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
우리나라 대학 입시 면접에서 면접관이 “이제까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무언가?” 라고 물으면 면접 학생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가장 많이 얘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에 물어보면 이걸 읽고 좋았다는 사람보다는 무슨 말인지 몰라 지루했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현 입시제도 내에서 불쌍한 고교생들은 위에서 시키는 공부를 군말없이 할 것을 압박받는다. 삶의 의미도, 지금 힘든 것도 일단 잊고, 입시 공부에 무당 접신하듯 몰두하라는 것이다. 반면 <데미안>의 중심 내용은 인간 각자가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래 옮겨 놓은 데미안의 구절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내 가슴 속에서 치솟는 어떤 것, 나는 오로지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
내 가슴 속에서 솟는 어떤 것은 존재의 본류로부터 흘러나오는 정신이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고, 개척되지 않았지만, 분명 나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운명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려운 이유는 존재의 본류를 가로막는 인공적인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이란 세상에 길들여지며 개인의 정신에 들어와버린 ‘가짜 나’ 이다. 반면 ‘진짜 나’ 는 원래 생명의 속성을 품고 있는 것이라 인간을 행복한 열정으로 이끈다.
가짜 자아는 집단 가치의 형태로 들어오며,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데 도움을 주지만 본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정신 속 마찰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학벌의식, 명예욕 같은 것이다. 데미안에 따르면 좋은 대학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주체적 운명이 아니고, 남이 내준 숙제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만일 고교생이 진정 <데미안>에 감동받았다면, 명문 대학 입시용 사람 공장이 되어있는 현 교육체제 부터 공격할 것 같다. 선언문 같은 걸 발표하고 학교를 자퇴하는 것도 할만한 행동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돌출 행동을 하는 모난 돌에 정을 맞추려 한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주제를 돌려 프란츠 카프카로 돌아가 보자. 카프카도 데미안이 말하는 ‘가슴 속에 치솟는 어떤 것’ 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은 ‘글쓰기’ 라고 하는 창작 행위에 중심을 두고 있다. 스스로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다” 고 말을 했었다.
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몰입은 다른 작가 누구와 비교해도 특별히 순수했던 것 같다. 생전에 남긴 편지나 기록들을 읽어 보면 카프카는 작품 <화부>로 폰타네 문학상을 받았지만 기뻐하지 않았고, 자기 작품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걸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폐결핵에 걸려 죽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남긴 원고를 모두 불태워 줄 것을 부탁까지 했다.
이처럼 그는 글 쓰는 행위 자체에 모든 걸 걸었다. 감동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여기서 들었던 궁금증은 ‘글쓰기’ 가 그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길래 일생을 헌신 했느냐는 것이었다. 고교생이 죽어라 하는 입시 공부 같은 느낌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는 이주동作 <카프카 평전>에서 옮긴 내용인데 한 번 읽어보자.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행복, 능력 그리고 가능성” 을 “문학적인 것” 으로 이용해왔는데, 그가 글을 쓸 때면 슈타이너가 말하는 “천리안적인 상태”, 즉 “망아 상태” 에 종종 빠지게 되며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이 이루어지고, 그 상태에서 모든 착상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모든 한계를 느낀다” 고 밝혔다.
망아(忘我) 상태는 자아의 경계가 사라자고 세계와 합쳐져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말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흠뻑 녹아든다든지, 연인(戀人)을 안고 있을 때의 기분이다. 자아의 감각이 없기 때문에 아집도 같이 사라지고, 천리안적인 직감을 느낀다. 육감(六感)이라 부를 수도 있는 이런 감각으로 카프카는 글을 썼던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서 가슴에 치솟는 어떤 것을 발견했고, 거기에 일생을 바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