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브는 오랜만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생긴 일들

by 들국진

글을 쓰고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네요. 크리스마스이브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아무 일도 없던 크리스마스이브는 오랜만 이어서요. 먼저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2017년 12월 24일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보여줄 사람도 없는데 오늘따라 화장은 왜 이렇게 잘 먹은 건지. 지난 주말 샀던 두 권의 소설책 읽기를 오늘 마무리할 생각이었습니다.


별다방에 들어갔다 또 소스라치게 놀라 나와서는, 지난 주말 갔던 카페에 안착. 오늘은 두 사람이 앉기엔 좁아 보이고, 한 사람이 앉기에 적당해 보이는 소파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좁아 보였기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고요.


커피는 에티오피아 원두의 드립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순식간에 한 권을 뚝딱 끝내고 두 번째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지만 나에겐 그저 휴일이 하루 더 남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지구 밖에서 이브에 들뜬 지구인들을 지켜보듯이 관망하는 태도였달까. 흥미로웠죠. 이브라고 꼭 커플만 들어오는 것 아니었어요. 남남, 부녀, 아웃도어 복장의 중년 남녀, 가족 등등. 사람들이 보내는 이브는 저마다 달리 행복해 보였습니다.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에 푹 빠져 있을 때쯤. 입장부터 남자 친구에게 짜증을 부리던 여자가 드디어 폭발했습니다. 흐느껴 울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남자의 뒤통수를 보고 앉아있었습니다. 남자의 뒷모습이 애잔했습니다. 급기야 여자는 "집에 갈래"를 선언했고,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옷을 채 챙기지 못해 허겁지겁 뒤따라나가는 남자. 누가 잘못했건 헤어질 이유가 아니라면 저렇게 까지 서로를 곤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평온한 나의 시간에 많은 물음을 던지고 갔습니다. 그 커플은요. 카페에서 휴대폰만 보고 있었습니다. 사랑할 때 그런 순간이 찾아올까 봐 겁이 났던 기억이 스쳤습니다. 더 이상 그 사람과 할 말이 없어지고, 궁금한 것이 없어지면 그땐 어떡하지 라는 생각. 그사람이 내 얘기를 지겨워하면? 내 기분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으면?


그리고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할 때, 그 쓰라리고 조금은 비참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내가 화를 내는 것으로 인해 그 사람의 얼굴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화를 내는 관계가 더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서툴었던 '나'를 계속 발견하는 요즘입니다.



2005년 - 2012년

사실 이런 크리스마스이브가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수능 친 직후)부터 취업 전까지, 내게 크리스마스는 '부모님 가게에서 일하는 날'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연휴'라고 부르는 날이 그랬습니다.


주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M.T를 제시간에 갔던 기억이 없습니다. 머리카락엔 삼겹살과 감자탕 냄새가 그득 베인 채로 숙소에 들어서곤 했죠. 다른 알바도 해봤지만 부모님 가게에 일손이 급하면 내 일을 그만두고 도와야 했습니다. 억울했냐고 묻는다면 네, 조금은 그렇습니다. 퇴근 없는 삶을 살았던 부모님에게 죄송하고 또 죄송하지만 그땐 많이 어렸으니까요. 그땐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크리스마스이브들로 채워진 대학시절이니 데이트는 꿈도 못 꿨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대학시절에 꼭 연애 한 번은 해야겠습니다.



2009년 12월 24일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있던 때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예정되어 있던 날, 나는 대학시절 유일하게 크리스마스를 '집 밖에서'보낸다는 생각에 들떠있었습니다. 가게에서 알바를 안 해도 된다니! 외국인친구들과 파티라니!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게 똑딱이 카메라를 선물했습니다. 돈을 입금하러 나가는 길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이미 자전거 타기의 달인이라 자부했던 터라 한 손에 우산을 한 손에 핸들을 잡고 기숙사를 나가는 순간. 저 멀리 라이트가 켜지며 자동차가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크게 다쳤습니다.


파티 3시간 전쯤이었을걸요. 마침 옆 옆방에 살던 언니가 방에 있었습니다. 남자 친구가 왔었거든요. 다친 소식에 찾아온 언니와 문 앞에서 얘길 하는데, 갑자기 소리가 멀어지더니 하나도 들리질 않았죠. 언니의 입은 뻥긋거리고 있었고요. 언니에게 소리가 안 들린다 정신을 잃을 것 같다고 하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진짜 잠시 정신을 잃었고요.


다행히 언니의 아버지는 한의사였습니다. 처방법을 전화로 지시받은 언니는 내게 약을 먹였습니다. 그 약은 진통제 역할을 하는 한약 이랬어요. 그 약이 없었다면, 어우. 다시 한번 생각해도 내 생애 제일 끔찍한 크리스마스였다고 기억할 겁니다.



다시 돌아와,

오늘 읽었던 책 구절 중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문구가 있어 남깁니다. 오늘은 꽤 괜찮은 크리스마스이브였으니까요. 더 괜찮은 크리스마스를 보낼 테니까요.

나는 태환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과의 만남을 단숨에 형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그 밤의 과음을 후회할 뿐. 태환과 다시 만나고 싶은 건 그 밤의 거친 단면을 조금이라도 다듬고 싶어서이다. 이대로 연락이 끊긴다면 그 단면은 영원히 다듬어지지 못하고 틈날 때마다 내 영혼에 생채기를 내리라.
- 정아은, 모던하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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