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언 폭포 주립공원 캠핑장 #2 (2017년 9월 23일)
2017년 5월, 실패로 돌아갔던 조프리 등정을 향한 아내의 열망은 4개월도 채 안돼 이루어졌다.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된 J 님과 P 님 부부와 2017년 여름부터 급격하게 친해져서, 거의 매 주말마다 같이 놀러 다니곤 했는데, 서로 가치관도 너무 잘 맞았고, 비슷하게 맨땅에 헤딩으로 밴쿠버에 정착하신 이분들이 겪었던 얘기들에 많은 정서적 공감을 하기도 했다. 또한 준프로 산악인이셨던 이분들로부터 나눠 받은 산행의 즐거움이나 산행에 필요한 정보들 역시 매우 감사한 것들이었는데, 특히 이제 막 아웃도어 취미를 제대로 시작하려던 아내에게 지독한 뽐뿌질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프리 호수에 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나를 제외한 셋이서 손뼉을 치며 의기투합해서 9월에 다시 가기로 결정해 버렸다 (얘기했듯이, 다른 커플과 같이 놀러 다니면 많은 계획이 다수결로 결정 나기 때문에 의견 충돌의 기회가 줄어든다). 마침 계획을 잡은 날짜가 먼저 보낸 강아지의 3주기 즈음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이유로, 나 역시 얼떨결에 산행에 동참한다고 해버렸다.
그렇게, 9월의 어느 주말, 지난 5월 때처럼 팸버튼에 있는 내언 폭포 주립공원 캠핑장으로 먼저 향했다. 이날은, 역시 우연히 모임에서 알게 된, 한국에서 홀로 밴쿠버로 여행을 온 K 작가와 같이 움직였는데, 같이 캠핑을 하면서 술 마시고 얘기들도 나누고, 그러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조프리 호수로 같이 올라가는 계획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나면 다음 날 새벽 등반은 자연스럽게 무산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간단하게 먹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상태에서 다음 날 등반을 준비하자’는 사전 합의에도 불구하고, 먼저 도착하신 J 님과 P 님 부부께서 아주 근사한 저녁상 (삼겹살 + 손수 키운 쌈 채소 + 된장찌개 + 각종 장아찌 및 민들레 김치 등)을 미리 준비해 두셔서 술이 엄청나게 잘 들어갔다.. 아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ㅋㅋㅋㅋ 이렇게 먹고 마시다 보면, 산행은 무슨 산행을 할 수 있겠어.. 하는 기대가 사라지질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내 못된 심보에 하늘이 응답이라도 하듯이, 작은 사건이 하나 터졌다. 같이 술을 마시던 K 작가가 갑자기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었다. 좀 눕고 싶다고 해서 우리 트레일러에 눕혔는데, 왠지 체온도 떨어지고 맥박도 약해지는 것 같았다. 아앗.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식겁해져서 핫팩을 만들고, 서둘러 마사지를 하고 난리를 치렀지만, K 작가는 계속 바다에 가라앉는 것 같다고 하면서 응급실에 가야겠다고, 구급차 좀 불러 달라고 했다. 결국 911에 전화를 걸어 완전히 꼬부라진 혀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때가 거의 자정쯤.
