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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니엘 Caminero Oct 30. 2017

한국축구유람 - 3

비바람 따위 아무런 의미 없는 수원이라는 축구도시

비바람 따위 아무런 의미 없는 수원이라는 축구도시
Weather is not a big deal in Suwon



축구장에 간다고? 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축구팬의 여자친구로 살아온 지 어느덧 4년째에 접어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날씨가 축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여자친구는 가끔 그렇게 되묻는다. 이제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법도 됐는데, 나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뼛속까지 야구팬이 되어버린 여자친구는 ‘우천취소’가 축구에도 자연스레 참으로 적용되는 명제로 알고 있다. 안타까운 것. 축구는 그렇게 나약한 스포츠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축구팬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당당하게 받아들이거라!


아시다시피 날씨는, 정확히 말하면 비와 눈 정도는 축구에 대수로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웬만큼 심하다 싶을 정도의 강우, 강설로는 경기를 취소시킬 수 없다. 폭우나 폭설로 경기가 열리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경기 자체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관중의 방문과 입장에 불편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걱정 자체가 기우에 불과한 곳도 더러 있으니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도시 수원이 그렇다. 내가 경기장을 찾은 날은 민족 대명절을 포함하는 장기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고, 하루 종일 비가 내렸음에도 수원월드컵경기장의 분위기에는 별다른 악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날의 분위기를 더욱 멋스럽게 포장해주는 하나의 장치처럼 느껴졌다. 물론 수원 대 전북이라는 매치업을 생각하면 절대적인 관중수가 결코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경기장의 열기는 비바람과 무관했다. 날씨가 좀 좋았다면 두 클럽의 서포터스뿐만 아니라 보통의 축구 팬들도 더 많이 경기장을 찾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드나,  경기장은 조금도 썰렁하지 않았다. 파란 비옷을 입은 수원 지지자들과 녹색 우의를 입은 전북 지지자들은 경기 내내 뜨겁게 부딪혔다. 사랑은 비를 타고 온다지만 축구장에서는 욕설과 비방, 도발 역시 비를 타고 온다.


개인적으로는 수원월드컵경기장 “빅버드”의 스탠드와 시트가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이뤄져 있는 것이 경기장을 썰렁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도와주는 요소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팀을 상징하는 한 가지 고유 컬러로 통일해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것도 보기 좋지만, 다양한 빛깔로 덧입혀진 수원 경기장의 관중석은 나름의 특색과 매력이 있다. 1~2만명 정도의 관중만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도 좌석의 갖가지 색깔 때문에 이곳은 점유율이 꽤나 높아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비웃을 수도 있지만, 수원월드컵경기장의 좌석들은 사실 고유의 색상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2002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경기장 건축이 지지부진했을 당시 수원시민들이 앞장서 ‘1인 1의자 갖기 운동’이라는 유례없는 모금 캠페인을 통해 각각 10만원의 비용을 후원하고, 좌석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으니 그들의 뜻과 마음이 매 좌석에 반영되어 있다고 의미를 부여해도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라는 클럽 이름에는 ‘유나이티드’가 들어가지 않지만, 수원월드컵경기장 빅버드스타디움이라는 구장 이름에는 ‘유나이티드’가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기업과 시와 시민이 함께 만든 경기장이니 말이다. ‘Suwon Samsung United “Big Bird” Stadium’이라고 말이다.



사실 수원 구단은 최근 몇 년간 긴축 재정을 유지하면서 스쿼드의 몸집과 이름값을 줄여왔고, 그에 따라 과거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성적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누구나 수원을 ‘축구의 도시’, ‘축구 수도’라고 여길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고, 클럽에는 A대표, 올림픽 대표, 청소년대표가 수두룩했지만, 지금은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라고 할 만한 빅네임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와 지금은 여러모로 분위기가 다르다.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고 단순히 과거의 영광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며 현 상황을 낙관할 수만도 없으나 어찌 됐든 과거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진 수원이라는 클럽의 현 모습이, 수원월드컵경기장의 분위기가 아쉬운 건 비단 수원 팬들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K리그의 타 클럽 팬들도, 보통의 축구 팬들도 수원의 움츠러든 어깨가 왠지 모르게 조금은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지 않나 싶다. 오죽하면 경쟁자인 전북의 최강희 감독이 수원은 리그를 선도해 나가야 하는 클럽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했을까?



