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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04. 2019

니진스키를 찾아서

장미의 요정

프랑스를 미술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어떠한가? 프랑스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는지, 20세기에 이곳에 온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눈으로 살펴본다. 몽마르트르 묘지에는 장미의 요정이 기다린다.


몽마르트르 역 앞은 예상대로 벌써부터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언덕으로 오르기 전 물랑루주 앞을 지나 몽마르트르 묘역에 도착했다. 규모는 한 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을 정도로, 페르 라셰즈 묘지보다 훨씬 작다. 크리스마스 묘지 탐방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곳에서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묘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흥미로운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묻혔다.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 간과되는 작곡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환상 교향곡> 정도만 가끔 연주될 뿐이지만, 나는 그의 또 다른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든 음악 가운데 몇 손에 꼽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오페라 <트로이인>과 <레퀴엠> 또한 걸작이다. 몽마르트르 묘지에서 떠올려야 할 작품은 <여름밤Les nuits d'été>이다. 베를리오즈가 당대 시인 테오필 고티에의 여섯 개 시에 붙인 이 가곡집은 뒤에 구스타프 말러가 관현악 반주 가곡을 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2019년 올해가 베를리오즈 타계 150주기이다
테오필 고티에라고 쓴 이름은 거의 지워져 찾아보기 힘들다

베를리오즈 근처 테오필 고티에의 묘는 찾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비석에 새긴 이름이 거의 지워져 바로 앞에 있는데 모르고 왔다 갔다 하기를 몇 차례. 마치 눈앞의 성배를 못 본 격이다. 여신의 방패에 그린 험상궂은 고티에의 모습에서는 그리 아름다운 시를 떠올리기 어렵다. 

빰빰빰 빠라라... 페트루시카

마침내 묘지 탐방의 종착점인 바츨라프 니진스키 차례이다. 고티에와 달리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 발레의 캐릭터 페트루시카로 분장한 그의 동상이 무덤가에 앉아 있다. 무용사상 최고의 남성 발레리노로 니진스키를 꼽는다. 짧은 활동 뒤에 정신병으로 세상과 멀어졌지만, 댜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이 현대 무용의 토대가 되었다. 스트라빈스키의 첫 발레들 <불새>, <페트루시카>, <봄의 제전>이 모두 니진스키가 추었거나 안무한 것들이다. 니진스키 동상 곁에는 발레 지망생이 가져다 놓은 ‘분홍색’ 토슈즈가 놓여 있다.


10분 거리 내에 있는 베를리오즈와 고티에, 니진스키의 무덤 사이에서 음악의 화학반응이 격렬하게 이뤄졌다. 고티에가 시를 쓴 베를리오즈의 <여름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는 ‘장미의 정령Le spectre de la rose’이다. 시는 이렇다.

비올라 반주의 연주도 좋지만, 이렇게 클라리넷의 역할을 보는 것도 아름답다
감긴 눈꺼풀을 열어보아
멋진 꿈에 빠진 처녀여
나는 장미의 정령
그대가 어제 무도회에 나를 꽂았지
그대가 화병에서 나를 골랐어
진주처럼 은빛 눈물 떨구는 나를
그리고 반짝이는 파티에
밤새 나를 데리고 다녔지

아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대
피하려 해도 어쩔 수 없었네
밤마다 나 장미의 정령이
그대 머리맡에서 춤추리
하지만 두려워 마오 난 미사도
진혼곡도 원치 않네
이 은은한 향이 내 영혼이니
나는 낙원으로부터 왔네

내 운명은 부러움을 사지
이리도 아름다울 운명이니
누구도 이런 삶을 살진 못해
그대 가슴이 내 무덤이니
내가 쉬고 있는 화병 위에
시인이 입맞추며 적기를
여기 장미 잠들다
모든 왕이 그를 질투하리

당장 한번 들어보라. 내가 아는 중 가장 낭만적인 노래이다. 이제 이야기의 시작이다. 베를리오즈는 일찍이 파리에서 활동했던 선배 글루크를 존경했다. 앞서 말한 코로의 그림이 바로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관람한 뒤에 그린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글루크의 사실적인 오페라를 카를 마리아 폰 베버가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베버는 스스로 베토벤과 동급이라고 생각했던 독일 오페라의 선구자였다. 오페라 <마탄의 사수>로 유명한 베버의 음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무도에의 권유>이다. 주선율을 들어보면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귀에 익은 가락이다.

