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할 용기에 대하여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행복> 중 일부
세상은 각박하지만 살 만한 곳인가? 이 물음은 하나이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십인십색으로 달라질 것이다. 저마다 삶에 대한 원초적 기억이 다르고 각인된 세상으로부터 받은 첫인상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 누가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가. 부모님과 가까운 친인척들의 상황은 어떠하였던가. 누가 우리를 이 세상에 초대하였는가? 우리는 환영받았는가? 아니면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고 모멸감을 받게 하였던가? 우리를 있게 한 부모 역시 누군가에게 연약한 자식으로 태어났을 테니 세상의 관계적 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시인 이상은 그의 시 <오감도, 시제2호>에서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라고 그 혼란한 심정을 노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한도 경록도 미정도 이 세상에서 그리 따뜻한 환대를 받지 못하고 어른이 된 존재들이며 스스로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인식에서 어느 정도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우그러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삶이 가능하듯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은 가능하다. 위축된 영혼들이 있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있다. 바깥의 환한 세상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쉽게 나가지 못하는 그런 존재들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한다.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먹을 것 주변을 빙빙 돌면서도 세상의 발길질에 대한 기억이 쉽게 손을 내밀거나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들이 많이 있다. 그런 풍경들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혹은 세상이 볼 수 있는 것은 외부로 드러난 외모와 어눌한 말과 자신감 없이 뒤로 숨는 그런 것들 뿐이다. 그 안에 어느 누구와도 똑같이 당당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뿐이다.
경록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함께 성장했다. 미정은 아버지의 채무와 동생들에 대한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돈을 벌어야 하는 데다 늘 남들의 시선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느끼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고 세상에 맞서기보다는 최대한 안으로 몸을 공글려 숨어드는 태도를 갖고 있다. 신데렐라는 이뻤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을 보고 온 것이 지난 11월이었는데 거기 그림 속엔 어린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외모가 아름답지 않은 한 사람이 거기에 있다. 옛날 궁정에서 어릿광대와 같은 존재를 일종의 오락거리로 곁에 두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잘 생긴 청년인 경록은 외모가 주는 의미가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가치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충실한 마음의 소중함을 삶의 이력 속에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적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존재의 상상적 존재만으로도 삶에 숨통이 트이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에는 그런 인식을 가진 존재들이 정녕 존재한다. 요한은 백화점 소유주 집안의 서자라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난다.
경록은 미정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간다. 미정은 그런 경록의 태도를 믿지 못하고 밀어내거나 물러난다. 요한은 처음에 경록의 태도가 일종의 동정이거나 치기 어린 자기 과시라고 생각해서 막아서지만 경록이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갖고 한편 그 둘의 관계를 자신의 처지를 투사하여 지켜보게 된다. 소소한 마음의 진전들이 있으나 미정은 경록의 마음을 통해 한편으로 자신도 양지에 서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자존감을 서서히 회복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햇살이 위축된 미정의 구속복을 조금씩 벗겨내게 된다. 그러나 두려움이 미정을 떠밀어 직장을 그만두고 본가로 돌아가게 된다. 대학에 입학한 경록은 미정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요한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 시도를 하게 되고 오랜 시간이 걸려 회복된다. 그는 이 영화의 내재적 화자이기도 하다. 요한은 작품 내에도 존재하고 작품 바깥에도 존재하는 이중적인 존재인 것이다. 경록은 미정을 찾아내어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는다. 미정은 처음에 경록이 자신을 잊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알다가 그의 죽음을 알고 그의 마음이 진실된 것임을 알게 된다. 요한과 미정은 경록을 추모하는 마음을 지닌 채 세상에 남겨진다.
이 영화는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박민규의 소설을 몇 편 읽은 적이 있다. 속속들이 다 읽지는 못했고 일부만을 읽었는데 영화 <한국이 싫어서>와 같이 장강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경우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고현학적 사태에 많이 충실한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이모저모를 생각한다.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나 가난한 청춘들의 연애와 삶의 풍경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 편의점과 다양한 일자리의 양식들. 희망을 믿는 사람들이 희망을 지켜내는 법이다. 사랑을 믿는 자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법이다. 동화를 믿는 아이들이 현실을 깨닫게 될지라도 동화의 문법을 여전히 간직하며 살아갈 수는 있다. 마이클 샌델의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처럼 우리 삶에는 돈만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또 가능하면 그런 것들이 많이 존재해야 한다.
영화 <파반느>는 그래도 희망적인 여운을 준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때로는 행복이라는 것을 체감하면서 우리가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학창 시절에 한 번씩은 배웠을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익사회'와 '공동사회'에 대한 것이다. 가족이란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줄 수 있는 원초적이고 본원적인 사회에 해당한다. 그 가족 안에서 지지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 때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건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이 출발하는 지점이 바로 사랑이다. 외모와 재산과 학벌과 기타 현실적인 요소들로 채점표가 매겨진 그런 만남이 아니라 청마가 우체국에서 편지를 쓰는 내내 마음이 부풀어 올랐을 그 심정으로 이해타산을 초월해서 끌려가는 마음의 움직임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공동사회는 그렇게 탄생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런 가정은 아이들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원초적 인식을 제공해 줄 것이다.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훼손되지 않은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빛바랜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거대한 담론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시몬느 베이유의 말처럼 '신이 사라지거나 신의 계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를 마주할 인간이 사라진 것'이라면 인간이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회복하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영화 <파반느>는 그런 점에서 따뜻한 동화라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