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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영화<헤어질 결심>비평

영화 미학의 결정체

by Camille
V7X_xJGooVJTRTAfWEJM6Q.jpg?jwt=ZXlKaGJHY2lPaUpJVXpJMU5pSjkuZXlKdmNIUnpJanBiSW1KbklsMHNJbkFpT2lJdmRqSXZjM1J2Y21VdmFXMWhaMlV2TVRZMU5UTXdPRFF6TlRjd016YzBNalV4TnlJc0luY2lPakU1TWpBc0luRWlPamd3ZlEubHV0blhMTGNyQW5RN0t6UUI0SXBIVjluNWxUbHNKNnVkRzhoSWtHWlBSYw== 출처: 왓챠피디아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 사랑한다고 했다.


오랜만의 복귀 글이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할 땐 내가 이렇게까지 게을러 질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그동안 축적된 여러 심적 피로가 주 원인인데, 변명해봤자 소용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한다.


이 영화는 사랑한다는 표현없이 사랑을 표현하는 날카로운 영화적 아름다움을 내포한 멜로영화다.


주인공 해준의 직업은 형사다.

그는 미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불면증을 앓을 정도로 강박적으로 일에 집착하는 워크홀릭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의 추락사고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겉으로 봐선 실족으로 인한 단순 추락사고, 그러나 해준은 형사의 직감으로 무언가 부자연스럽다는 걸 눈치챈다.

그런 그의 용의선상에 올라온 사람 중 가장 의심되는 인물은 피해자의 아내인 서래다.


서래는 중국인으로, 과거 독립군이었던 할아버지의 행적을 쫓아 한국에 들어왔다.

독립군의 후손인 건 확실하나, 여러가지 의심되는 물증이 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중국에서 한국으로 밀입국 했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수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해준은 서래에게 끌림을 느끼고 잠복수사를 핑계로 그녀 주변을 멤돈다.


사실 해준은 유부남이다. 그에겐 정안이라는 아내가 있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는 겉으로만 괜찮아 보일 뿐,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

둘의 관계는 정안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유지된다. 해준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서래와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져 나중엔 비어있는 자신의 집에서 서래를 위해 요리를 해주기까지 한다.


여기서 해준 - 서래 - 정안의 관계에 대해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해준은 형사고 서래는 용의자다. 정안은 해준의 부인이다.

여기서 서래와 정안 중 해준의 적대자는 누구인가?

나는 정안을 해준의 적대자로 꼽고싶다.


해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래와 가까워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가까워진다.

하지만 아내 정안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도 서래와의 존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해준은 서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정안의 존재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해준에게 서래는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점. 즉 경계선 상의 존재이고,

해준에게 정안은 이런 해준의 전진을 막는 장애물, 적대자다.

그러나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극 중반부에 변화를 맞이한다.


해준은 워크홀릭이다. 동시에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추락 사망 사건은 단순 실족사로 종결되었지만 서래를 도와 할머니를 간병하던 해준은 수상한 점을 발견한다.

거동이 불가한 할머니가 하루에 100층이 넘는 층수를 올랐던 기록이 발견된 것.

두 사람의 휴대폰이 같은 기종이란 걸 안 해준은 홀로 재수사를 진행하고 결국 서래가 진범이었음을 밝혀낸다.

그러나 그녀를 다시 용의선상에 올리기엔 해준은 서래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쏟았다.


해준은 서래를 찾아가 이 모든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자신의 자부심마저 훼손시키며 이 사건을 은폐시킨다.

해준은 서래에게 자신은 붕괴되었단 말을 전하며 이별을 고한다.

이때부터 해준은 서래를 피해다닌다.

이는 추락사망 사건의 전말이라는 서브 플롯이 메인 플롯에 훌륭하게 녹아든 사례다.

서브 플롯의 종결로 인해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바뀐다.

더 이상 서래는 해준의 이상향이 아니다. 자신의 긍지를 무너뜨린 적대자다.


1년이 흘러 어느 지방 도시로 발령 받은 해준은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준은 서래와 어느 수산물 시장에서 운명처럼 재회한다.

해준과 정안은 서래와 서래의 새 남편 호신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해준은 서래와의 재회가 영 떨떠름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래의 남편 호신이 살해되자 해준은 단번에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을거라 엄포까지 놓는다. 그러나 서래는 이상하리만큼 수사에 협조적이다.

여기서 또 한 번의 관계의 변화가 일어난다.


해준은 이번엔 서래를 체포할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단서는 서래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가리키고 있다.

그렇게 서래를 궁지로 내몬 해준에게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서래가 아닌 진짜 범인이 나타나 붙잡힌 것.

서래는 이 사건에서 다시 해준이 쫓아야 할 목표. 즉, 경계선 상의 존재가 된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이전엔 이성적인 호감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번엔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

그렇다면 적대자는 누구인가? 바로 해준의 부하 경찰 연수다.

진범이 붙잡혔음에도 해준은 그녀를 끝까지 의심한다. 그런 해준을 사사건건 훼방놓는 건 부하 연수다.

결국 해준 역시 서래가 범인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만다.


해준은 서래가 했던 모든 수상한 일이 사실 자기를 위해 한 일이었음을 알게된다.

피를 깨끗이 닦아낸 것도 피를 싫어하는 해준을 위해서.

과거 서래의 범죄 은폐 사실을 고백한 메시지가 있는 휴대폰을 버린 것도 해준을 위해서였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고백의 메시지는 해준의 붕괴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서래는 해준과 작별을 준비한다.


서래는 차를 몰고 어느 해변으로 향한다. 해준은 돌연 사라진 서래를 찾아 해변으로 쫓아간다.

서래는 모래를 판다. 아주 깊숙히 모래를 판 서래는 그 속으로 들어가 파도에 잠식되며 조용히 사라진다.

그녀 말마따나, 서래는 해준의 미제 사건이 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미완의 상태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이 영화는 고전적인 스토리 작법의 클리셰를 파괴한 수작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은 불균형인 상태에서 균형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의 해준은 과잉된 감정으로 형성된 불균형에서 붕괴로 대변되는 결핍의 불균형으로 나아가고,

마지막엔 그토록 흠모하던 서래까지 사라지며 균형을 더욱 잃고 만다.

도식화 하자면 과잉에서 결핍으로 추락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욱 감독은 그 안에 사랑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원래는 좀 더 깊이 이 영화를 탐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날 밤샘 작업으로 인한 피로 탓에 첫 복귀 글은 이만 마무리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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