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

골든이어즈 주립공원 - 노스비치 캠핑장 (2024년 8월 16일)

by 그래도 캠핑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한 번의 대형사고가 터지기 전에 29번의 작은 사고들이 발생하고, 그전에 300번의 소소한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미국의 보험회사에 근무하던 허버트 하인리히가 사고 통계를 연구하면서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재난이나 산업재해, 심지어 전쟁을 방지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사소한 조짐이라 할지라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이런 소소한 사건들을 대형 사고의 징후로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영화 속에서야 (특히 공포영화) 이렇게 사소한 조짐에 일일이 겁을 먹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주인공의 걱정이 나중에 가서는 결국 다 들어맞는 것으로 드러나는 클리셰가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어디 그런가? 애초에 인생 게임이란 시작부터 불확실하고 소소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며 진행되는데. 어떤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 이게 나보고 지금이라도 그만두라는 예언인가?' 하며 포기를 했다가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게다가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밥벌이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때마다 작은 조짐에도 주저하고 포기를 하는 것이 과연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나약함이나 게으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많은 것이다 (여담이지만, 아시아권 국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창의력이나 상상력, 그리고 소통능력이 떨어짐에도 북미, 유럽 국가에서 실제 사회생활을 할 때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릴 적부터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해내는 훈련이 되어서 그렇다는 최근 연구가 있습니다. 슬프지만, 사실입니다).


여전히 싸움에 지기 싫어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나로서는 더 그렇다. 저런 사소한 조짐을 괜히 시비 털리는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포기를 하는 걸 지는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도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심박이 145가 넘고 물에 들어가기만 해도 숨쉬기가 답답한 적이 많았지만 그냥 F코드라고 생각했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가장 큰 장벽이었던 F 코드. 손가락에 쥐가 몇 번 나고 수많은 삑사리를 거치고 나서도 나의 F코드는 40년째 여전히 꼴사나운 채 본인에 대한 너그러움만 점점 커졌지만, 그래도 F코드를 짚고 나서 흉내 낼 수 있었던 노래가 화악 넓어졌던 걸 기억하면, 심박이 높게 뛰고 숨쉬기가 불편하다고 해서 수영을 금방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황장애 따위, 17대 1로 덤벼도 맞서 싸워주겠어...라는 심정으로 묵묵히 수영장에 다녔다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어서 이제 안 다닙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이번 캠핑만큼, 가지 말라는 조짐이 많았던 캠핑도 없었던 것 같다.






회사 사정으로 예년만큼 많이 못 가게 된 캠핑. 그래도 가능한 일정마다 예약 시도를 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번 8월에는 캠프 사이트를 못 잡았었다. 그나마 잡은 것도 8월 중순 주말에 워크인 캠프 사이트. 풍경은 좋은 곳이지만 차를 밖에 세워두고 짐을 날라야 하니 좀 귀찮아졌더랬다. 지난 7월 캠핑에서 폭염에 어지간히 고생을 했었고, 녹조류 때문에 몸에 알레르기가 생긴 것이 여전히 낫지 않아서 더 그랬다. 그래서 8월 캠핑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는데, 갑자기 골든이어즈 노스비치 캠핑장에 있는 더블 사이트가 떴다고 공지가 왔다. 아... 더블 사이트는 사이트 두 개 가격을 내야 하는 건데... 이걸 하는 게 맞나? 게다가 노스비치에는 수세식 화장실도, 샤워시설도 없다. 때문에 좀 싸긴 하지만 (2025년 기준, 일박에 $23. 샤워시설이 있는 주립공원 캠핑장은 일박에 $35) 그래도 무척 불편할 것 같아 망설였다. 하지만.. 사이트를 보니 캠핑장 가장자리, 숲 쪽으로 딱 붙어 있는 곳이라 꽤 탐이 난다. 프라이버시도 좋고 조용할 것 같다. 또 이렇게 그냥 보내면 8월 달에는 캠핑을 전혀 안 하고 지나가겠구나 싶었다. 그게 뭐라고.


