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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름 Jan 23. 2019

아하, 패터슨!

 꼭지를 딴 방울토마토에 칼집을 낸다. 그 위에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후추와 소금도 조금 뿌려준다. 방울토마토를 유리 용기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는다. 타이머를 맞추고 ‘조리’ 버튼을 누른다. 윙, 소리를 내며 트레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나는 잠시 멍하니 전자레인지 속을 들여다본다.


 ―전자레인지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머리. 이제 막 방울토마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울토마토의 무게와 색깔, 그리고 그것이 함유한 수분에 대해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 방울토마토를 먹기 좋게 익혀낼 것이다.


이런 공상을 하다 보니 주방의 다른 가전기기들도 모두 커다란 머리로 보인다. 제각각 무엇인가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것은 눈에 불을 켜고, 어떤 것은 낮게 흐느끼며, 또 어떤 것은 아주 조용하게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컵케이크에 집중하던 오븐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시간이 되자 짧은 알람만 울렸을 뿐이다. 여자가 꺼낸 트레이엔 잘 익은 컵케이크가 가득 담겨 있다. 여자가 컵케이크와 남자를 번갈아 보며 활짝 웃는다.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영화의 한 장면이다. 시를 쓰는 버스 운전기사, 혹은 버스를 운전하는 시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일상을 소재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집에서 돌아다니는 조그만 성냥갑이나 호박, 혹은 그가 매일 버스를 몰고 다니는 도시의 거리가 시의 소재다. 긴장감이나 스릴과는 거리가 먼, 조금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다. 하지만 시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시인이 주인공인 이 영화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버스 드라이버가 시를 쓴다는, 아니 시인이 평범한 노동자라는 이 설정이 반가웠다. 나는 지금껏 시를 독자로서 읽기에도, 아마추어로서 흉내 내기에도 너무 어려운 장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요즘 발표되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그런 나에게 이 영화의 설정은 영화 속의 대사처럼 다분히 ‘시적’이었다.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이, 그래서 관습적인 것들을 뒤바꾸거나 전복시키는 것이 시라고 한다면 지금 토마토를 익히고 있는 전자레인지도 충분히 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을 피우거나 뜨거운 증기를 내뿜지 않고도 음식을 데우기도 하고 살균까지 한다. 그저 속으로 궁굴리기만 할 뿐인데 꽁꽁 언 닭 가슴살과 치즈를 녹이고 차가운 국물을 데운다. 마치 염력이라도 쓰는 것처럼 죽어 있거나 죽어가는 것들을 따스하게 살려낸다.


조금 전 영화도 주인공이 성냥갑을 살려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그는  ‘OHIO BLUE TIP MATCHES'라는 문구가 써진 조그만 성냥갑을 발견한다. 그중 ‘OHIO’와 ‘MATCHES'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인쇄돼 있다. 그는 이 글자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스피커를 연상해낸다. 그리고는 그의 시에다가 성냥갑이 ‘세상을 향해 더 큰 소리로 외치려는 것 같다’고 쓴다. 몇 개의 글자가 그의 마음을 통해 시 속에 들어오면서 성냥갑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마치 전자레인지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이다.


전자레인지 트레이는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칼집 방향을 따라 토마토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토마토 즙이 유리용기 바닥에 고인다. 이제 곧 즙이 끓어오르고 토마토가 먹기 좋게 익어갈 것이다. 껍질이 벗겨지고 과육이 흐물흐물해지면서 토마토는 처음의 모습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조리를 해도 토마토는 토마토로 남을 것이다.


시를 쓰는 버스 드라이버의 이름은 패터슨이다. 그는 미국 뉴저지 주의 패터슨에 산다. 이 영화의 제목은 <패터슨>이다. 영화는 일란성 세 쌍둥이처럼 주인공의 이름과 배경, 제목이 모두 똑같다. 영화에도 쌍둥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패터슨이 운전하는 버스에 쌍둥이 소녀나 쌍둥이 할머니가 타기도 하고, 신호대기 중인 버스 앞을 쌍둥이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지나가기도 한다. 어느 날 패터슨이 퇴근길에 우연히 만난, 시를 쓴다는 소녀 역시 쌍둥이였고, 그가 술집에서 만난 동네 청년도 알고 보니 쌍둥이였다. 패터슨 부부도 아이를 갖는다면 쌍둥이를 갖고 싶어 한다. 이 모두가 영화를 위한 설정일 텐데 무슨 의미일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분주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어느 일본인에게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패터슨 부부는 마빈이라는 애완견을 키운다. 부부가 외출한 사이 마빈은 패터슨이 소파에 놓고 간 그의 시 노트를 물어뜯어 놓는다. 그동안 패터슨이 써왔던 작품들을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집에 돌아온 부부는 망연자실하지만 소용없는 일. 한동안 패터슨은 낙담한 채 지낸다. 그러다 산책을 나간 공원에서 그 일본인을 만난다.

일본인은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윌리엄스의 고향 패터슨을 방문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날아온 거였다. 시인이냐고 묻는 일본인에게 패터슨은 그냥 버스 드라이버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일본인은 아주 시적이라고, 윌리엄스의 시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윌리엄스는 시인이지만 원래 직업은 의사였다고 패터슨이 말하자 일본인 시인은 아하! 하고 약간은 묘한 느낌의 감탄사를 내뱉는다. 장 뒤뷔페라는 프랑스의 미술가는 원래 에펠탑의 기상학자였다고 한다. 뒤뷔페의 이야기를 어느 시인의 작품에서 읽었다며 일본인이 말하자 패터슨은 그 시인이 뉴욕 파라고 일러준다. 그러자 일본인은 또다시 아하! 하며 예의 그 묘한 감탄사를 내뱉는다.


일본인 시인은 자신은 시로 숨을 쉰다고 말하며 패터슨에게 빈 노트 한 권을 선물한다. 그러면서 때로는 빈 노트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한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선다. 패터슨이 그가 준 빈 노트를 넘겨보는 사이 공원을 벗어나던 일본인이 돌아서서 패터슨을 부른다. 그러더니 그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또다시 내뱉는다. 일본인 시인이 아하! 하는 순간 때마침 토마토에 골몰하고 있던 전자레인지도 땡,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잘 익은 토마토가 전자레인지에 들어가기 전의 그 토마토와 다르지 않듯, 의사인 윌리엄스와 시를 쓰는 윌리엄스가 다르지 않다. 기상학자였던 뒤뷔페와 미술가인 뒤뷔페도, 버스 드라이버인 패터슨과 시를 쓰는 패터슨도 마찬가지다. 시라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패터슨이 그의 아내를 생각하며 쓴 연시는 모두 성냥갑이나 호박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이처럼 시는 평범한 일상에서 나오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일상과 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일란성쌍둥이인 것이다. 평범한 일상도 오래 지켜보고 곱씹다 보면 아하,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시는 그렇게 읽고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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