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속았수다

- 가족이라는 전설

by 차거운

나는 중독자다. 모든 중독은 삶의 균형을 파괴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런 중독증세로부터 벗어나고자 평생 노력하고 있다. 우선 담배는 군대시절 배급되는 것을 남주기 아까워서 피다가 제대하고 한두 해가 지난 후 끊었다. 니코틴의 독한 냄새가 견딜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알코올의 경우는 상당히 오랫동안 끊기 쉽지 않았지만 오륙 년 전부터 끊었다. 술을 먹고 몸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살다가 죽고 싶어서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끊기 힘든 것이 있다. 두보의 한시 '강촌'에 나오듯 "많은 병에 오직 구하고자 하는 것은 약물이다"라는 말처럼 약이 많아진다. 혈압약을 비롯해서 여기저기 시들한 육체는 약을 요구한다.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어른들 말씀마따나 일정한 연령을 지나면 약으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다. 게으른 성품에 운동을 꾸준히 자주 하지 못하고 벼락공부하듯 몰아서 하고 그 나머지는 숨만 쉬고 사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반성할 일이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또 다른 중독 증세가 있다. 활자 중독, 서사 중독이다. 어디를 가든 뭔가 읽을거리를 갖고 있지 않으면 좀 불안하다. 무언가를 읽고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영화나 소설 같은 서사에 대한 중독 증세가 심각하다. 어릴 때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에 가서 주말 영화까지 보고서야 돌아오곤 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나 민폐를 끼친 것일까. 그리고 만화방에서 보면 만화들, 드라마들, 소설들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장길산, 토지,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겨울 골짜기, 해리포터 연작, 반지의 제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등등.

퇴직하고 나니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허리가 아파서 자주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읽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무료하고 공허하다.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일 것이다. 의미 있게 살려고 하는 강박적 태도가 자꾸 무언가를 하도록 하고 읽도록 하는 등 자꾸 다그친다. 순순하게 멍 때리면서 보내는 시간도 좋은 것일 터인데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한 셈이겠지.

각설하고, 요즘은 드라마도 공중파 위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유료 채널을 통해 스트리밍 서비스로 구독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 나의 경우는 이런저런 구독 서비스에 가입하지 않고 살고 있다. 그런데 신문을 비롯한 미디어에서 가끔 장안의 화제가 되는 드라마나 영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오징어 게임>이라든가 또 다른 것들 말이다. 이 또한 일종의 유행이자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공통적인 담론의 계기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를 보지 않거나 읽지 않으면 뭔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고백하거니와 나는 아직 <오징어 게임>을 보지 못했다. 이는 게으름과 함께 조금 초연하게 살려는 의지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가끔 뒷북을 치듯 유행이 다 지난 후에 불이 붙어 역주행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 <신병>이라는 드라마를 그렇게 보았고 이제 이야기하는 <폭삭 속았수다> 역시 그렇다.

지난 3월에 제주에서 올레길을 걷고 있을 때 합류했던 옛 동료가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하는 것을 보고도 그러려니 했었는데 지난 5월 중순에 처조카 결혼식에 참석하러 대구에 갔다가 넷플릭스가 제공되는 숙소에서 <폭삭 속았수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처형과 함께 1화, 2화 정도를 보고 나서 점점 특유의 중독적 몰입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결혼식을 마치고 귀가한 이후에 아들의 도움을 받아 나머지를 몰아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조카 결혼식 장소가 바로 대구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동 성당이었는데 이곳이 또 드라마의 결혼식 촬영장소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은 또 장인어른이 장례미사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삶이란 이렇게 다양한 경험과 기억들이 겹치고 덧입혀지게 마련이다.



1. 제주라는 삶의 공간


어딘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제주라는 공간은 사실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와 현지 주민의 관점에서 체감하는 기억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 강원도 태백이라는 광산도시의 기억이 그렇듯 제주라는 공간은 척박하고 힘든 삶의 환경을 아로새긴 그런 곳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당하고 정난주 마리아가 관비로 쫓겨간 곳이며 역사적 아픔과 고통이 켜켜이 쌓인 곳임과 동시에 살아내기 위해 자연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그런 공간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삶과 4.3의 진행과 그 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차별과 상처의 봉인을 강요당한 곳이기도 하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사가 증언하는 아픔의 기억이 낙인처럼 아직도 생생한 곳이다.