예약을 하고 나니, 겸사겸사, 지난 몇 주간에 걸쳐 수리를 마친 트레일러 상태도 체크를 해야겠다 싶었다. 더블 사이트라 지인 가족도 초대를 했더니 주저 없이 온다고 한다. 잘됐다. 같이 술 마신지도 오래된 지인인데. 그렇게 뭘 먹을지, 뭘 할지 준비를 하고 있다가, 출발 3일 전쯤? 사소한 일로 아내와 대박 싸웠다. 그리고 받은 한 통의 문자.





허이구우. 증말... 뉘에뉘에. 그동안 같이 캠핑 다녀 주셔서 무지무지 황송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간만에 솔로 캠핑으로 바꿔 준비하게 되었다. 트레일러 대신 텐트를 챙겼고, 바닥에 까는 매트도 한 개만, 음식이나 주류들도 일인분을 챙겨가면서. 불평 안 듣고,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도 즐기고, 부엌이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걸 보며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어지고... 그렇게 이틀 동안 평온한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잘못은 내가 했지. 평온한 생활도 좋지만 잘못에 대한 건 사과를 해야겠다, 싶었던가? 아무튼 출발 당일, 회사 근무를 마치고 집에 와서 화해를 하고, 또 급하게 추가로 아내의 캠핑짐까지 챙겨서 떠나게 되었다.


캠핑장 입구에서 체크인을 하는 동안 캠프 파이어나 촛불처럼 금방 끌 수 없고 불씨가 날릴 수 있는 오픈파이어가 금지되었다는 얘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비씨주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 산불 때문에 더욱 강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곰 얘기를 안 하네? 그놈의 곰 두 마리 레퍼토리가 얘네들도 이제 지겹나? 하며 별생각 없이 노스비치 캠핑장으로 들어갔다. 아... 그런데 식수가 없다. 샤워시설이 없었던 건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수돗가가 없었다는 건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길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몰랐을까? 결국 다음 날 아침에 근처 골드크릭 캠핑장에 가서 물을 한가득 떠 와야 했다. 이날은 낮에 30도까지 올라갈 예정. 식수를 든든하게 확보해 두는 것이 뭣보다 중요했다. 이 정도로 시그널이 반복되었으면 알아채릴 법도 했건만, 이번에도 무시하고 굳이 차를 몰고 아래로 내려가 물을 떠 오는 걸로 극복했다.


달고나는 달고나


로워 폭포 (Lower Fall) 산책로


밤늦게까지 마시고 떠들고, 달고나 만들고 하며 놀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캠핑장 근처 폭포까지 지인네 강아지 '조이'와 함께 산책을 다녀왔다. 누룽지를 끓여 해장을 한 후 자리에 앉아 지인들과 또 배우자 험담을 당사자 앞에서 화목하게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클랙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1~2분간 끊임없이. 이게 뭔가? 이 나라에서 이 정도로 클랙션을 울릴 일이 뭐가 있을까? 잘 들어보니 차량 알람 소리와도 섞여 있다. 사고가 났나? 노스비치 캠핑장은 말 그대로 해변과 가까이에 있어서 여름철 낮에는 대부분의 캠퍼들이 호숫가로 내려가 놀고 있을 텐데... 우리라도 가봐야 하는 건가?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다 보니 소리가 멈춘다. 일은 잘 해결이 되었나? 도대체 뭐였던 거지?


지인들이 이날 오후에는 밖에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점심을 같이 먹는 대신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팔라펠 랩. 지중해 지역이나 중동 지역에서는 매우 대중적인 도시락으로, 병아리 콩과 큐민 베이스의 반죽을 올리브기름에 튀긴 후 피타 빵에 토마토, 오이, 생양파를 놓고 타지키 소스와 허머스를 얹어서 싸서 랩으로 싸서 먹는다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56896). 개인적으로는 채식요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데, 큐민의 독특한 향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다. 중동 사람 겨드랑이 냄새 같다는 얘기까지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이 친구가 채식주의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소개해줄 겸 도시락으로 준비했었다.


