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제 기술 시대의 삶과 자기 정체성 문제
일찍이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기술과 예술 작품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한 바 있지만 이제 우리는 인간 복제에 대한 기술적 가능성과 그 위험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유일성이 예술의 아우라를 뒷받침하던 시대를 지나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 차별성이 무의미해진 현재의 상황은 인간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고 클론 복제 기술의 발전은 유전적으로 똑같은 존재를 마주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와 매혹을 느끼는 나르시스의 경우처럼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복제하여 살아가게 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영화 <미키 17>의 상상적 허구를 뒷받침한다. 물론 많은 부분에서 논리적 비약과 단순화가 전제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영화 <미키 17>을 통해서 몇 가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 과학적 검토를 가하는 것은 나의 관심과 역량을 벗어나 있기에 <인터스텔라>의 과학적 근거를 따지듯 이 영화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영화의 서사가 전제하고 있는 출발점을 독자나 관객의 입장에서 일단 수용한 채 나의 관심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고자 한다.
1. 자아의 고유성과 이전의 문제
석가모니의 탄생 일성을 떠올려 보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또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대해서도. 육체를 복제하는 것은 그 육체를 기반으로 하여 일정 기간 형성된 자기의식의 총체성을 이전하는 것보다 수월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누적된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이 벽돌처럼 생긴 저장장치에 옮겨지고 다시 복제된 미키에게 이전된다. 여기서 그 기술적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 생산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영화에서 안드로이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도 결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이건 한 개체가 복제된 몸을 통해 영속적으로 살아가는 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현재적 삶을 견제 혹은 규제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동력이 아니었나. 인간의 심장을 저울질하는 이집트 신화의 심판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더라도 유한성은 인간의 실존적 회한의 원천이자 삶의 엄숙함과 가치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배우가 죽음을 연기하고 다시 살아나 일상으로 돌아가듯 한 개체가 죽음에 대한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다시 살아간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부활한 삶이 되지 않을까. 다만 그 부활은 원래의 삶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모든 인간이 이렇게 죽지 않는다면 새로 태어나는 사람은 반가운 존재가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세상은 물리적으로 비좁은 공간이 될 것이고 누군가는 재생의 삶을 허락받지 못하고 죽고 누군가는 계속 살게 될 것이 아닌가.
영화에서 미키 17은 미키 18을 마주하게 된다. 나르시스조차 물속에 비친 자신의 영상이 아니라 자신 앞에 실재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공격적인 태도로 자신의 유일성을 주장하게 되지 않을까. 이는 단순한 쌍둥이가 아니기에 심각한 자기 분열을 초래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복제물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심길 경우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보라. 이 경우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상상적 서사물에서 정신과 육체가 뒤바뀐 상황에 대해 그리고 있는 경우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텐데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로마의 개선장군이 탄 전차 뒷자리에서 노예가 속삭였다는 말을 기억하자.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은 인간의 가장 큰 숙제이자 고민거리이지만 인간적 차원의 불멸은 시몬 베이유의 표현에 따르면 중력의 법칙에 대한 거부일 터인데 이는 이 세계의 차원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영역에서 비롯되는 움직임이어야 할 것이고 은총의 영역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훈련할 것! 자신을 투명하게 비울 수 있도록 노력할 것! 그리고 그 투명한 눈과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진정성 있게 살아갈 것! 그건 마치 불가의 '심우도'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2.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
영화 <미키 17>에서 미키가 지원한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은 사실상 실험용 모르모트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새로운 행성을 찾아 이주한다는 머스크적 발상도 대항해시대의 식민지 확장에서 보듯 사회적 억압의 온존과 확장의 측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쫓겨 지원한 직업은 사실상 현재 암암리에 일어나는 범죄인 장기매매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인간의 공간적 확장으로서의 우주 진출은 식민지 시대의 복제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영화 <기생충>과 <설국열차> 등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을 여기서도 발견할 할 수 있을 것인데 인간이 현재의 수준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한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원죄처럼 인간 역사를 따라 움직일 것이기에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역시 불가결한 측면이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사회적 차원의 근본 문제이므로 정치적인 차원의 해법이 있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는 많은 모순과 불합리한 차원이 노정되겠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고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논리가 얼마나 많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이미 목도한 바 있지 않은가. 거짓 메시아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실속이 없는 구호나 거짓말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쉬운 해결책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가치는 부여된 것이기에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삶도 역시 그렇다. 삶은 소여 된 측면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그것을 차단하거나 조작하려는 시도를 삼가야 한다. 죽음 역시 그렇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가면서 의미를 발견해 나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닫힌 계일 수도 있고 열린 계일 수도 있다. 다만 우리 스스로 닫고 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이 상황을 이해하도록 하자. 그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과 공감의 태도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 삶과 죽음은 누군가에게 저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선물일 수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삶에 마음을 열고 죽음에도 마음을 열자. 비약이 가능하려면 외부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의 상황처럼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한편으로 기다림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