<셸 위 댄스>. 미하엘 엔드레스의 피아노 연주

‘무도에의 권유’는 일본 번역을 그대로 옮긴 것이리라. ‘무한도전’이라도 하라는 것인가? ‘에의’라는 겹조사부터 마음에 안 든다. 이것을 잘못 듣고 ‘무도회의 권유’로 나가면 더욱 꼬인다. 무도회에서 뭘 권유하나? 결국 원뜻에 가장 가깝게 옮기자면 ‘춤 신청Afforderung zum Tanz’이다. 남녀 사이의 짝짓기를 양식화한 춤 신청을 베버보다 잘 표현한 예는 드물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 속의 무도회 장면을 수없이 보고 또 본 나에게 또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이 이 베버의 피아노 독주곡이다. 베를리오즈는 1841년 파리에서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공연될 때 막간에 삽입할 발레를 위해 존경하는 선배의 피아노 음악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이 관현악이다.


베버와 베를리오즈의 합작을 발레 뤼스의 미하일 포킨이 무용으로 만들었다. 발레가 되기에 아주 좋은 줄거리가 있었다. 테오필 고티에가 쓴 ‘장미의 정령’이다. 이 또한 베를리오즈도 음악으로 쓰지 않았는가! 모든 왕이 부러워할 ‘장미의 정령’을 춘 사람이 바로 니진스키였고, 그를 꿈꾼 처녀는 타마라 카르사비나였다.

카를라 프라치와 조지 드 라 페냐가 출연한 영화 <니진스키, 1980>

레옹 박스트가 의상과 무대를 디자인한 발레 뤼스의 공연은 1911년 4월 19일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되었다. 마침 그 해는 원작자 고티에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꿈꾸는 소녀 앞에 분홍색 옷을 입은 장미가 나타나 함께 춤을 추다가 사라지는 것이 내용이다. 남자가 장미가 되는 유일한 예술이 아닐까? 초연 때 창문 밖으로 도약해 사라지는 연기를 보여준 니진스키 뒤로 이 발레는 남자 무용수들의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춤이라기보다는 묘기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공연 포스터를 디자인한 장 콕토가 기억하는 이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니진스키와 카르사비나
“나는 공연을 보지 않고 무대 뒤에서 그(니진스키)를 기다렸다. 그것이 정말 좋았다. 소녀에게 입을 맞춘 장미의 정령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떨어지자 스텝들이 얼굴에 물을 뿌려 주었고 수건으로 그것을 닦아 주었다. 마치 권투선수 같았다. 얼마나 우아하며 동시에 야만적인가! 나는 언제나 그때의 천둥 같은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분장한 얼굴로 숨을 내쉬며 땀에 절어 한 손은 가슴을 쥐어짜고 다른 한 손은 벽을 짚었다가 의자에 쓰려졌다. 그러고는 박수에 화답하기 위해 미소를 지으며 무대로 돌아갔다.”

니진스키를 잇는 불멸의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가 소련을 망명해 서방에 왔을 때 처음 춘 춤도 <장미의 정령>이었고, 그가 평생의 파트너였던 마곳 폰테인과 마지막으로 춘 것도 장미였다. 개선문에서 돌아본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의 모델 중 하나인 누레예프는 내가 처음 유럽 땅을 밟던 1993년 1월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누레예프는 파리 남쪽 생 주느비에브 드 부아의 러시아인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에 앞서 여기에 묻힌 사람들이 있다. 니진스키의 뒤를 이어 러시아 발레단의 주역이 된  세르게이 리파르, 20세기 소련 영화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첫 아내 카차이다.


발레 영화로 유명한 허버트 로스 감독은 1980년 <니진스키>를 내놓았다. 영화는 <장미의 정령>을 공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발레단장 디아길레프는 막이 오르기 전 주역들을 다독인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주역 무용수 조르주 드 라 페냐가 직접 니진스키로 열연한다. 상대역인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또한 라 스칼라와 ABT의 수석이었던 카를라 프라치가 열연했다. 그녀와 스트라빈스키 역의 로널드 픽업은 얼마 뒤 미국 NBC가 만든 미니시리즈 <베르디의 삶>에서 베르디 부부로 등장한다. 앞서 본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와 더불어 이런 영화들이 1980년대 공중파의 황금시간대에 방송되었다. 오늘날에는 한류의 핵심인 K드라마가 장악하고 있다. 영화 <니진스키>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니진스키를 줌 아웃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페트루시카와 같은 모습이다.

