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빈 얄롬의 '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를 읽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 막연하게 멀리 있거나 자신과 무관한 문제라고 여기다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거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을 계기로 그것이 실제로는 나에게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나의 경우, 가까운 사람도 아니었고 죽음을 목격한 것도 아니었다.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 뉴스에 내가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 날 내가 받은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한자 시험을 보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연예인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어려서 아무것도 잘 모르는 초등학생이 어디서 베르테르 효과에 대해서 듣고는 자살이라는 게 무서워졌다.
당시 나는 스펀지밥을 좋아했는데 한 에피소드 중 징징이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뭘 만들다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하고 보니 자기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놓은 장면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장면이 자꾸 자살하는 장면처럼 겹쳐 보이면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보면 자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내 안에 자살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이 나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특이한 상상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때가 내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때다. 이 이후로 나는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철학을 전공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왜 철학과에 갔어요?'라고 묻지 않는다. 혹시나 내가 성적에 맞춰 갔다고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 상황을 만들까 하는 우려와 나에 대한 배려인 것 같다. (그러나 벗어난 이야기지만 철학과에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전공하는 사람들이 꽤 많으니 저런 편견은 버렸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 즉, 여러 사상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철학 수업 중 니체에 대해 배웠다. '아모르파티'라는 말을 들으면 몇몇 사람들은 한때 유행했던 노래를 떠올릴지 모른다. 아모르파티(Amor Fati)는 니체가 그의 저서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issenschaft)"에서 사용한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는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살라'는 의미다. 이 말이 나에게 특히 와 닿았던 이유는 당시 내가 어빈 얄롬의 '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를 읽고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가 죽음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품은 채 처음으로 접한, 죽음을 주제로 한 심리 치료에 대한 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읽을 때마다 환자들이 말하는 불안감에 공감이 갔고, 나 또한 치료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만 죽음에 대해 공포를 갖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읽었을 때 인상 깊은 구절을 적어놓는다는 것이, 역시 나답게도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만 잊어버렸다. 최근 친구에게 다시 빌려볼 수 있게 되었다. 구매를 하고 싶었으나 모두 품절이었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아홉 번째 이야기로, 암에 걸린 환자와 글을 교환하다가 그 환자가 죽고 나서 글을 다시 읽게 되는 이야기다. 인상 깊었던 부분들은 대부분 그 환자가 쓴 글들이다. 우리는 직접 암에 걸리지 않는 이상 암이 우리의 사고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죽음의 5단계로 알려진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단계를 거칠 것인지,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우울한 나날만 보낼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환자의 글을 읽으면 그 심정을 어느 정도나마 생각해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 암을 앓고 있는 사람들마저도 나에게 "당신은 30년은 더 살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나는 이 일로 죽지는 않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지지 그룹에 있는 낸시까지도 너무나 영리하게 분명한 시각으로 어제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안전망이다. 내가 오래 살거나 빨리 죽거나 어쨌거나 나는 이 순간에는, 지금은 살아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삶의 길이를 희망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불필요하며 이런 생각들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과 장소를 쓰는 것도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인생은 일시적이라는 지식에 더 친밀해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 지식의 빛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아는 것이다. 현재를 어떻게 사느냐. 여기에 내가 암에 대해서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암이 치명적 병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는 당신을 세상 속으로, 당신의 삶 속으로 뱉어버린다는 것이다. 삶은 다시 당신 속에 들어와서 당신이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삶 속의 즐거움과 사랑스러움을 더 깊이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무언가가 주어졌고 또 당신은 무언가를 박탈당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환자의 이 글을 읽고 글쓴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무언가가 주어졌다는 것은 새로운 전망으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고, 무언가를 박탈당했다는 것은 끝없는 삶에 대한 환상과 자연법칙으로부터 우리를 제외시키는 개인적인 특수성을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죽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준다.
죽음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에 대한 토론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후자에 관련된 이론이 박탈 이론이었는데, 죽음은 우리에게서 많은 좋은 것을 박탈해간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내가 왜 죽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중 큰 이유는, 나는 내 현재의 삶이 너무 행복해서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가족이 너무 좋고,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것이 좋고, 쇼핑을 하는 것이 좋고 서울에서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것도 좋고, 평범하게 사는 이 삶이 너무 행복하다. 내가 이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매우 감사하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죽음의 선구자,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모델인 니체가 말했던 대로, "만약 '왜' 사느냐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의미도 갖게 될 것이다."