내언 폭포 주립공원 캠핑장은 11시에 입구 게이트를 닫기 때문에, 구급차는 캠핑장 밖에 있는 주립공원 주차장까지만 올 수 있어서, 우리가 K 작가를 부축해서 주차장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응급콜을 받고 밤늦게 달려왔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은 환자를 본 구급요원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바이털을 간단히 체크를 하고, 환자의 신원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K 작가가 여행자 보험을 안 들었다는 걸 발견했다. 여기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 (구급요원 포함)은 경악하며 1차 멘붕. 과연 앰뷸런스 후송비용이며 응급실 비용을 어떻게 댈 것인가.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았는지, 구급요원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보험이 없는 상태에서 응급실에 가기를 원하는지 두 번 세 번 물었다. 2만 불 정도 나올지도 모른다는 협박 아닌 협박도 빠지지 않았다. 막상 응급실에 가면 중증도에 따라서 환자를 분류하고 대기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운반하는 입장에서는 사람을 골라가며 맡을 수가 없다. 중증도가 낮은 환자를 이송하느라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다른 응급환자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구급요원 입장에서는 눈앞에서 병원 치료를 원하는 환자를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야. 너. 그냥 취해서 그런 거야!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신호를 온몸으로 보내고 있었지만, 응급요원으로서 그걸 차마 입 밖으로 내보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마침 당시에 한국에서 신입생 환영회 때 술을 먹다가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대학 신입생이 유명을 달리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던 때여서, 응급실에 가기를 원하는 K 작가의 의지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래.. 일단 빨리 병원에 가자. 가서 생각해 보자...라고 했는데, 그 근처에 응급실을 갖춘 병원이 없단다. 팸버튼에도, 위슬러에도… 내언 폭포 주립공원에서 응급실에 가려면 150km 밖에 있는 노스밴쿠버의 라이언즈 게이트 종합병원까지 와야만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2차 멘붕.
아니, 팸버튼이랑 위슬러 인구를 합치면 그래도 만 오천 명은 되지 않나? 게다가 위슬러는 스키장도 많고 다운힐 산악자전거도 많이 타서 응급환자가 많이 생길 텐데, 어찌 종합병원이 없는 거지?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응급환자 이송은 편도여행이었다. 말인즉슨, 누군가 보호자로서 150km 환자 이송에 따라가면, 그 사람은 이제 캠핑장에 못 돌아온다는 뜻이다. 응급 상황에 경험이 적은 아내를 혼자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나 혼자 따라간다고 해도, 캠핑장에 정박한 카라반을 아내가 끌고 돌아올 수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구급요원 중 한 명이 은근하게 제3안을 제안해 왔다.
"팸버튼 시내에 있는 클리닉으로 일단 가자. 미리 당직 간호사에게 연락을 해서 환자를 볼 수 있게끔 해두겠다. 그리고 당직 간호사는 또, 당직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원격으로 진료를 보면 되지 않겠냐.. 그러다가 정말 응급상황이 발견되면 그때 종합병원으로 이송하면 된다." 결국 이 말에 K 작가 포함해 모두가 수긍을 했고, 아내와 내가 보호자로 같이 구급차를 타고 동행하기로 했다. 이때가 새벽 2시.
클리닉에 도착하니, 당직 간호사가 밝게 우리를 맞이해 줬다. 자는 걸 깨워서 귀찮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따뜻하게 맞이해 주니 왠지 울컥했다. 곧바로 바이털을 다시 재고는 K 작가 상체에 하얀 줄이 주렁주렁 달린 딱지들을 여기저기 붙이더니 심전도를 재면서 실시간으로 당직 의사에게 환자 상태를 생중계했다. 그런데… 아니, 약 한 알 받아먹은 거 없이 심전도만 측정했는데... K 작가 상태가 갑자기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아.. 역시……
좀 김 빠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침대에서 일어나 직접 웃옷을 챙겨 입는 걸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누구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조금 미심쩍더라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성인이라면,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법이다. 그게 비록 남에게 조금 민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거에 주저할 필요는 없다. 아니 주저해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서로 격려를 하면서 클리닉을 나섰다. 이때가 새벽 3시경. 당직 간호사에게 택시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더니, “택시? 여긴 이 시간에 택시 없는데?”. 여기서 3차 멘붕. 아 ㅆㅂ… 정말 육성으로 욕이...