<터닝 포인트>를 만든 허버트 로스 감독의 영화

첫 장면은 사육제를 앞둔 장터이다. 다양한 군상이 거리의 악사와 광대들의 공연을 구경한다. 그때 꼭두각시 인형극장이 시작된다. 페트루시카와 발레리나 무어인, 이렇게 세 캐릭터가 출연하는 인형극이다. 인형극사가 피리를 불자 무대 위 세 인형이 광장에 내려와 춤을 춘다.


이어서 페트루시카의 방. 별과 초승달을 그린 검은 벽, 악마를 그린 금색 문, 얼굴을 찌푸린 인형극사의 초상 모두 브누아의 디자인이다. 인형극사는 세 인형에 감정을 불어넣는다. 페트루시카는 발레리나에 대한 짝사랑에 괴로워하다가 자신을 옭아맨 인형극사의 초상화에 달려든다. 그러나 벽에 작은 구멍만 냈을 뿐이다.

알렉산데르 브누아가 그린 <페트루시카>의 무대 배경

다음 장면은 무어인 인형의 방. 야자수와 열대 과일을 그린 벽지이다. 옆방은 발레리나의 것이다. 거만한 무어인에게 매력을 느낀 발레리나가 그에게 애교를 부려 유혹한다. 그때 질투심에 눈먼 페트루시카가 덮치고 무어인은 그를 내쫓는다.


마지막은 다시 사육제의 장터. 밤이 되어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사육제 가면을 쓴 광들과 섞인다. 그때 인형극장에서 소동이 들린다. 페트루시카와 무어인의 사생 결투가 벌어진 것이다. 결과는 무어인의 승리이다. 사람들이 죽은 페트루시카를 감싸자 인형극사가 그것은 지푸라기를 넣은 인형일 뿐이라고 안심시킨다. 장터가 파하고 혼자 남은 인형극사가 페트루시카를 끌고 가려는데 무대 위에서 페트루시카의 유령이 조롱하듯 내려다본다.


발레 뤼스의 구성원들은 알게 모르게 <페트루시카> 속 이야기가 자신들의 처지와 같다고 생각했으리라. 화려한 볼거리로 군중을 즐겁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삶일 뿐, 한 사람 한 사람이 단장 디아길레프의 뜻에 따라 작동하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디아길레프 또한 머지않아 윗분의 부름을 받는다. 인형극의 역학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포스터이다. 꽃 파는 처녀 일라이자는 언어학 교수 히긴스의 조종을 받지만, 히긴스 또한 조물주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대부> 역시 마리오 푸조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소설과 영화 표지에 인형극 마스터의 손을 그려 넣었다.

두 작품이 '인형극의 최고봉'임을 보여주는 표지 디자인

발레 뤼스의 이야기는 뒷날 마이클 파월과 에머릭 프레스버거 콤비에 의해 <분홍신The Red Shoes>으로 영화화된다. 이 또한 안데르센이 원작자이다. 분홍신에 집착한 소녀가 결국 두 발까지 자르지만 죽은 뒤에야 춤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잔혹동화이다.


영화에서 발레단장 보리스 레르몬토프는 전도유망한 발레리나 비키 페이지를 발레단에 들인다. 그녀는 실력과 야망을 겸비했다. 젊은 작곡가 줄리언이 레르몬토프의 새 발레 <분홍신>의 음악을 맡게 된다. 비키와 줄리언은 함께 작업하며 서로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끼는데, 단장 레르몬토프는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결국 줄리언이 다툼 끝에 발레단을 나가고, 비키도 연인을 따라가 둘은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파리에서 비키를 다시 만난 레르몬토프가 <분홍신>의 주역을 제안하자, 비키는 다시 한번 프리마 발레리나가 될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뒤늦게 달려온 줄리언이 그녀를 회유하지만, <분홍신>의 주인공처럼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게 된 비키는 막이 오르기 직전에 발코니에서 몸을 던진다.

매튜 본의 춤과 버나드 허먼의 음악으로 부활한 <분홍신>

발레단장 레르몬토프가 댜길레프, 줄리언이 스트라빈스키, 비키가 니진스키를 비롯한 발레 뤼스의 무용수들임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비키가 최후를 맞는 곳이 바로 니진스키가 <장미의 정령>을 추었던 몬테카를로 오페라 앞이다.


몽마르트르 묘지를 나와 진짜 몽마르트르 언덕에 오른다. 해발 13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파리에서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200미터인 모스크바 최고봉 ‘참새언덕’보다도 낮다. 그 중심에 사크레쾨르, 곧 성심성당이 자리한다. 그러나 성당이 완성된 것은 20세기 초이니, 19세기 말 벨 에포크 시절의 풍경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성심성당은 이미 줄이 너무 길어 들어가길 포기해야 했다.