드라마는 바로 여기를 무대로 한다. 50년대와 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90년대 그리고 1997년 IMF에 대한 기억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오고 간다. 도동이라는 공간은 부산으로 서울로 이어지면서 우리 모두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해녀들의 삶에 대해서도. 김녕의 해녀박물관에 대해서도 기억을 소환하면서.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해녀박물관에 가서 보았던 내용들이 드라마로 인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게 되었다. 드라마는 제주의 역사적 상처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제주의 삶에는 그런 여파가 감지되기도 한다.



2. 부모라는 존재와 가족의 전설


리처드 도킨스 식의 현대 유전학이 말하듯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자기 유전자에 대한 복제와 전달에 대한 욕구로 의인화해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은 그런 메마른 이해를 뛰어넘는다. 가족의 사랑은 초월적 성격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살민 살아진다.'라는 대사가 인구에 회자된다. 딸과 아들의 구별이 팽배하던 시대에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등져야 하는 어미의 마지막 눈길은 나와 같은 울보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는 해녀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생각할 때 이 삶은 참 비루하면서도 절박한 그 무엇이다. 인간의 배고픔은 실존적이고 윤리적 도덕적 한계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다. 누구도 이 요구에 대해서 비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비 둥지에서 어미 제비를 향해 입을 벌리고 목젖을 드러내고 있는 제비새끼 다섯 마리의 사진을 본다. 얼마나 절박한 몸짓인가. 그리고 얼마나 무기력한 호소인가. "자식이 빵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있겠느냐?" 신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멀리 있지 않아 보인다.

환과고독을 이름하여 사궁민이라고 한다. 홀아비와 과부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지금도 그렇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미를 잃은 새끼는 돌봄을 받지 못해 죽는다. 인간의 세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리버 트위스트>나 <소공자>, <소공녀>는 바로 이런 설정을 기반으로 한다. 죽으면서도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모정은 처절하다. 코흘리개 한 살 이웃 오빠가 이런 신데렐라와 같은 처지인 여자아이를 평생 지켜보며 함께한다. 백마 탄 왕자는 없다. 기억을 공유한 이웃 오빠가 첫사랑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세상에서 무기력하다. 식모와 같은 존재가 되고 천덕꾸러기가 되고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많음에도 허락된 것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인생역전은 없다. <소공녀>와 같은 반전은 없다.

부산으로의 탈출. 고등학생들의 신혼여행. 여학생은 퇴학. 남학생은 정학. 대학의 꿈, 문학소녀로서의 꿈은 현실에서 바스러진다. 그것을 지켜보고 같이 아파해줄 이웃 오빠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비정하지만은 않다. 이모들은 죽은 동료 해녀인 여주인공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 아이의 바람막이가 되고 셋방 주인인 노부부는 항아리의 쌀을 티 안 나게 채워준다. 배를 장만하는 사연과 그 후의 삶은 자식의 이야기가 된다. 가난한 집안의 머리 좋은 아이. 엇나가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 살아가는 모습. 부모들의 간섭이 아이들의 사랑을 파괴하는 모습을 본다. IMF의 시련도 보이고. 삶은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그러나 가족은 여전히 삶이라는 물 위에 떠 있다. 그리고 죽음과 추억과 삶이 남는다.


드라마를 보면서 60대에 다다른 인간은 운다. 누구의 삶인들 회한이 없겠는가. 부모와의 기억이 없겠는가. 살기 힘들어서 삶을 포기하는 사연들을 종종 접하면서 누군가 우리가 무너지지 않게 그렇게 붙들어주기를 기도한다. 내가 너를 붙들어 살게 하고 네가 나를 붙들어 위로해 주며 살아낼 용기를 갖도록 다독여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회적 진화론은 적자생존을 말하지만 세상은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 살아갈 가치를 가진 존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그것은 신의 몫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며 함께 걷자고 곁을 내어주기를 바란다. 제발 누구도 자식의 미래를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명분으로 신의 자리에서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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