스트 제인 스털링이 부담했다. 그녀는 쇼팽보다 여섯 살 많았고, 조르주 상드와 동갑이었다. 쇼팽이 상드와 소원해진 뒤에 스털링에게 의지했기에 그녀를 ‘쇼팽 미망인’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 돈이 많았다면 만년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쇼팽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영국 연주 여행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때문에 실제 장례 비용을 치른 사람으로, 쇼팽의 또 다른 지인 소프라노 제니 린트가 부상한다.
스웨덴 태생인 린트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제자였다. 뒷날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도 그녀와 오누이처럼 지냈다. 양성애자인 안데르센은 독신으로 생을 마쳤고 린트는 작곡가 오토 골트슈미트와 결혼한다. 안데르센이 ‘스웨덴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렀던 제니 린트는 이번 여행 직전에 국내 개봉한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영화의 주인공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은 19세기 미국에서 서커스 문화를 일으킨 기획자였다. 영화는 돈벌이를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던 바넘을 너무 미화했지만, 유독 눈길을 끈 장면이 있다. 서커스로 재미를 본 바넘은 유럽에서 가장 명성을 얻던 제니 린트를 미국에 데려와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위대한 쇼맨>에서는 바넘이 린트와 염문이 나는 바람에 파산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두 사람이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바넘이 린트의 투어 중에 표값을 올리고 직접 암표 장사를 했고 이런 마케팅을 린트가 거부한 것이 결별 사유였다. 그런데 실제로 린트가 바넘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가는 것은 쇼팽이 사망한 이듬해였다. 때문에 일찍부터 자선사업에 큰 힘을 쏟았던 그녀가 스털링을 대신 앞세워 쇼팽을 도왔다는 설이 제기되는 것이다.
쇼팽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스쳐간 이 많은 사람들이 스트라빈스키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을까? 묘비에는 쇼팽이 프랑스 이민자와 폴란드 평민의 딸 사이의 아들로, 바르샤바 인근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 쇼팽은 원래 프랑스에서 폴란드로 이주한 사람이다. 폴란드에서는 이 외국 이름을 ‘쇼팬’쯤으로 발음하지만, 프랑스식인 ‘쇼팡’이 더 자연스럽다. 아들은 조국의 혼란을 피해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사망한 것이다.
반대로 스트라빈스키 집안은 원래 리투아니아계 폴란드인이다. 스트라빈스키가 아득하게나마 자신과 폴란드 사이의 유대감을 느꼈을까? 그보다 그와 쇼팽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작곡가로서 스트라빈스키가 처음 존재감을 알린 일이 바로 쇼팽의 작품을 관현악 편곡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발레단이 제작한 <공기의 정령>은 글라주노프의 <쇼피니아나>라는 곡을 안무한 것이었다. 쇼팽의 피아노 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다. 그런데 초연 뒤에 발레단장 댜길레프는 이 관현악을 네 작곡가에게 나눠 고치게 했다. 아나톨리 랴도프, 세르게이 타네예프, 니콜라이 체레프닌 그리고 무명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그들이었다. 미하일 포킨이 안무하고 댜길레프의 아이들인 타마라 카르사비나, 안나 파블로바,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총출동한 1909년 파리 샤틀레 극장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댜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에게 맡긴 첫 작품이 <불새>는 아니었던 것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발레 <불새>와 <페트루시카>, <봄의 제전>의 잇단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1914년 첫 오페라를 썼다. 안데르센이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트를 모델로 쓴 동화 《황제와 나이팅게일》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 <나이팅게일Le Rossignol>이다. 이곡은 샹젤리제 극장이 아닌 가르니에 궁전에서 알렉상데르 브누아의 무대, 피에르 몽퇴의 지휘로 초연된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30년 뒤 미국에서 버넘 앤 베일리 서커스를 위한 곡을 쓸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서커스단은 조지 발란신에게 어린 코끼리들을 위한 발레 안무를 제안했고, 발란신은 스트라빈스키에게 곡을 부탁했다.
B: 작은 발레 한 곡을 써주실 수 있을까요?
S: 누가 출 건데?
B: 코끼리들이요.
S: 얼마나 큰 애들이야?
B: 아주 어려요.
S: 좋아. 어린 코끼리들이라면 해보지.
이렇게 해서 슈베르트의 ‘군대 행진곡’을 인용한 <서커스 폴카: 아기 코끼리를 위해>가 빛을 보았다.
아직 페르 라셰프 묘지에 온 지 10분밖에 되지 않았고, 적어도 1시간 이상을 더 헤매야 했지만, 상기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내게는 무덤 하나하나가 그들과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쇼팽의 무덤 바로 곁에는 루이지 케루비니의 묘가 있다. 아폴론 신이 케루비니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과하다고 생각되는가? 며칠 뒤 2018 빈 신년 음악회를 지휘할 리카르도 무티는 케루비니 음악의 최고 권위자이다. 지금은 잊힌 케루비니의 많은 작품이 베토벤 음악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케루비니는 파리 음악원 원장이던 시절 베를리오즈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적폐’였다. 베를리오즈는 잠시 뒤에 몽마르트르에서 만날 터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쇼팽의 첫 번째와 마지막 파리 리사이틀을 주선했고, 그에게 피아노를 제공했던 에라르의 묘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카르멘>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묘였다. 큼지막한 두 가족 묘소 사이에 놓인 그의 작은 비석이 무덤의 크기와 명성이 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도대체 비제 곁에 그렇게 큰 묘를 쓰고 싶을까?
쇼팽과 절친했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묘가 반가웠고, 자연주의 화가 카미유 코로의 무덤 앞에선 다시 걸음을 한동안 멈췄다.
코로의 많은 그림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저승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 오르페우스>이다. 코로가 즐겨 그린 숲 속 풍경에 신화의 인물이 들어 있다. 레테의 강 건너에는 아직도 오르페우스의 가락에 빠져 있는 복수의 여신들이 서 있다. 코로의 무덤으로부터 두 사람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그림은 미국 휴스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나는 며칠 뒤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하우스의 '프랑스 미술전'에 호출된 이 그림을 만나게 된다. 나를 만나러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이끌고 저승에서, 아니 휴스턴에서 온 것이다.
나란히 모셔 놓은 라 퐁텐과 몰리에르의 관은 경외감이 들게 했다. 알퐁스 도데 묘비는 역시 커다란 남의 묘역 사이에서 모서리만 보였다. 《마지막 수업》과 《별》이 유명하지만, 음악으로는 역시 좀 전에 보았던 비제가 작곡한 <아를의 여인L'Arlésienne>으로 기억해야 하는 도데였다.
마리아 칼라스와 사라 베르나르,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흘렀다. 페르 라셰즈를 나와 몽마르트르 묘역을 향했다. <아를의 여인> 가운데 ‘파랑돌’의 축제를 흥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