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청춘 그 시절 너는, 그리고 나는

야간 담력 훈련과 캠프 파이어 댄스 타임

by 루씨

고1 학생들과 테마체험 학습(야영)을 갔던 첫날의 오후였다. 오전에 혹독한 산행과 헤맴으로부터 우리의 진영으로 무사 귀환하게 되어,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은 문제의 바로 그날이었다. 쉴 틈도 없이 오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야간 담력 훈련을 위한 회의였다.



성수산의 밤, 산속 야간 담력 훈련


야영장의 교관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 과정이었지만 야간 담력 훈련은 담임교사들의 몫이었다. 저녁 식사 후 칠흑 같은 어둠이 산을 휘감았다. 산 자락 아래 본부 운동장에서 교관들이 진두지휘하기로 했다. 운동장에 약 500여 명 가까이 되는 전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일사불란하게 앉고 서는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팀을 5인~10인으로 나누어 모두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행군이었다. 10반 중 앞 반부터 차례로 출발했다.


우리 담임교사들은 10인 5개 조로 나누어 각자 포지션을 맡아 풀숲이나 나무 뒤에 숨어 학생들의 이동을 지켰다. 이때 우리들에게는 돌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내가 맡은 지점은 산길의 초입 부분이었다. 초반에 뭔가 임팩트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서 십자가가 형광으로 새겨진 긴 박스로 관을 만들고 그 관에 끈을 묶어서 잡아 끄는 방식, 즉 사람은 없는데 관만 혼자 움직이는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절묘한 상황이었다. 바로 옆 사람만 구분이 되는 정도였다. 코너를 도는 곳에만 촛불을 밝혀 두었을 뿐이었다. 겁 많았던 나는 옆에 동료 선생님이 계시는데도 무서워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학생들은 미션을 만날 때마다 당연히 혼비백산하였다. 산의 곳곳에서 괴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아이들은 더 무서워서 떨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옆의 친구와 어깨동무를 한 팔에 힘을 더했다. 무서움을 피하기 위해 구령을 붙이면서 걷거나, 노래를 쩌렁쩌렁 불렀다.


드디어 우리 반(3반)이 나타났다. 우리 반 아이들이 오니 담임으로서 더 흥미진진했다. 아이들의 다양한 행동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세현이가 끼어 있는 팀이 나의 미션 부분에 당도했을 때였다.


선생님 어디 있는 거예요. 엉엉엉!



초반인데 이렇게 심하게 울면서 시작하니, 선생님 여기 있다고 안심시키고 싶었다. 당장 튀어나가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옆 선생님께서 만류하셔서 차마 소리를 칠 수가 없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관을 스르륵 잡아당기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 울보 세현이는 내내 울면서도 코스를 모두 잘 마치고 돌아갔다.


두 세반이 전 코스를 마치고 산 아래 운동장으로 되돌아가서 선생님들의 포지션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무서울 게 없다는 식이었다. 허공에 삿대질을 하면서 “선생님,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여기 관 잡아당기는 곳이지요? 여기 갑자기 튀어나오는 곳이지요?” 등등으로 소리쳤다.


슬슬 포지션이 발각되자 숲에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까꿍!”하는 놀이를 맡으셨던 다른 동료 팀에서 원래 있던 포지션이 아닌 곳에 숨게 되었다. 바로 오전에 성수산을 헤맬 때 앞장섰던 동료의 팀이었다. 동료의 후일담을 전한다.


학생 중 한 명이 바로 담임 선생님의 미션 지점에서 쓰러졌다. 놀라서 안고 학생을 흔드니 “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한마디를 하고 바로 기절을 해 버렸다. 부랴 부랴 옆 선생님을 동원해 엎고 내려오다가 학생이 다행히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래 있는 다른 포지션의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 교사 000이에요. 저희 내려가요. 놀라게 하지 마세요.”하고 말했다. 그러나 소리가 전달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아니면 동료 교사를 놀래 주시려 했던 것인지 그 선생님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인기척이 들리자 “까꿍!”을 한 것이다. 그러자 멀쩡히 담임교사의 손을 잡고 걷던 아이가 또 쓰러져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 그날 밤 푹 쉰 후 아이가 정신을 차렸고, 이후 야영의 일정을 잘 마무리했다.


'까꿍'에 두 번 기절한 동료 선생님 반 학생의 사건 이후, 그날 밤 야간 담력 훈련은 대부분 미션의 수위를 낮췄다. 뒷반의 아이들은 재미가 덜 했다면서 구시렁거렸다. 교사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세현이에게는 그때 네가 울 때 선생님이 걱정 엄청 했노라 전했다. 사실은 선생님도 무척 무서워서 떨었다고 진실을 말했다. 어떤 아이는 무서워서 오줌을 그대로 누웠다는 소문도 돌았다.



