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함이 가르쳐준 것

by 서령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안경을 벗었다가 쓴다.

그건 단순히 시력을 보정하는 행위가 아니다.

세상을 다른 해상도로, 다른 마음으로 바라보는 전환의식 같은 것이다.


안경을 쓰면 세상은 정확해진다.

모서리는 각이 살아나고, 간판의 글자는 도망칠 틈 없이 눈앞에 잡힌다.

마치 세상이 “정답”을 제시해 주는 듯한 착각이 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의 세계인지 명확히 구획되고,

모든 사물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정직하게 놓인다.

그 질서 속에서 나는 안심한다.

사물은 나를 속이지 않고, 거리는 배신하지 않는다.

정확한 초점 속에서 인간은 ‘안정’이라는 환상을 얻는다.


하지만 오래 그 상태로 머물면,

나는 어느새 피로해진다.

모든 것이 선명할수록,

나는 세상을 ‘본다’기보다 ‘읽는다’.

나무의 잎사귀를 수천 개의 초록 조각으로 인식하고,

사람의 얼굴을 ‘피로, 나이, 감정선’의 데이터로 분석한다.

선명함은 때로 잔인하다.

보지 않아도 될 세부를, 가려야 할 진실을 끝내 들춰낸다.


그래서 나는, 가끔 안경을 벗는다.


안경을 벗은 세계는 흐릿하다.

모든 경계가 부드럽게 녹아내리고,

빛은 모양을 잃은 채 따뜻한 안개가 된다.

그곳에서는 사람도 사물도 다소 낯설다.

하지만 그 낯섦 속에 평화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판단이 늦고,

사물의 이름이 느리게 떠오른다.

나는 더 이상 ‘분석’ 하지 않고,

그저 존재와 존재의 사이를 감각한다.


안경을 벗은 눈으로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은 얼굴 대신 ‘색’으로 다가온다.

푸른색의 코트, 노란 우산, 붉은 입술.

각자의 경계가 무너진 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섞인다.

그때 나는 문득, 세상이 원래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눈이 너무 날카로워서,

세상이 부드러워질 틈조차 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안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를 세상에 맞추는 장치이자,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재단하는 틀이다.

나는 그 틀을 통해 정확히 본다고 믿지만,

사실은 ‘나에게 익숙한 형태로’만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경이 내 시야를 넓히는 동시에,

내 상상력을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어릴 적에는 시력이 나빠지는 게 두려웠다.

선생님의 얼굴이 칠판보다 흐릿해질 때마다

나는 어딘가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끔 흐릿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보이는 세상보다,

조금 모르는 세상이 오히려 나를 살게 하는 순간이 있다.


안경을 쓴 세상은 ‘현실’이고,

안경을 벗은 세상은 ‘감정’이다.

전자는 날카롭고, 후자는 온화하다.

나는 그 둘을 오가며 하루를 산다.

선명함 속에서 나를 세우고,

흐릿함 속에서 나를 지킨다.


문득, 거울 앞에서 안경을 벗는다.

그 순간 거울 속의 나는 어딘가 낯설다.

하지만 그 낯섦이 싫지 않다.

그건 세상이 아니라,

‘나’를 다시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안경을 벗고 쓸 것이다.

세상을 더 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진짜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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