반죽을 만들어 10분 정도 불린 후, 완자를 빚어 기름에 던지고 있는데, 갑자기 공원 관리인 한 명이 트럭에서 내리더니 잔뜩 흥분한 채 뭐라고 한다. 곰이 다닌단다. 이 곰은 사람을 안 무서워해서 사람이 있어도 그냥 사이트로 들어온단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지만 순하지는 않단다. 아이스 박스 여는 법도 잘 안단다. 지금 요리 중인 건 알지만 빨리 마무리한 후, 음식 냄새나는 모든 걸 차 안에 넣고 잠가두란다. 차 문도 열 줄 아니까 꼭 잠가두라고, 순식간에 갱스터 랩처럼 속사포로 퍼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서둘러 지인의 강아지를 차로 먼저 옮길 때까지도 현실감이 없었다. 아이스 박스도 열고 차 문도 열 줄 안다고? 그럼 왜 곰을 하고 있지? 아니, 정말 곰 맞아? 곰의 탈을 쓴... 뭐 이런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계속 요리를 했다. 어쩐지. 보통 캠핑장 들어올 때 곰에 대한 경고를 한 번씩 받는데, 이번엔 그냥 산불 얘기만 하더라니. 이제 와서 뒷북을 때리는구먼, 또. 이러면서. 이때까지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친구들 몫의 팔라펠 랩 도시락을 만들어 건네주고, 나머지 반죽을 다 튀기고 있는데, 다른 공원 관리인이 트럭을 타고 또 나타난다. 바로 조 앞에 곰이 있단다. 그리고 또 똑같은 소리. 지금 요리 중인 건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한 한 빨리 마치고 차에 넣어두란다. 마침 튀김은 다 마친 상태였다. 이쯤 되니까 좀 불안해졌지만, 그렇다고 테이블 위에 먹을 걸 남기고 달아날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이 되어 친구들은 불안한 마음을 남기고 먼저 사이트를 떴다. 아놔, 하필 이런 날 트레일러를 안 가지고 오고 텐트 캠핑을 해서... 우리도 서둘러 음식을 다 챙겨 차 안 아이스 박스에 다시 넣고, 프라이팬에 기름도 스토브에 기름도 닦아서 치운다. 가능한 한 냄새가 사라지도록 에탄올로 기름기를 박박 닦아낸다. 어느 정도 테이블이 정리가 된 상태에서 갑자기 아내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사이트로 곰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야생동물을 대하는 북미 사람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인데, 이는 좀 심하게 말하면, 그 옛날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침략하던 때의 정서와 닿아있다. 상냥한 얼굴로 나타나서는 중남미의 모든 황금을 수탈하고 그들의 문화를 말살하던 그때. 그러고 나서 제국주의의 약육강식을 반성한답시고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거리두기가 되었다. "원주민으로서 당신들 법과 문화는 존중하겠다. 당신들 재산도 인정하겠다. 하지만 우리도 여기서 살고 싶다. 그리고 지금부터 긋는 이 선 밖으로 나오면 우리 법을 따라야 한다. 반항하면 죽인다"는 강짜를 부리면서. 그렇게 미국과 호주, 캐나다에는 원주민 보호구역이라는 걸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 원칙은 야생동물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물론 인간들이 마음대로 정한 법이고, 야생동물이 그걸 이해할 리 없겠지만, 인간들은 야생동물의 영역으로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고, 야생동물 역시 인간이 사는 곳으로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 물론 모르고 인간에게 다가오는 야생동물도 있겠지만 이럴 때는 겁을 줘서 쫓아내야 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인간 영역으로 자꾸 들어오는 야생동물의 말로는 결국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 캠프 사이트에 음식을 둔 채 잠을 자거나 자리를 뜨는 행위는 결국 야생동물을 죽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지난 2022년 여름, 골든이어즈 골드크릭 캠핑장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이 때는 엄마와 새끼 곰이 캠핑 트레일러 문을 열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결국 캠핑장을 닫고 예약을 모두 취소한 후, 야생동물 관리관을 불러서 추격 사살했다고 한다 (https://bc.ctvnews.ca/b-c-park-set-to-reopen-after-problematic-bear-caught-killed-1.5945961). 엄마 곰 입장에서는 단지 자기 새끼를 먹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만든 세상의 법은 아무리 번드르르한 수식어를 단다고 하더라도 인간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법인 것이다.