캠핑장에서 팸버튼 시내까지는 비록 차로 5분, 4km 정도 걸리는 거리이지만, 제법 만만치 않은 경사라서 (고저차 50m)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 내리막으로 미친 듯이 달리는 차가 있다면, 이 시간에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걸어 올라오는 보행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할 텐데… 하지만 어쩌랴. 그냥 조심해서 올라가는 수밖에.. 그래도 캠핑장에 남아 엄청나게 걱정하고 계실 J 님, P 님 부부에게 별일 없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마침 저쪽에서 먼저 전화가 왔다. 이곳 상황을 전하니 당장 차를 끌고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J 님이 평소에 정말로 하기 싫어하는 두 가지가 다른 사람한테 무슨 부탁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영어로 말하는 것이었는데, 우리를 위해 숙소에서 잠을 자던 캠핑장 관리인을 문을 두드려 깨우고, 영어로 응급상황이니 입구 게이트를 좀 열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팸버튼 시내 입구 주유소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가 멀리서 내려오는 J 님의 차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아… J 님… 진정 당신은…
이렇게 사건 사고를 겪고 캠핑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4시가 다 되어갔을 때였다. 캠핑장 입구 게이트는 다시 굳게 닫혀 있어서, 주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후 걸어와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일이 마무리되어 정말 다행이다' 하면서 서로 격려해 주었다. 물론 나중에 비보험 의료 청구서가 날아오면 K 작가의 마음이 많이 다치겠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서로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약 두 시간 정도 잤나? 누군가가 카라반 문을 두들기며 깨웠다. J 님이었는데..
산에 가잔다.
네? 산이요? 정말이요? 술 그렇게 꼬라지게 마시고 나서 그 사건이 있었는데? 이제 꼴랑 두 시간 잤는데 산에 가자고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P 님은 이미 해장국으로 배추된장국을 끓여 놓았다. 빨리 한 숟갈 뜨고 주차장 다 차기 전에 얼렁 올라가잔다. 원망과 애원이 섞인 눈초리로 J 님을 쳐다봤더니, 슬쩍 한마디를 던진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아… J 님… 진정 당신은…
그렇게 해서 내 생애 최초 음주산행이 시작되었다. 정성스럽게 해장국을 준비한 P 님께는 매우 죄송한 일이었지만, 단 한 숟갈도 뜨질 못했다. 속에서 도저히 받아주질 않았다. 산에 올라가는 동안에도, 주변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셀카를 찍어대고 그랬지만, 난 묵묵히 앞사람 엉덩이만 쳐다보고 올라갈 뿐이었다.
광역 밴쿠버 모든 사람이 칭송해 마지않는 조프리 호수의 경치가 하나도 기억에 안 남았다. 마음속에는 계속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염불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어떻게 올라갔는지 기억도 안 나게 올라가다 보니 두 번째 호수에 도착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며 인생샷을 찍는 통나무 위에서 P 님이 갑자기 김광석의 ‘타는 목마름’을 부르셔서, 속은 메슥거리고 지친 와중에도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두 시간 반 정도 올라가니 마침내 세 번째 호수에 도착했지만, J 님은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 캠핑장 근처에서 쉬자고 한다. 세 번째 호숫가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컵라면을 먹을 때 눈치 보일 거라고… 아.. 맞다. 컵라면 먹기로 했었지.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중환자였던 K 작가가 1리터짜리 보온병을 혼자 등에 짊어지고 여기까지 올라왔었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더 가보자.. 하며 막바지 힘을 내었다. 덕분에, 터키색 호수를 바라보면서, 컵라면으로 해장을 하게 되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조프리 호수에 오르게 된 아내는 아침 내내 싱글벙글.. 그러더니 다음번에는 이곳에서 백패킹을 해보자고 은근히 옆구리를 찔렀고, 나는 못 들은 척하면서 라면에 집중했다.
BC 주의 고산 지대에는 위스커 잭 (Whisker Jack)이라고도 부르고 그레이 제이 (Gray Jays)라고도 불리는 작은 새가 사는데, 그동안 등산객들에게 어지간히 얻어먹어 와서 그런지, 사람이 손만 위로 뻗으면 자연스럽게 그 손에 내려앉았다. 왠지 심통이 난 나는 몇 차례 빈손을 뻗어 애꿎은 새를 골탕 먹여봤는데, 이 새들이 제법 영민해서 한두 번 속고는 나에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