영화 <왕의 춤> 가운데 <상상병 환자>를 공연하는 몰리에르

인종 전시장과 같은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한 거리 예술가가 눈길을 끈다. 하얀 분장을 하고 흰 옷을 입은 것이 유럽 공공장소에서 흔히 보이는 가장 대리석상이다. 내게 바로 연상되는 캐릭터는 몰리에르의 마지막 작품 《상상병 환자Le Malade imaginaire》였다. 영화 <왕의 춤>에서 그린 몰리에르의 최후는 뭉클하다. 몰리에르는 이 마지막 공연 때 녹색 옷을 입었고 공연이 끝난 뒤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뒷날 연극인에게 녹색 옷은 금기가 되었다.


‘벨 에포크’ 무렵 모딜리아니, 모네, 르누아르, 드가, 툴루즈 로트렉,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대가들이 몽마르트르 인근에 화실을 마련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동료 가운데 몽마르트르에 살던 사람은 에리크 사티였다.


스트라빈스키가 사티를 처음 만난 것은 1910년 6월 드뷔시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였다. 사티는 드뷔시와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자신의 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해 주기도 했다. 그는 사티의 풍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특히 1918년에 공연된 <소크라테스>에서 사티의 천재성을 읽었다. 이 작품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대본으로 하는 피아노 반주곡이었고 관현악 편곡도 있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 반주 쪽을 더 좋아했다. 초연에는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앙드레 지드, 제임스 조이스, 폴 발레리와 같은 당대의 지성도 참석했다. 사티의 음악은 풍자 그 자체였고 이것은 앞으로 스트라빈스키가 뿌리내릴 신고전주의의 핵심이었다.

에리크 사티: 소크라테스

신고전주의야말로 스트라빈스키를 찾아 떠난 이번 여행의 가장 핵심적인 용어이다. 신고전주의를 얘기하려면 먼저 고전주의를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니체 대 바그너》에서 보여준 니체의 통찰이다.

음악은 다른 예술들로부터 발생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꽃이 새싹을 틔우기 위해 최후를 맞는 것처럼, 음악은 가장 내면적이기 때문에 제일 늦게, 문화의 가을꽃이 떨어지는 시기에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 단락을 처음 읽은 나는 그토록 궁금하던 여러 예술 사이의 불일치의 원인을 깨달았다. 예술사를 보면 각각의 바로크 시기와 각각의 고전, 낭만주의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미술에서 고전주의는 대개 세 시기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가 하나이고, 그다음이 그것을 모방한 르네상스 시대, 마지막이 다시 한번 고전 모방이 일어나는 18세기 초 신고전주의 시대이다. 이 마지막 신고전주의 시대가 음악사의 고전주의 시기와 일맥상통하지만 연대상으로는 반 세기나 그 이상 차이가 난다. 더욱이 음악의 신고전주의는 20세기 초에야 등장한다.


여하 간에 고전주의의 바탕은 그리스 로마 시대이다. 엄격한 비례와 통제된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행이 마무리될 때쯤 돌아보겠지만, 스트라빈스키는 바그너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멜로디를 버린 작곡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멜로디를 되찾기 위해 고전을 모방한다. 가장 먼저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시를 모방한 발레 <풀치넬라>이다. 단순히 멜로디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양식감을 <오이디푸스왕>이나 <오르페오>, <뮤즈를 거느린 아폴론>과 같은 작품에 녹여내기도 한다. 그런 시도의 밑바탕에 바로 사티나 라벨과 같은 선배 작곡가가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가운데서 가져온 '소크라테스의 죽음'

스트라빈스키의 뜻과 상관없이 나는 스타 소프라노 바버라 해니건이 부른 최근의 피아노 반주 음반보다 르네 레이보비츠가 지휘한 오래된 관현악판 <소크라테스>를 더 좋아한다. 낡은 음질과 고풍스러우면서도 풍자적인 재킷이 사티와 소크라테스의 인상에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특히 관현악 쪽이 스트라빈스키가 장차 쓸 <오이디푸스왕>이나 <시편 교향곡>과 같은 곡이 사티에게 받은 영향을 더 잘 느끼게 한다. 음악과 시, 철학과 미술의 융합, 이것이 몽마르트르 정신이었다. 내일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볼 푸치니의 <라 보엠>이 배경으로 삼은 곳도 바로 이런 몽마르트르이다.


