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기구한 운명
구조적으로 파헤쳐 보는 데이의 일생
정말 오랜만의 글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작년 연말부터 누적된 심적 피로로 연재를 미룬 탓에 글을 쓰는 게 어색하다.
글이 서툴더라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영화는 희대의 명배우 장국영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혹시 안 본 사람이 있다면 꼭 먼저 영화를 보고 읽길 바란다.
영화는 서막 이후 1924년 북양정부 시절, 어느 거리에서 시작한다.
경극 극단의 길거리 공연이 한창 진행되고 이를 어린 데이와 데이의 엄마는 관심 있게 바라본다.
그러다 어수선하게 마무리된 공연. 데이의 엄마는 데이를 데리고 경극 극단에 찾아간다.
데이의 엄마는 매춘부였다.
그녀는 성장한 데이를 더 이상 키울 수 없다고 밝히며 극단 측에 데이를 받아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데이의 육손을 이유로 극단은 데이를 받지 않는다.
결국 데이의 엄마는 데이를 밖으로 데려가 손가락 하나를 절단하고 데이를 극단에 입단시킨다.
이 부분은 영화의 도입부다.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주인공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는 주인공은 능동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주인공 대부분은 수동적인 인물이다.
주인공은 어떤 사건에 휘말리는 것처럼 외부 환경의 변화로 이야기의 여정을 시작한다.
데이도 마찬가지다. 데이가 극단에 입단한 건 데이의 의지가 아니었다.
데이가 극단에 입단한 건 데이가 아닌 엄마의 의지였다.
그럼 데이의 엄마는 극 중에서 적대자 포지션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내 생각은 "아니다."이다.
오히려 이야기의 여정을 시작하는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데이는 육손이던 손가락 하나를 절단당하고 피를 철철 흘린다.
이는 이전까지의 데이의 삶이 형식적으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피로 입단서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암시한다.
데이의 상처는 이전까지의 삶과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일종의 증표, 스티그마다.
이 스티그마는 극 중반부에 이르러 다른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잠시 후 다루기로 하자.
아이들은 성장해 가며 점점 부모로부터 독립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인형이나 푹신한 배게 같은 일종의 애착물을 형성하고 집착하는 기질을 보인다.
즉, 거리가 멀어진 부모를 대체할 만한 대체품을 만드는 것이다.
만화 피너츠에서 라이너스가 집착하는 담요가 가장 적절한 예시다.
데이의 엄마는 이 '라이너스의 담요'를 데이에게 건네주며 작별을 고한다.
데이는 입단 첫날, 극단 아이들에게 엄마가 매춘부였다는 사실을 들킨다.
놀림감이 된 데이는 엄마가 건네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놀림이 계속되자 데이는 망토를 화로에 넣어 태워 버린다.
'라이너스의 담요'를 자의로 파기한 것이다.
사실, 라이너스의 담요와 작별하는 건 어른이 되는 과정 중 하나다.
그러나 데이의 경우는 좀 다르다.
라이너스의 담요는 애착의 대상이다.
라이너스의 담요와 작별하는 행위는 이제 그 아이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데이는 자립하기엔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어렸다.
그런 데이에게 샬루가 다가온다.
샬루는 겉도는 데이를 유달리 챙긴다.
그런 샬루에게 점점 데이도 마음을 열고 샬루에게 애착을 가진다.
샬루는 데이에게 또 다른 '라이너스의 담요'인 셈이다.
시간은 흘러 데이와 샬루는 청소년이 된다.
경극 배우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는 두 사람. 극단은 곱상하게 생긴 데이에게 우희 역을 맡긴다.
그러나 데이에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난 본디 계집아이로, 사내아이도 아닌데."라는 대사를
"난 본디 사내아이로, 계집아이도 아닌데."로 바꿔 외워 버린 것.
(위 대사는 데이의 삶을 은유한 대사로 유명한데, 너무 유명한 사례다 보니 이 글에선 크게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
이 실수는 아무리 꾸중을 들어도, 매를 맞아도 고쳐지지 않아 극단의 큰 골칫거리가 된다.
그러던 도중 장 내관의 비서가 극단을 찾는다.
극단 입장에선 큰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장 내관의 비서는 데이를 유심히 살펴본다.
하지만 데이는 결국 장 내관의 비서 앞에서도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실망한 장 내관이 돌아가려던 찰나, 샬루가 나타나 곰방대를 들고 데이의 입 안을 후벼 판다.
데이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드디어 대사를 제대로 읊는 데 성공한다.
샬루이 행동은 데이가 과거의 삶과 작별을 고하는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데이의 엄마가 데이의 손에 스티그마를 남겼다면, 샬루는 데이의 목에 스티그마를 남겼다.
그렇게 데이는 완벽히 경극 배우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시간은 더 흘러 유명한 배우가 된 데이와 샬루는 호화로운 삶을 누린다.
하지만 샬루는 자신에게 따라온 명망과 술집에서 만난 여자 주샨에게 관심이 더 크다.
그에 비해 데이는 우희 그 자체가 되었다 무방할 정도로 경극에 온 신경을 쏟아붓는다.
여기서부터 둘은 갈라지기 시작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샬루는 점점 세속적으로 변하고 데이는 경극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때부터 이 둘의 관계는 적대적 공생 관계로 바뀐다.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세속적 삶을 추구하는 샬루에게 데이는 이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고, 이는 데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붙어있던 그들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 트리거는 주샨의 죽음. 잠시 여기서 주샨이라는 인물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주샨은 샬루와 술집에서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샬루가 주샨을 만난 이후로 변해가는 걸 눈치챈 데이는 주샨을 경계하며 홀대한다.
데이 입장에서 주샨은 자신과 샬루의 삶을 망가뜨리는 핵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데이 입장에서 주샨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러나 이 역학 관계가 뒤집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문화 대혁명 시기, 경극 배우들은 구시대 문물을 탄압하는 홍위병들에게 끌려 나와 온갖 치욕적인 일을 당한다.
홍위병들은 구시대 문물을 불태우기 시작하는데, 그중엔 데이가 애지중지하던 검 한 자루가 있었다.
그 검은 데이가 선물 받은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라이너스의 담요였다.
이를 알고 있는 주샨은 불 속에서 검을 꺼내오고 그 죄로 홍위병들에게 박해받기 시작한다.
홍위병들은 샬루의 아내 주샨의 출신 성분을 들먹이며 그녀를 욕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샨의 남편 샬루에게도 자신과 똑같이 할 것을 요구한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결국 샬루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주샨을 모욕한다.
한 바탕 소동이 끝나고 주샨은 데이에게 검을 건네주며 자리를 뜬다.
자신이 지키고 싶던 경극 배우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주샨이었다.
이 장면에서 주샨은 적대자에서 협력자로 관계를 재정립한다.
그리고 이후 주샨은 목숨을 끊는다.
한참 세월이 흘러, 1977년. 어느 체육관에 나타난 두 사람은 외로이 두 사람만을 위한 경극을 한다.
경극의 피날레 부분, 우희가 스스로 자결하는 장면에서 데이는 진짜 검을 뽑아 자신의 목을 긋고 영화는 끝난다.
세월이 흘렀지만 성장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된 데이는 상징이 아닌 진짜 죽음을 통해 영원히 경극 배우로 남게 된다.
이 영화는 시대의 흐름에 부딪히는 인물들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수작이다.
그 뒤에는 굉장히 섬세하고 치밀하게 설계된 인물 관계 구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정교한 캐릭터 구축을 즐기며 다시 감상한다면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