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1. 고등학교 1학년은 특별한 시간이다. 3년의 훈련을 앞둔 선수의 심정이며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출발선에서 '나'를 찾는 시간이다. 그간의 노력과 땀의 결실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아직은 늦지 않은 중요한 과정이 시작된다. 학생과 교사 모두는 설렘과 기대로 가득한 신학기를 맞는다. 학급 아이들을 맞이하는 담임 역시 같은 심정이다.
지영이는 전교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입교하여 3 반인 우리 반 1등이 되었다. 공부만 잘하고 이기적인 경우가 있지만 지영이는 친구의 어려움을 돌아보는 따뜻한 시선을 지녔으며 책임감도 강하고 듬직했다. 아침 조회시간에 코를 훌쩍이는 지영이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격려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우리 둘은 알레르기 비염 환자였기 때문이다.
성수산 자연 휴양림에서 야영을 즐겁게 보낸 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학기에 의욕이 충만했던 학급 독서모임은 2학기에 접어들면서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결국 운영자였던 지영이만 책을 읽고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마지막 책으로 내가 그 애에게 건넨 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었다. 워낙 두꺼운 책이고, 늘 공부하느라 시간에 쫓기는지라 천천히 시간 될 때 읽으라고 했다.
그 당시는 12월 초에 이미 방학이 시작되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 마지막 주, 나의 생일이었다. 반 아이들이 어찌 알았는지 우리 집에 놀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부반장인 지영이로부터 집 전화로 전화가 왔다. 몸이 좋지 않아 자신은 못 올 거 같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엄마와 언니 그리고 자기까지 모두 아프다고 했다. 얼굴 못 보는 것이야 괜찮지만 독감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는 원래 감기에도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늘 물을 많이 마시고 마스크도 잘해야 한다. 어서 푹 쉬고 나아서 웃으면서 다음 학기에 보자고 했다.
그것이 지영이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핸드폰이 있는 시절이었다면 조금 더 지영이의 상황을 알 수 있었을까. 지금은 자신에 대해 노출이 좀 더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영이, 지영이의 엄마와 언니는 모두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그 해 가을 즈음부터 시작된 빚 독촉은 겨울 방학에 극에 달했다고 한다. 빚쟁이들이 허구한 날 와서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지영이 언니는 교대 졸업반이었다. 매우 총명한 인재였다고 한다. 지영이가 말이 없어 나는 그런 전후의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계속 외부에 계셨다고 한다. 사실 정확한 사실은 알 길이 없었다. 유서가 매체에 공개된 후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반 아이 몇과 함께 나는 지영이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IMF의 어려움이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 우리 삶을 갈가리 찢어놓은 일들은 IMF가 터진 그 이듬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들은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고, 그 해 아이들과 성수산 야영을 갔던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경제적 파탄이 피부에 극명하게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해 지영이를 바다에 떠나보낸 후, 나는 꼬박 6개월 동안 원인 불명의 병을 앓았다. 매일 눈물이 흘렀고 불면의 밤을 지새웠으며 계속 하혈을 했다. 당시에는 사립학교에서 병가를 내는 것도 어려웠다. 의사들은 나의 현상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정신과에 가 보는 일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러다가 나의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의 딸들 그리고 나의 제자들을 다시 보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강해져야 내 딸들이 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엄마는 강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신기하게도 병은 바로 나았다.
매년 수능시험날이 되면 마음 한편에 작은 불씨같이 남아있는 '지영이'를 떠 올린다. 그리고 세월호와 함께 떠난 단원고 학생들을 생각한다. 그들 모두의 명복을 빈다.
이제 나는 교직을 떠난다.
나의 영원한 제자 지영이, 다시 태어나는 삶이 있다면 멋진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지영이도 내 마음에서 보내주련다. 웃으면서 나를 보던 그 얼굴만 기억하고자 한다. 예쁜 지영이의 영혼이 편히 쉬기를 기도한다.
나의 바람은 한 가지다. 우리 어른들이 아픈 세상이 아닌 예쁜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
이 글은 영원히 열일곱으로 머문 나의 사랑하는 제자 지영이를 위한 글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니 저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1997년 11월 우리나라에 IMF가 왔습니다. 지영이를 만난 해는 1998년 신학기 담임을 맡았을 때였습니다. 바로 저의 글 성수산의 정열의 밤을 지낸 아이들 속에 ‘지영이'도 함께였습니다. 지영이와 고통으로 세상을 떠난 젊은 영혼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