지금은 우위에 선 리딩 클럽의 감독이 일종의 애정과 관심을 담아 그런 코멘트를 남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수원이 누군가로부터 동정을 받을 팀은 아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한 영화 속 대사를 떠올릴 것까지도 없다. 수원이 K리그 내에서 정말 캐시가 없는 클럽은 아니니까. 뭔가 구단이 프로스포츠 팀 그 자체로 오롯이 바로서기 위한 과정 속에서 이런저런 부침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본다. 정대세 같은 수준급 스트라이커를 겨우(?) 2~3억원 차이로 J리그에 내준 최근의 모습은 리그 팬으로서 안타깝기 짝이 없으나, 이런 변혁의 시기를 어느 정도 슬기롭게 헤쳐 나가려는 수원의 자세는 고무적으로 평하고 싶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지만, 수원월드컵경기장은 빅버드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W스탠드의 관중석을 덮는 큰 지붕이 새의 날개를 떠올리게 하고, E스탠드의 작은 지붕이 꽁지깃을 닮아서라고들 하는데,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는 이름이다. 하지만 보통의 축구장과는 차이가 있는 독특한 외관은 꽤나 마음에 든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이나 울산문수월드컵경기장, 대전월드컵경기장 등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축구장의 외형을 갖고 있다면 수원월드컵경기장과 제주 서귀포월드컵경기장은 꽤 특색이 살아 있는 디자인이다.



경기장 밖 곳곳에서도 수원이라는 클럽의 어제와 오늘을 실감할 수 있는 장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창단 20주년을 맞아 선정한 레전드 플레이어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빅버드 한 켠에 줄지어 있다. 이운재, 이병근, 박건하, 김진우, 고종수, 곽희주, 나드손, 산드로, 데니스 그리고 현재 수원삼성블루윙즈를 이끄는 감독 서정원까지… 수원의 20년을 빛냈던 이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포스 넘친다.

한쪽 출입구에 설치된 염기훈, 조나탄, 구자룡의 인스타그램 포토월이 귀엽고 앙증맞은 느낌이라면 레전드들의 위용은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이런 모습은 K리그 내의 다른 클럽들도 벤치마킹하면 좋겠다. 꼭 많은 돈을 들여 웅장하게 꾸밀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경기장 한쪽 외벽에 클럽의 과거를 빛냈던 선수들의 그림과 이름, 등번호를 새겨 놓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여행할 때 보카 주니오르스와 아르헨티노스 주니오르스의 홈 경기장 안팎 여기저기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려진 벽화를 본 적이 있다. 그다지 닮았다고 할 수도 없고, 썩 빼어난 그림도 아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봤다. 포항에도, 서울에도,

울산에도, 전주에도, 전국의 K리그 경기장 어디에도 레전드를 기리는 공간이 세워졌으면 좋겠다.


현재의 스쿼드를 대형 사진으로 출력해 홍보용 배너로 활용하는 것도 좋지만, 과거의 영웅들을 더 높이 추켜세워주는 문화가 있었으면 한다. 아빠 손을 잡고 축구장에 처음 간 아이가 옛 선수의 그림을 보고 “아빠! 근데 저 선수는 누구야?”라고 묻는 모습, 아빠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응, 저 선수는 말이야. 아빠가 어렸을 때…”라고 답해주는 모습 그런 소소한 에피소드가 축구장에 가득하길 바란다.



그런 에피소드들을 만들어줄 장식과 장치가 축구장 곳곳에 자리했으면 좋겠다. 수원은 그렇다. 엄청나게 긴 역사를 가진 클럽은 아니지만,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클럽처럼 보인다. 빅버드 역시 그렇다.

엄청나게 오래된 축구장은 아니지만, 이곳을 스쳐간 이들의 면면을 소중히 기리는 스타디움처럼 보인다. 수원은 과거만큼 크고 강하지 않지만, 여전히 축구도시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비, 바람이 몰아쳐도 잔고가 줄고 스타가 사라져도 수원은 분명 축구의 도시이다.


- 글·사진 by 김다니엘 (스포츠투어리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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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월드컵경기장

별칭: 빅버드

개장: 2001년 8월

수용인원: 약 44,000명

주소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월드컵로 310 (우만동)

교통 : 지하철 1호선 수원역에서 버스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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