남편이 열심히 클랙션을 누르는 동안 건진 아내의 사진


사실 곰을 처음 본 순간 든 생각은 '귀엽다'였다. 뒤뚱뒤뚱, 어슬렁어슬렁. 조 위에 사진에는 좀 크게 나왔지만 기어 다니는 덩치가 내 허리 정도밖에 안 올 것 같았다. 그래도 차열쇠에 달린 패닉버튼이 작동이 안 되어 신경질을 내던 아내를 보고 있자니, 차 문을 열고 직접 클랙션을 울려야 할 것 같았다. 귀엽지만 쫓아내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러고 보니 좀 아까 어디선가 클랙션 소리가 계속 났었지. 이제야 뭔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 엉? 근데 그때는 자동차 알람 소리도 났었는데, 곰이 잠겨있는 차를 공격한 건가? 앗!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내와 함께 차 조수석으로 몸을 구겨 들어갔다. 클랙션에서는 손을 떼지 않았지만, 곰은 그 정도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새 식탁 위로 올라가 그 위에 남아 있던 것들을 하나씩 맛보고 있었다. 먼저 기름통을 한 입 하더니 곧바로 내뱉고, 브리타 정수물통도 한번 갖고 놀더니, 그다음에 훈증식 모기향 매트를 먹고 나서는 화들짝 놀라 달아나 버렸다. 으응? 저렇게 독한 걸... 저만한 곰이 화들짝 놀라 자빠질 만한 걸 그동안 모기 쫓는데 쓰고 있었던 건가?


저 멀리 숲 속에서 아직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곰에게 욕을 한바탕 해주고는, 식탁 위 음식 흔적들을 마저 치웠다. 곰 입이 닿았던 기름과 물통은 버리기로 했다. 우리도 캐나다에서 캠핑을 다닐 만큼 다녔나 보다. 살다 살다 곰이 우리 사이트에 놀러 오는 상황을 다 겪게 되네. 이 정도 겪고 나면 당장 짐 싸서 집에 갈 생각을 해야 할 텐데, 이 정도 시그널을 받았음에도 이때까지는 캠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곰한테 지는 거라 생각했나? 아내도 나도 그냥 최대한 사이트를 깔끔하게 청소하고, 아래쪽 해변에 한번 갔다 와보기로 한다. 멍청하게도 번개는 같은 곳에 또 떨어지지 않는다는 미신을 곰에게 대입했다. 번개가 되었든 곰이 되었든 간에, 그들이 우리 집 주소를 알고 있는 게 아닐진대. 이 와중에도 나는 글감이 생긴 걸 좋아하고 있었던 게 들켰는지 아내에게 왜 자꾸 실실 웃고 있느냐 한 소리 듣게 되어서, 되려 "으이구 그 망할 놈의 곰 새끼 때문에 낮잠도 못 자고 이게 뭐야.." 하며 되려 큰소리로 투덜대기도 했다.


천천히 캠핑장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빈 사이트가 무척 많았다! 죄다 해변으로 놀러 갔는가 보네. 사람들이 많이 없으니 곰이 아무래도 활개치고 다니기 좋았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빈 사이트마다 녹색 경고 티켓이 놓여있었다. 만일 음식 냄새가 나는 물품을 방치한 채 캠프 사이트를 비울 경우, 공원 관리인에게는 그 물품을 압수하고, 심하면 캠퍼들을 쫓아낼 권한이 있다. 핫핫핫. 저 사람들 사이트에 돌아오면 깜짝 놀라겠는걸, 따위의, 곰을 만나고도 살아남은 생존자의 자부심을 가지고 캠핑장 구경을 좀 더 하다가 해변으로 제법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가 보았다.


아. 오늘 30도까지 올라가는 날씨라더니, 정말 덥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도저히 카약을 탈 수 있는 날씨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전날 밤의 숙취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같았다. "호수에서 수영 좀 하다가 낮잠 자고 집에 갈까?" 하는 아내의 제안이 그리 반갑지는 않다. 일단 이 더위에 저 경사길 따라 다시 올라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수영복을 입기 위해 그걸 한번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온몸으로 부정적인 아우라를 지독하게 내뿜고 있었더니, 아내 역시 지금은 일단 잠깐 발만 담갔다가 다시 올라가잔다. 낮잠 좀 자고, 해 좀 지고 나면 다시 와보자는 말도 잊지 않는다. 미지근한 호숫물이 종아리를 간질거렸고, 강렬한 햇빛을 받아 바닥까지, 그 위 송사리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숙취에 비탈길을 따라 올라오고 나니 급허기가 왔다. 아까 그 난리를 겪고 만든 팔라펠을 어떻게든 먹어야겠다 했더니, 아내가 결사 반대한다. 곰을 또 유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정 먹고 싶으면 음식을 들고 다른 사이트에 가서 먹고 오란다. 아, 그 쪼맨한 곰 새끼, 붙으면 이길 것도 같던데...라고 허풍을 치려다가, 바로 엊그제까지 했던 쌈질에 지쳐있었던 터라 그냥 선선히 아내 말을 듣기로 한다. 그늘에 걸어놓은 해먹에 몸을 던져 일단 눈을 좀 붙여야겠다. 흔들흔들, 출렁출렁, 나뭇잎을 비비면서 선선한 바람이 흘러들어 오니 잠이 소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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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아놔. 띠바. 이런 미친 곰 새...