내가 니체에게 끌렸던 이유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고, 그것을 삶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라'는 말 때문이었다. 나는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떨쳐내야 할지에 대해 줄곧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것을 마주하고 깨부숴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감과 공포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임하는 자세를 바꾸어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것이라는 사고의 전환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무한한 인생을 상상해보면 인생의 갈림길, 인생이 걸린 선택 등의 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기회가 있으니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유한하기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인생의 여러 시점에서 고민과 선택을 하고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뒤돌아본다.
어떤 생각에 꽂히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어린이였던 나는 네 살인가 다섯 살이었을 때 엄마에게 죽음에 대한 질문을 끈질기게 했다. 엄마는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정말로 그건 별로였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하늘뿐이었다. 나는 달려가서 구석에 놓여 있는 아빠의 커다란 가죽 의자 뒤에 숨었다. 나는 이곳에 영원히 숨어서 죽음이 나를 찾아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왼쪽 어깨에 얹어 놓고 살라고 한다. 때때로 나는 죽음은 양 어깨에 얹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은 내 몸속으로 바로 기어들어 온다. 죽음은 물론 정확하게 언제나 그래 왔다.
네이버 웹툰 중 '죽음에 대하여'라는 웹툰을 좋아했었다. 죽고 난 후 사람들이 신을 만나 삶의 소중함에 대해 깨우치는 내용인데, 죽음을 무서워하던 나로서는 죽고 나서 저런 신을 마주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웹툰을 보면 죽음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내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몇 년 후에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죽음은 언제든지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음이 아프거나 고통을 줄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또 다른 큰 이유는 내가 존재론적으로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을 직선으로 봤을 때 나는 1996년부터 어떤 특정 연도까지 살다 간 어떤 한 인간 한 명에 불과하다. 나는 다시는 살아 있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것이고 지금의 나로서 살아가는 삶은 더 이상 없고 정말 그게 끝이라는 사실이 나를 가장 두렵게 만든다. 이것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왔다 하면 나는 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언제든지 빼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정말 맞는 말이 아닌가?
내가 하는 일은 나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다. 몸 전부 그리고 몸 전체를. 늙어서 죽어 가는 골칫덩어리인 몸, 불가사의한 얽히고설킨 호흡, 암의 따뜻하고 고통스러운 믿을 수 없는 힘들, 불완전한 아름다움, 섬뜩하게 하는 살아 있음, 투쟁하는 부드러운 경악, 경악하면서 살아가고 죽어 가는 호흡, 일시적인 경이로움으로 신비롭게 하는 마음, 죽음에 이르는 아파하는 병, 우주 원자들의 집합, 그것이 나 자신이다. 이 시간 이 공간에 있는, 그것이 나다. 이 육체는 비틀어져 가고 있다. 그것은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두렵고 위험한 종양들이다. 이것들이 내 삶을 되돌아올 수 없게 하고, 삶을 파괴하고, 이것들을 없애지 못하고 전멸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육체는 살아 있게 하는 삶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울을 바라보면서 그 자신에게 "아, 가엾은 것, 가엾은 어린것"이라고 말하는 엘리의 모습이 내 마음을 끌어당겼고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불을 당겼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정말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무의식 속에서 죽음의 언저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죽음에 대해서 많은 작업을 해 왔음에서 불구하고 나는 때때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나 자신에게 치명적인 진단을 내리는 모습을 재연해 보거나 내가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는 모습, 또는 내 아내의 슬픔을 상상하곤 한다.
인생은 덧없는 것! 항상, 누구에게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 몸에 죽음을 달고 다닌다.
죽는 느낌은 잠자고 있을 때랑 비슷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죽는 느낌은 나는 절대 느낄 수도 없고. 모르는 것이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생각을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종종 한다. 만약 죽는다면 깨지 않고 영원히 잠을 자는 상태니까, 깨지 않는 한 나는 무서움도 느끼지 않은 채로 그냥 죽어있는 것이 된다.
나는 사실 아직도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어쩌면 이 불안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자살을 결심한 사람도 죽기 직전에는 공포감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뛰어내리는 사람도 뛰어내리기 직전의 공포감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지금 내가 죽는 게 하나도 두렵지 않다거나 당연히 사람은 죽는 거지 뭐, 그게 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공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 부럽다. 죽음이 있는 이유와 필요성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지만, 그 공포를 극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막상 죽음이 예기치 않게 나 또는 내 주변에 일어날 때, 조금 더 의연한 태도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위 글은 딸의 글입니다. 앞으로 딸의 글과 엄마의 글을 매거진에 틈틈이 올리려고 합니다. 저의 육아 이야기가 더 많을 듯합니다. 딸은 취준생이라서 아무래도 바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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