오후에 퐁피두 센터로 향했다. 광장 앞에 있는 스트라빈스키 분수를 보기 위해서였다. 파리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소였지만, 아쉽게도 겨울이라 장 팅겔리가 만든 움직이는 분수는 작동하지 않았고, 바닥도 거의 드러난 채였다. 사실 이 분수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팅겔리의 움직이는 분수보다는 알록달록한 니키 드 생 팔의 캐릭터들이다.


팅겔리와 생 팔은 부부이고 분수는 1983년에 이들이 함께 만든 것이다. 퐁피두 센터는 현대 미술관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안에는 음향과 음악 연구소(IRCAM)도 들어 있다. 연구소를 만든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가 제안해 분수를 제작한 것이다. 당시 파리 시장 자크 시라크,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이 적극 후원했다.

스위스 조각가 팅겔리는 파리에 앞서 스위스 바젤 극장 광장에 비슷한 분수를 만들었다. 내가 일주일 뒤에 볼 바젤의 분수에는 니키의 조각들이 없다. 그는 바젤 것과 비슷한 분수가 ‘빛의 도시’인 파리에 들어선다면 크고 흉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분수가 들어설 자리의 일조 조건과 바람의 세기 등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팅겔리의 분수에 아내 니키의 캐릭터가 더해지자 조각은 생명을 얻었다.

팅겔리가 만든 것은 시커먼 모빌이고, 알록달록한 것이 그의 아내 니키가 만든 것이다.

열여섯 개 조각들은 각각 불새, 코끼리, 여우, 뱀, 개구리, 인어, 나이팅게일 따위를 상징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속 이미지를 시각화한 것이다. 분수는 스트라빈스키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족함 없다. 화려한 색채와 독창성이야말로 작곡가가 평생 추구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팅겔리는 조각 하나하나가 거리 예술가, 서커스, 재즈와 같이 작동하기를 원했다.


2018년 여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마침 니키의 작품전이 열렸다. 일본 컬렉터로 작가와 친했던 마츠다 요코의 소장품 전시이다. 작품 가운데에는 파리 스트라빈스키 분수의 재료가 된 도안과 모형들도 많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슴에 태양을 그려 넣은 새의 형상이다. 이것이 바로 ‘불새’이다.

니키가 디자인한 스트라빈스키 분수의 포스터

일전 러시아 여행 중에 고려인 4세 가이드를 만난 적이 있다. 김요한이라는 이름의 가이드가 러시아 설화 ‘불봉황’ 이야기를 들려줬다. ‘불새’로 알고 있던 길조(吉鳥)를 봉황이라고 하니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불새’, 아니 ‘불봉황’은 우리 곁에도 항상 있었다. 대통령 연단이나 청와대 앞 분수를 장식한 바로 그 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봉황에 대한 상서로운 이야기도, 음악도, 춤도 갖지 못했다. 이야기의 회복! 그것이 관건이다.


겨울이지만 분수 앞에는 한 사람의 거리 예술가가 작품 활동 중이다. “예술 없는 삶은 스투핏Life without art is stupid”이라 적은 바닥화였다. 나는 동전 한 닢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 작품 더 부탁하고 싶었다. “이야기 없이 예술도 없다There is no art without Story”라고! 

'스투핏'을 외치며 잘 나가던 저축왕도 훅 가버리고 말았다

벌써 늦은 오후로 향하고 있었다. “한두 시간이라도 쉬어야 저녁 일정을 소화할 텐데” 하며 호텔로 발길을 재촉한다. 리슐리외 거리 국립 도서관과 코메디 프랑세 극장 사이에 위치한 내 호텔 바로 옆에 스탕달이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과 《로마 산책Promenades dans Rome》을 쓴 집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스탕달은 당대 프랑스 최고의 이탈리아 전문가였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로시니 전기Vie de Rossini》이다. 닷새 뒤에 팅겔리의 분수가 있는 바젤 극장에서 로시니의 <체네렌톨라>를 보게 될 줄 이때는 알지 못했다.

<Promenades dans Rome>. 스탕달의 로마 여행기도 있구나.. 몰랐음.. <파르마의 수도원>의 기초가 되었을 법.
<페트루시카>. 음악으로 온전히 만나보자

Tableau I - 00:00 Le Tour de passe-passe 05:20 Danse russe 07:00  

Tableau II - Chez Pétrouchka 09:45  

Tableau III – Chez le Maure 14:04 Danse de la balerine 17:06 Valse 17:48  

Tableau IV – Fête populaire de la semaine grasse 20:52 Danse des nounous 22:05 Danse des cochers et des palefreniers 27:11 Les Déguisés 29:13  

Applause 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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