화딱지가 나서 두꺼운 나무 기둥을 하나 집어던졌다. 곰에게 던진 건 아니고, 주변 나무에 맞춰서 큰 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래도 뭐. 클랙션에도 꿈쩍 않는 곰이 뭐 얼마나 놀라겠어. 그래도 뭔가가 자기 쪽으로 튕겨 들어오는 걸 보고 달아나긴 했다. 그게 아니면 그리웠던 식탁이 텅 비어서 에탄올 냄새만 나는 걸 확인하고 그냥 간 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거기에 한시라도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남편이 낮잠 자고 일어나면 같이 수영할지도 모르겠다는 아내의 기대도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팔라펠을 꺼내 먹으려고 했던 게 아찔하다. 내가 만일 그걸 먹고 곰이 또 나타났으면 남은 평생 얼마나 구박에 시달려야 했을 것인가?


아내가 텐트 안에서 침구류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밖에서 사주경계 및 차 내부에 빈 공간을 먼저 확보했다. 아까 급하게 정리하느라 차 안으로 정신없이 마구 쑤셔 넣은 탓이다. 그런 다음 해먹도 걷고, 텐트 플라이도 걷는다. 이럴 때마다 생각이 드는 건 우린 제법 손발이 잘 맞는 게 아닌가 싶다. 위기를 겪을 때만 친해질 수 있는 부부란 과연 좋은 관계인가? 아니면 그냥 전우인가? 정신없이 짐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근데, 팔라펠처럼 호불호가 강한 음식을, 과연 곰이 좋아할까? 사람들도 극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지. 이 말을 듣고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으이그~ 쟤네들이 그렇게 취향이 확실한 애들이면 쓰레기 통을 뒤지겠어?"


캠핑장을 천천히 벗어나고 있는데 어느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모여 숲 속을 보며 냄비를 두드리고 있었다. 클랙션 소리도 아랑곳 안 하는데 냄비 가지고 될라나? 그래도 저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곰도 싫어할 것 같기는 하다. 그것도 죄다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걸 곰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괴해 보일까? 부디, 그런 기괴함 때문이라도 저 곰이 다시 캠핑장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길 바란다. 취향 때문이었든지 단지 배고픔 때문이었든지, 인간 영역으로 들어오는 걸 겁내지 않는 곰은 죽임을 당한다. 그런 게 인간의 법이다.


그러고 보니 예약할 때는 캠핑장 가장자리에 있는 사이트라서 좋아라 했었구나. 이거 뭐, 이제 무서워서 캠핑 오겠나.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속이 계속 쓰렸다. 배 고픈데 밥을 안 먹어서? 곰한테 시비 털렸는데 꼬리 말고 달아나는 것 같아서? 뭐 그런 것들도 있겠지만, 이번 캠핑을 하는데 쓴 돈이 아까운 것도 있었다. 그것도 더블 사이트라서 두 배를 냈는데 말이지. 아침에 잠이 덜 깬 채 운전하고 내려가서 떠온 물도 아깝다.


그리고,


낮에는 30도가 넘었지만, 이날 밤부터 다음날 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마치 한풀이하듯이.

캠핑장에서 곰을 만나는 것보다 더 짜증 나는 일은 텐트 걷을 때 폭우가 내리는 건데..

그나마 곰 덕분에 조기 철수해서 다행이었던 건가?


그 모든 시그널이 저 장대비를 경고한 거였다는 말인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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