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는 날은 내가 가진 에너지를 최대치로 끌어모아야 하는 날이다. 내가 운영하는 엄마, 그림과 글쓰기를 주제로 모인 '살롱 드 까뮤' 선생님들과 함께하기로 한 날. 친구와 함께 집 앞 버스터미널에서 8800번 버스를 타고 순천향대학병원 앞에서 내렸다.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을 켜고 리움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엔 낡은 주택과 작은 카페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그중 막바지 작업인 MARDI MERCREDI(화요일, 수요일)라는 건물은 지형이 비스듬하게 되어 있어 건축물도 그것에 맞게 올라와 있었다. 아직 색을 입지 않은 건물은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스타일처럼 보였다. 새로운 건물, 해가 잘 드는 공간이 보이면 하루빨리 내 사무실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젯밤 남편이 '당신은 휴대폰 욕심 없어?'라고 물었을 때 내 대답은 간단했다. "응" 아이를 낳고는 물건에 대한 욕심이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 대신 나만의 공간에 대한 열망은 '물욕 없음'에 반비례하고 있다.
친구와 나는 처음 걷는 주택 사이를 한 번도 어긋난 길에 들지 않고 곧장 리움 미술관까지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리움 미술관은 삼성 재단에서 만든 사립미술관으로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의 현대미술가 필립파레노의 인기를 실감하는 날이었다. 1전시장 입구엔 내·외국인, 성인, 아이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관람객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들 일상에서 만나기 어려운 특별한 무언가를 감상하러 온 날이었다. 필립파레노의 작품은 MZ 세대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따뜻한 열기에 녹아내리는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부터 천장에서 피아노를 거쳐 바닥으로 쏟아지는 주홍빛 눈 작품인 '여름 없는 한 해 2024', 내 앞을 유유히 떠다니는 물고기 'My room is another fishbowl'과 천장 또는 사람들 앞에 부유하는 물고기를 보느라 머리가 상하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벽면 두 곳엔 자이로드롭처럼 생긴 작품 '움직이는 조명들 2024'가 빛을 뿜고 있었고 전시 테마인 알 수 없는 '보이스'가 사람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천장엔 움직이는 태양열 판처럼 생긴 스피커가 여러 곳에서 방향을 달리하며 테크노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북적이는 관람객들 사이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전파하고 있는 작품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공간이었다.
삶의 의지를 넘어서 생동적 본능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2018
여전히 불나방, 이대로 좋은 지금
한쪽에선 푸른빛을 띤 영상 작품 '삶의 의지를 넘어서 생동적 본능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2018'이 연신 번쩍거리고 있었다. 필립파레노가 그린 238점의 반딧불이 드로잉이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보이는 형태였는데 그 안에 여전히 그렇게 살고자 하는 내가 있었다. 불나방은 빛을 향해 간다. 그 빛이 자신을 죽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곳을 향해 돌진한다. 나 역시 여전히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닌가. 내려놓을 것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가지런히 놓아두었지만 어딘지 알 수 없는 길 위에 서서 흔적 없는 길 찾아 나서는 내 모습이 꼭 그의 작품 속 주인공같이 느껴졌다.
불나방이어도 좋은 지금이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으면 어떤가. 나는 몰두할 곳이 있는 지금 내 모습이 좋다. 어차피 인간에겐 생과 사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의미 있게 사는 삶, 그 삶 속의 나는 불나방일지라도 좋지 않은가. 흰 눈이 내리는 어느 날의 불나방은 스스로 빛을 내느라 춥지 않고 따뜻한 시절을 살았음을 기억하겠지.
리움 미술관 계단에서
영혼은 없고, 단지
둥글둥글 달팽이관처럼 생긴 리움미술관의 계단을 따라 1층으로 올랐다.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루미나리에 2001'로 엘시 크로포드 회전의자 위로 전선들이 연결되어 빛을 전달하고 있는 형태의 작품이었다. 1996년도에 대학 동기들과 공각기동대를 보았을 땐 2029년쯤엔 사이보그와 인간이 함께 사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하곤 했다. 이 작품은 마치 뿌리에 영양분을 주고 있는 나무 같아 보이기도, 에너지가 고갈된 현대인들의 충전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대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기를 실어 가는 미래의 에너지 저장고 같기도 했다. 이런 전시를 볼 때마다 작가의 열린 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영혼은 없고, 단지
에르빈 부름의 '1분 조각'처럼 필립파레노 역시 관람객을 오브제 중심에서 참여형, 경험형 전시 형태로 바꿔 가는 것이 흥미롭다. 게다가 내외부의 경계도 허물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작품인 것이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보수적인 미술관의 문틀을 깨부순 것 같아 속이 시원하다. 다만, 이런 작품을 만날 때의 나는 관람객들 사이에 부유하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깟 작품 앞에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니. 아이 어릴 때 구피를 키웠던 적이 있다. 구피는 정말 많은 양의 새끼를 낳고 잡아먹으면서 또 새끼를 낳는, 번식력이 어마어마한 물고기다. 필립파레노 오픈식 날의 나는 구피가 가득한 어항 속의 한 마리 구피 같았다고나 할까. 관람객이 줄어든 어느 때에 다시 찾아 혼자만의 헤엄으로 여유로운 물속 구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의 마지막 영상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90년대 후반 패션 사진가 '이네즈 앤 비누드'의 성인의 몸에 아이 얼굴 합성 사진이 대미를 장식한 것은 굉장히 좋았다. 예술가들은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 역시 아이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즐겁게 살아가길 바란다는 메시지 아니었을까.
96학번 영상 학도는 아날로그적 인간으로 변화한 상태에서 이번 전시를 관람했다. 나는 가끔 어떤 섬에 살면서 이따금 내가 필요한 만큼의 자극을 얻으러 뭍으로 나오는 섬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내 삶은 굉장히 단순화된 구조이지만 미세한 변화가 가득하다. 빨래 건조대에 걸려 있는 네이비 색상의 스웨터 하나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러니 거대한 자극이 그다지 필요치 않아졌다. 잊혔던 이야기들이 글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아 또 하나의 기억을 만들어낸다. 일상이 진부하거나 사소하지 않다. 평범한 일상의 어떤 일도 글로 쓰여, 같은 것이 없어졌다.
전시회에 가며 내게 중요해진 것은 작품보다 누구와 함께였는지다. 작품을 만나러 가는 동안 아이와 나눈 대화들이 중요해졌고 ‘살롱 드 까뮤’ 선생님들과 나눈 우리의 시간이 의미 있어졌다. 그렇게 사람이 남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지금 나의 시절,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 된 케이스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