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랭루주의 신성모독
파리에서 혼자 보내는 크리스마스이지만 저녁 일정은 화려했다. 무려 에펠탑 전망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파리의 명물 바토무슈 유람선을 탄 뒤에, 물랭루주 쇼를 보는 것이다. 파리에 연고가 없는 탓에 혼자 가기 번거롭고 멋쩍은 곳을 현지 가이드 투어로 가볼 참이었다.
에펠탑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세 멕시코 여인과 동석했다. 변호사와 의사인 친구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온 참이다. 첫 만남이고 곧 헤어질 것이지만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내가 어제 다녀온 개선문에 대해 얘기하자, 세 사람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어디냐고 다시 묻는다. 어렵지 않은 불어로 답했다. ‘R’ 발음도 최대한 목구멍으로 삼키며,
“아흐크 드 트히옹프Arc de triomphe!”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며 묻는다.
“너 트럼프 좋아하니?”
박장대소했다. 내 발음이 그리 형편없나? ‘트리옹프’를 ‘트럼프’라고 알아 들었으니 멕시코 사람들이 좋아했을 리 없다. ‘트럼프 타워’를 말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승리’와 ‘나폴레옹’ 따위의 단어를 섞어 설명하니 그제야 알아듣고 자신들도 한참을 웃는다. 내일 꼭 가봐야겠다며.
몇 가지 즐거웠던 대화 중에 한 가지가 더 기억난다. 멕시코 친구들은 저녁식사 이후 추가 일정이 없었다. 내가 물랭루주에 가는 것을 알고 춤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출 기회는 별로 없다고 답했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저쪽에서 먼저 한다.
“멕시코 음악은 춤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내가 “모든 음악은 결국 춤이다”라고 덧붙이자,
“멕시코에서는 특히 그렇다.”
세 멕시코 여자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무슨 이야기인가? ‘동기화synchronization’라는 어려운 용어가 실제 우리 삶에 쉽게 녹아 있다. 내가 쓰는 스마트폰을 컴퓨터, TV, 자동차와 같은 기기와 연동하는 것을 말한다. 내 생각에 인류 역사상 동기화의 첫 단추가 바로 춤이다. 음악과 동작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그 가장 현대화된 작업이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모든 유행이 그렇듯이 전 유럽 궁정이 베르사유 발레를 받아들였다. 몰리에르의 《귀족놀이》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졸부가 사교춤을 배우는 장면이다. 부레, 가보트, 카나리, 사라방드를 추다가 말 그대로 삶의 스텝이 꼬여버린다는 줄거리이다.
19세기 전 유럽을 강타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그런 낡은 스타일을 그대로 보존한 궁정이 있었으니, 바로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덴마크였다. 덴마크의 아우구스트 부르농빌이 만든 발레가 ‘부르농빌 학파’, ‘부르농빌 메서드’라고 불리며 현대 발레의 테크닉을 완성한 것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부르농빌과 동갑내기 친구 사이였다. 안데르센이 발레 동화 <분홍신>을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덴마크의 발레 헤게모니는 발틱해 건너 러시아로 옮겨진다. 차르의 전폭적인 지원의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황실 발레와 발레 뤼스였던 것이다.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미하일 포킨, 바츨라프 니진스키, 조지 발란신과 같은 무용수의 이름은 20세기의 전설이 되었다. 21세기에도 볼쇼이와 마린스키는 러시아 발레의 자존심이다.
스트라빈스키는 평생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발레와 오페라로 시작해, 협주곡과 종교음악에 이르기까지 벽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협주곡과 종교음악까지 춤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조지 발란신이 피아노 협주곡 <카프리치오>와 바이올린 협주곡을 춤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이르지 킬리안(1947-)은 <시편 교향곡>까지 안무했다.
나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곤 한다. ‘춤’이라고 하면 그 안에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탈춤’, ‘강강술래’, ‘디스코’, ‘발레’, 무엇이 되었건 춤을 일컫는 말은 그 안에 음악까지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탈춤 음악, 발레 음악이라고 말하면 중언부언이 된다. 나 스스로 깨닫고 무릎을 쳤던 사실이다. 스트라빈스키는 거꾸로 이것을 모든 음악에 적용한 것이다. 음악은 전부 춤으로 출 수 있다.
시간이 여유가 있고 서로 언어 소통이 더 매끄러웠다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뻔했다. 멕시코 여인들의 춤 실력을 못 본 것을 아쉬워하며 작별을 고하고, 센 강의 명물 유람선 바토무슈를 타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나 오전에 묘지를 너무 헤맨 탓에 유람선에서 들리는 해설과 창밖의 몽롱한 야경은 나를 잠으로 몰아넣었다. 굳이 정신 차리려고 애쓰지 않았다. 물랭루주를 위한 휴식이 필요했다.
스트라빈스키를 취재하러 와서 왜 물랭루주인가? 내가 가려고 한 곳은 정확히 말하면 카바레였다. 카바레와 카지노, 카페, 우연찮게 우리말로 모두 ‘카’로 시작하는 이런 장소들이 19세기 문화의 소통이 이뤄지는 주요 창구였다.
