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칭기즈 칸

- 부활의 시간을 기다리며

by 차거운


이제 한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중동에서의 미국과 이스라엘 대 이란 전쟁은 쉽게 끝나리라는 낙관을 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일은 그렇다. 사람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상황을 부르면서 예측했던 결과를 벗어나 다른 국면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임을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또 하나의 전쟁 수렁에 빠지는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상황을 밀어붙여 원하는 결말을 이끌어낼 각오와 의지를 지니고 임하고 있는지 머지않아 전 세계가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전쟁은 항상 여러 가지 변수들에 좌우되게 마련이지만 우세한 화력과 무기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를 확신하는 정도와 결의 즉 인적인 사기의 측면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더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이란인들은 분열되어 있을 수도 있고 의외로 결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그걸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이는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문제다.

추구하는 목적이 좋고 바람직하다고 해서 그 수단이 정도를 잃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공자가 이야기한 ‘정명(正名)’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지금 세계는 패권적인 경쟁 속에서 국제적인 질서나 원칙 등이 정면으로 무시되고 힘의 논리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다. 유엔과 같은 국제 기구의 무기력함과 국제법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란 전쟁은 바로 그런 측면이 있다. 선과 악은 전쟁이라는 현실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어 쾌도난마식으로 판단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라고 언급하고 넘어가는 일반 시민들의 희생과 삶의 기반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은 세계 전체의 일상적 삶이 에너지 대란과 맞물려 지진과 해일에 비유할 수 있으리만큼 위기와 혼란에 처해 있다.

며칠 동안 네타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한 이야기가 마음에 맴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징기즈 칸보다 나을 것이 없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말이 불러올 파장을 우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왠지 그 발언에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유교적 관점에 익숙한 우리들의 시각에서 이 발언은 왕도와 패도의 길에 대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적 입장과 연결시켜 고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춘추전국시대의 끝은 무력에 의한 법가적 패도정치를 추구한 진시황의 천하통일로 귀결되었다. 역사는 진시황에 의한 천하통일의 이 위업이 불과 이대에 걸쳐 분해된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알렉산더에 의해 이룩된 페르시아 정복과 그리스적 대제국의 건설은 그의 죽음과 함께 4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로마의 역사와 프랑크 왕국의 건설과 분열, 징기즈 칸의 세계 제국 등등 역사는 수없이 많은 제국들과 위대한 권력들과 정복들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물거품과 같이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그런 지정학적 권력의 이야기들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것이 다양한 민족과 국가의 맥락 속에서 살아온 인간의 삶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고 이해하게 한다.

이 세계의 역사는 힘의 논리에 의해 진행된다고 사람들은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다. 약육강식의 마키아벨리적 지배의 논리가 그 문법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세계이다. 네타야후가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폭력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악인이 선한 사람의 일상과 삶을 붕괴시키려 할 때 이를 제지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면 그 선함이 지켜질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누가 선인과 악인을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또한 그런 물리적인 힘이 절제라는 윤리적 제어 장치와 함께 작동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끊을 수 있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힘일 것이다. 그런 힘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의 막바지를 보내고 있다. 다음 주의 성주간을 보내고 나면 부활절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출애굽의 체험과도 같은 근본적인 경험이다. 그 경험에 대한 믿음 위에 그리스도교는 서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맥락에서 솟아났다. 만약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였다면 그들은 지금 우리와 같은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한 예수’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유대 민족의 영광을 이 지상에서 재현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민족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것일 게다. 이러한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민족과 국가들은 지금도 많고 많다. 왕도정치에 대해서 듣기는 하지만 너무나 우원(迂遠)하다고 여겼던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들의 모습을 오늘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됨으로써 세상을 바꾸고 인간을 구원하는 길에서 실패한 자로 여겨지던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자신의 가르침이 생명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며 부활의 길임을 증명하였다고 믿는 목격자들의 증언 위에 세워져 있고 지금까지 그 희망을 살아내고 있다. 징기즈 칸의 제국은 몇 개의 제국으로 분열하고 중국사에서는 원나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제국들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영원히 오래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개별적인 사람들의 총체적인 삶이 더 오래 지속된다. 그 역사들은 기억 속에서 흘러 다니고 때로 호출되기도 한다. 영광은 영광이되 덧없고 지속되지 않으며 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인간의 죽음처럼 영고성쇠를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인 성취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인간은 모두 공통된 문제들 앞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만으로 우리 존재의 의미가 완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초월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악마는 유혹한다.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나에게 절을 하면 이 세상 모든 나라의 권력과 영화를 너에게 주겠다.’라고 말이다. 구약의 열왕기에 보면 정치적인 힘의 논리를 따라 판단하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하느님은 노여움을 보이셨다. 눈에 보이는 힘만을 믿고 하느님의 계명과 약속을 잊는(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권력자들에게 하느님은 노여움을 터뜨리셨다. 그러니 세상의 지도자라면 눈에 보이는 힘의 논리에 경도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명분과 원칙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겸손함을 갖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 모든 피와 희생과 눈물과 한숨으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영들이 탄원하는 소리가 하늘에 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을 맞이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다. 나는 두렵다.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혀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한숨소리를 들으시는 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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