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과 함께 가라>

by 차거운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거리를 걷다가 문득 지금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그런 의문이 솟구치는 순간 말이다. 표면적으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불안한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길(삶)이 맞는 거야?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보이는 길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삶의 행로를 통해 가고 있는 길이 겹치거나 서로 어긋나거나 흩어져 혼란한 순간들이 종종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되뇐다. 저희가 길을 잃지 않게 하소서. 제 발이 대지에 굳건하게 발 딛고 서 있게 하소서. 그리고 한 발씩이라도 당신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두려움 없이, 후회함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걸음마 떼는 아이처럼 그렇게 신뢰심을 잃지 않으면서 걸어갈 수 있게 하소서. 기도하는 순간들이 많다.

요즘 성당이든 학교든 주민센터든 가릴 것 없이 하나의 단순한 역할만 하게 되질 않는 것 같다. 성당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길을 찾고 함께 걸어가는 곳이라서 그런지 삶의 온갖 영역에 걸쳐 관심을 갖고 신자들의 건강한 영육 간의 삶을 북돋워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그러하고 학교는 학업과 진학 등 전통적인 영역 외에 급식에서부터 아이 돌봄과 복지적인 차원의 영역까지 최대한 수렴하여 기능을 확장하고자 하는 정책적 요구 앞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행정 역시 복지와 시민적 삶의 제반 영역에 걸쳐 깊숙이 관여하고 또 그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이 영화를 나는 성당에서 일종의 문화적 나눔의 사목적 배려 속에서 보게 되었다. 미사도 보고 미사 후에 팝콘과 음료까지 제공하면서 영화관의 분위기를 내면서 보여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이 우스갯소리로 자신이 문화센터의 센터장이 된 것 같다고 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혼자 실실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교회는 참 아름답게 피어나는 젊은이와 같이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있다. 살면서 만난 교회의 사목자와 수도자들에 대한 기억도 좋은 것만 생각이 난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는 세상의 주류가 아닐 때 더 예언자적 목소리가 살아나는 것 같다.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 즉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누군가에게는 성장소설과 같고 누군가에는 자신의 삶을 다시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것처럼 재정립하는 그런 과정의 경험을 길 위에서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칸토리안 교단의 수도사들 이야기라고 하여 처음에는 조금 심각한 이야기일까 걱정도 했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알제리에서 무장 세력에게 살해당해 순교자가 된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신과 인간>이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와 같은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다가 죽음을 맞은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이야기와 같은 영성적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닌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할 거리들은 상당히 많다. 우리와 같은 연약하고 겁 많은 양 떼들에게는 나름대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도 모두 신에게로 가는 다양한 길 중의 하나일 수 있음을 다독이며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진심을 갖고 살아가라고 격려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마음속으로 막연한 희망을 품고 기도하게 된다. 어떤 사람도 죽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며 살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전쟁조차 감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 상대방을 파괴하고 절멸하고자 하는 기세로 전쟁에 임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평화로운 삶과 번영된 일상과 의미로 가득한 삶을 희구하고 있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각이 좀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그 차이가 분열을 일으키고 결국 파괴적인 대립을 초래하게 된다.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칸토리안 교단에 속한 수도원이 이탈리아와 독일에 단 두 곳이 남았는데 이 영화는 독일 수도원에 속한 네 사람의 수도자가 겪는 경험을 풀어나가고 있다. 파문이라는 말을 들으면 교회 역사의 그 긴 과정에서 치열하게 벌어졌고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신학적 교리적 갈등과 분열을 떠올리게 되어 마음이 편치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의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핵심들은 처음부터 완결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유대인의 존재가 출애굽이라는 체험을 바탕으로 정초 되었듯 그리스도교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체험과 믿음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적인 예수와 신앙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그 오랜 신학과 교회적 고백과 실천의 기억과 함께 진행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오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잘 지켜가야 한다.

그레고리안 성가와 같이 인간의 목소리가 신에게 가장 적합한 예배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예배의 방법과 수단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아마도 성가를 통한 예배 행위만을 비타협적으로 강조한다면 이는 문제가 될 수 있겠다. 비오 10세회가 교회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갈등을 빚는 이유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각 나라의 언어로 미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신자를 등지고 미사를 진행하던 방식을 신자석을 마주 보고 진행하도록 하는 전례적 개혁을 거부한 채 라틴어 미사를 고집하는 데서 갈등이 생긴다고 알고 있다. 나주의 윤 율리아에 대한 교회의 문제제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처음 나주의 피 흘리는 성모님 사진을 본 기억이 85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때 솔직히 많은 충격을 받았고 꿈에서도 그 사진의 모습과 같은 이미지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는 잊고 살았는데 간간이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이 교회의 소식지들을 통해 전해지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나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보였다. 지난번에 파티마 성모 발현 성지에 들렀을 때 그곳이 주는 편안함과 고요함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앞으로 가게 될 루르드 역시 그런 곳이 아닐까 한다. 과달루페의 성모님에 대한 느낌도 그렇다. 교회의 교도권에 순명하지 않은 성인 성녀는 없었다.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은 사라질 것이고 진정 하느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굳게 남아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

원장 신부의 죽음으로 남은 세 수도자는 이탈리아의 형제 수도원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된다. 이 항공 여행의 시대에 걸어서 이탈리아로 간다는 세 사람의 모습은 이상하다. 중세풍의 수도원에서는 자연스러울 그들의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이 세상 속에서는 참으로 낯설고 기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한 여성이 나타나서 그녀의 차를 얻어 타고 그다음에는 기차를 타기로 한다. 타실로는 오래전에 떠나온 어머니를 만나고 벤노 수사 신부는 신학교 동창을 만나 회유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수도원에서 성장한 타실로는 <빵과 포도주의 마르셀리노>의 주인공처럼 순수한 영혼인데 자신을 태워준 여인의 향기에 취해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대자연의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성가는 참으로 아름답다. 오로지 인간의 목소리만으로 대자연 풍경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노랫소리에 그들의 고집이 이해가 될 만도 하다. 이 대목에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생각들을 얼핏 떠올리게 되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알아보고 싶은 부분이다.

절실하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과도 같이 사실 모든 길은 신에게로 통한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의 삶은 신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신과 함께 신에게로 가는 것'이다. 신은 우리의 종착점이겠지만 우리의 믿음과 함께 우리는 이미 임마누엘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와 '아직' 이 사이에 우리의 삶이 놓여 있음을 기억하자. '이미' 우리는 신과 함께 있으며 '결정적으로' 신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 우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지않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보고 싶었던 정의와 사랑을.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과 우리가 상처 주었던 모든 것들을 모두 보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사랑할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하며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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