‘검은 고양이Le Chat Noir’ 카바레의 터줏대감 역시 에릭 사티였다. 에두아르도 마네는 또 다른 카바레 ‘폴리 베르제르’의 바(Bar)를 그렸다. 이것을 술집이라고 옮기면 잘못이다. 여기서 바는 딱히 우리말로 옮길 수가 없다. 바텐더가 술을 따라 내주는 바로 그 ‘빠’이다. 물랭루주의 풍경은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렸다. 바로 ‘캉캉’과 에디트 피아프가 물랭루주의 전설이었다. 이렇게 벨 에포크와 카바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원래 내가 가고 싶던 곳은 ‘리도Le Lido’라는 이름의 카바레였다. 리도는 이탈리아 말로 해변이고, 특히 베네치아 앞을 가로지르는 사구를 뜻한다. 오래전부터 상류층이 모였던 휴양지가 베네치아의 리도였다. 토마스 만이 쓴 《베네치아에서 죽음》의 주인공도 리도의 호텔에 묵었고, 그곳의 해변에서 최후를 맞는다. 댜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 같은 발레 뤼스의 주역들도 리도 엑셀시오르나 드 뱅 호텔의 단골이었다.
파리의 카바레 극장 리도 또한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의 주요 무대이다. 재즈 음악가 글렌의 딸을 연기하는 사람은 찰리 채플린의 딸 제럴딘이다. 그녀는 리도에서 ‘세상 끝의 향기’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중 유니세프 자선공연을 제안받는다.
파리에 오기 전 나는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리도가 주로 프랑스 현지인이 가는 카바레라면, 몽마르트르의 물랭루주는 관광객 위주이고 특히 미국, 중국 단체 여행객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문화라 혼자 예약을 해 리도에 가기가 선뜻 내키지 않았고, 대신에 물랭루주가 포함된 현지 패키지를 예약한 것이다.
내 일행 중에는 영국에서 온 아가씨들, 미국에서 온 베트남인과 인도인, 일본 부부 등이 섞여 있었다. 다행히 단체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요정의 나라Féerie’라는 제목의 장기 공연이 하루 세 차례씩 관객을 맞았다. 화려한 무희들과 아찔한 곡예사가 번갈아 등장하는 버라이어티 쇼이다. 1999년 12월 23일, 뉴밀레니엄을 앞두고 첫선 보인 이래 20년이 되어 가는 장기 공연이다. 나와 한 테이블에 앉은 영국 아가씨가 10점 만점에 몇 점을 주겠느냐고 장난 삼아 묻는다. 10점이라고 답했지만 글쎄, 속마음으로는 5점쯤 될까?
내가 보기에 물랭루주는 중요한 것이 결여된 곳이다. 바로 ‘스토리’이다. 메시지가 없는 무대는 공허하다. 말초적인 공연을 찍어내는 공간에 더 이상 시대를 대변하는 예술을 기대할 수는 없다. 무대를 둘러싼 테이블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자니 찰리 채플린과 스트라빈스키의 만남이 떠오른다.
두 거물은 194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가까이 살며 조우한다. 둘이 저녁을 먹던 어느 날 스트라빈스키가 함께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채플린은 당장 떠오른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퇴폐적인 카바레가 배경이다. 각각의 테이블은 탐욕과 위선, 잔인함 따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앉아 있다. 무대에 쇼가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여주는 쇼이다. 이에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대화를 계속하거나 음식을 주문하고 더러는 멍을 때린다.
수난극은 점점 격렬해진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라”라는 외침이 들린다. 관객들은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심드렁하게 술을 마신다. ‘신성모독’이라는 귀부인에게 사업가가 대꾸한다. 이 쇼 덕분에 망할 뻔한 카바레가 일어난 것이란다. 그때 한 취객이 일어나 외친다. “그리스도가 못 박히는데 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인가!” 결국 취객은 극장 직원들에게 끌려나간다. 죄 많은 기독교인들을 욕하는 주정뱅이의 외침이 멀리 사라진다.
채플린은 스트라빈스키에게, 예수의 수난을 보고 각성을 촉구하는 사람이 취객이고, 그 취객이 내쫓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물랭루주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장면을 공연하는 풍경인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완성되었기를 바랐지만, 스트라빈스키의 답변은 극 중 귀부인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내가 지어낸 얘기 아니냐고? 그런 재주가 있으면 좋겠지만, 채플린 자서전에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패키지에 포함된 버스 귀가 서비스로 호텔로 돌아오니 새벽 2시가 넘었다.
페르 라 셰즈와 몽마르트르 묘지를 누볐고, 에릭 사티의 유머가 깃들인 몽마르트르 언덕을 거쳐, 스트라빈스키 분수의 사진도 찍었다. 끝으로 에펠탑과 유람선, 물랭루주까지 섭렵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Es ist vollbracht.”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으로 바흐의 <요한 수난곡>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