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해진 미로를 지난다

by 서령

밤은 늘 나를 흐릿한 경계로 데려간다.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지는 순간, 세상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희미하게 뒤섞인다. 가로등 불빛이 창문 너머로 번져 들어오고, 고요한 어둠은 내 숨결을 따라 일렁인다.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꿈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꿈속에서 나는 자주 잊고 지낸 나를 만난다. 낮 동안에는 견고한 껍데기를 쓰고 살아가지만, 꿈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 얼굴 없는 군중 속에 서 있기도 하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따라 무작정 걸어가기도 한다. 때로는 어린 시절의 집 앞 골목길에서, 때로는 이름조차 모르는 먼 나라의 바닷가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난다. 그것이 환영인지, 기억의 파편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선명하고 실제 같다.


꿈은 종종 잔인하다. 손에 닿을 듯 가까운 것들을 보여주고는, 깨어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사라져 버린다. 이루고 싶었던 사랑, 아직 도달하지 못한 성취, 잃어버린 사람의 웃음… 꿈은 그것들을 잠시 빌려주고는 무심하게 거두어 간다. 눈을 뜬 후 남는 것은 텅 빈 공기와 알 수 없는 그리움뿐이다.


그러나 꿈은 동시에 다정하다. 낮의 무게에 짓눌린 나에게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준다. 나는 꿈을 통해 현실에서는 감히 꺼내지 못했던 욕망을 확인하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불씨를 발견한다. 그 불씨가 작고 흔들리더라도, 그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시 하루를 살아낼 힘이 생긴다.


어쩌면 꿈은 우리가 진짜로 바라는 것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낮에는 이성의 틀에 갇혀 말하지 못한 것들이, 밤이 되면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그곳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고, 이뤄진 일과 이뤄지지 못한 일이 하나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꿈은 단순한 허상이 아니라,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이 흘려보내는 비밀스러운 편지인지도 모른다.


나는 밤마다 그 편지를 기다린다. 침대 위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서 작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문을 지나면 현실은 멀어지고, 몽롱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거기서 나는 한없이 자유롭다. 무거운 책임도, 다가올 내일의 두려움도 없이,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흘러간다.


그러다 문득 깨어나면,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무겁다. 그러나 꿈에서 본 풍경이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아 나를 붙잡는다. 그것은 때로는 아쉬움이고, 때로는 위로이며, 또 때로는 나를 앞으로 밀어내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잠들 준비를 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밤은 어떤 꿈이 나를 찾아올까? 사라진 사람의 미소를 다시 볼까, 아니면 아직 가지 못한 길을 미리 걸어볼까. 답은 알 수 없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오늘도 꿈을 기다린다. 현실을 넘어 또 다른 삶을 잠시나마 살아낼 수 있는, 그 몽롱하고도 은밀한 시간을.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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