성수산의 밤, 캠프파이어


야간 담력 훈련이 모두 끝나고 운동장에 집결하여 이런저런 산속에서 벌어졌던 일화를 두고 떠드느라 교사나 학생들 모두 들떠있었다. 교관들이 캠프 파이어를 준비했음을 알렸다.


교관이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학생 여러분~~! 소리 질러~~!

와~~~~(조금 작게)

목소리가 작네요. 산에 한번 더 갈까요?

아니요~~~~~(크게!)


자 지금부터 여러분의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봅니다.


자,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 소리 질러~~

와~~~ 아~~(조금 더 큰 소리)


엄마, 아빠 부모님께 받은 스트레스 소리 질러~~

와~~~~~~~아~~~~~(더 큰 소리)


남자 친구 없는 사람 소리 질러~~

와~~~~~~~~~~아~~~~~~~~(가장 크고 높은 소리)


이로써 우리 교사들은 웃고, 다독이며 안심했다.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집에서 받는 게 더 하며, 남자 친구가 없는 것이 가장 스트레스라고 순수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장기자랑에 이어, 내가 호명되었을 때 무대 위에 올라가서 음악에 맞춰 약 1~2 분 정도 흔들었다. 나의 흐트러진 모습에 학생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곧바로 캠프 파이어와 함께 운동장에 음악이 퍼지면서 학생 전원 광란의 댄스타임이 시작되었다.

댄스타임이 모두 끝나고 주저 않아 땀을 흘리면서 한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놀았어요.



졸업 후


학교를 졸업 한 세현이를 다시 만난 것은 서울에서 아이가 재수하던 때였다. 밥을 사 주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만났다. 예뻐지고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귀여웠다. 그 후 다시 몇 년이 흐른 후, 선물을 사 들고 사귀는 남자 친구와 함께 전주에 내려왔다. 우리는 함께 술과 밥을 먹으면서 옛날이야기를 즐겁게 했다. 졸업 후 제자의 남자 친구에게 밥을 사 주는 영광은 처음이었다.


지금 세현이는 제주에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너무나 예쁘게 살고 있다. 지난해, 케이크를 카톡 선물로 보냈다. 아무 날도 아니었지만 원래 아이들은 촛불 켜고 소원 비는 것, 후~ 불어서 끄기 등을 좋아하니까. 세 아이 키우기, 오죽 바쁘고 행복할까 싶다. 우리는 서로 이제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고 지낸다. 예쁜 세현아, 잘 지내렴.




후기글


글을 쓴 후, 세현이와 연락이 닿아 본명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젊은 날 저와 함께 했던 우리 예쁜 제자가 제주도에서 아름답게 알콩 달콩 잘 살아가기를 다시 한번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제자는 올 해가 결혼 20주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남편은 그 옛날 전주에 내려왔던 바로 그 남자 친구입니다. 20살에 만나 결혼해 20주년이 되었다니 감개무량입니다.


지난해 제가 보낸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즐겁게 지냈답니다. 세 아이 키우기 더하기 큰 아기(남편)까지 네 아이를 키우듯 지내는 세현이,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야 겨우 자리에 앉아 저의 글을 읽고 눈물을 찔끔거렸다고 합니다. 에잇, 저도 조금 울컥하려고 했습니다. 우리 엄마들은 왜 이리 육아가 힘든지요. 지난해 쓴 손편지를 지금까지 집에 두었다 하니, 언젠가는 저의 빨간 우체통에 도착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건네지 않아도,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잘 지내고 있다고 믿습니다.


막내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가만 보면 아이들은 거의 잠옷을 입고 있어도 귀엽습니다. (잘 자라렴~^^)


세현이 그리고 아들 둘, 막내 딸아이. 엄마가 된 제자는 학원에서 수학 선생님이 되어 오늘도 목 아프게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 아이 양육을 위해......) 사랑하는 제자 세현이 결혼 20주년을 축하하는 글이 되어 참으로 행복합니다.

세 아이 뒷모습(제자의 카톡 사진)



위의 야간 담력 훈련의 일화는 지금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입니다. 그때 우리가 행했던 방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 모두 학생들과 혼연일체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찔했던 순간을 다시 떠 올리면서 웃다가 울다가 합니다.


성수산의 야영 시절에는 휴대폰이 없었다는 점을 다시 말씀드리며, 지난 성수산의 일화를 소환해 봅니다.


현재 일화의 전편에 해당합니다.

https://brunch.co.kr/@campo/394


후기 플러스


오늘날 학생들의 모든 체험학습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며, 교사 스스로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자꾸 편안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담임을 맡은 저는 학생들과 그다음 주에 출발 예정이었습니다. 결국 그 해에 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꽃다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힘없이 사라진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청춘은 그들의 꽃다운 나이를 '웃으면서' 살도록 안내하는 것이 교사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듬해 제주도에 가게 되었고, 아이들은 해맑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꽃청춘과 함께 하여 저 역시 마음 젊게 살 수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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