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클로델의 첫 스승 ‘알프레드 부셰’가 이탈리아 로마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로댕의 ‘지옥의 문’에 입성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서른일곱의 나이로 이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로댕은 근육과 관절의 세밀한 묘사로 인해 실제 사람을 원형으로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정도로 섬세한 조각가였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나 <다비드상>을 연구한 결과다.
열여덟의 카미유는 마흔셋의 ‘로댕’을 처음 만났다. 로댕이 인정할 정도로 섬세하고 독창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던 카미유는 로댕의 제자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만다. 로댕은 이십년지기 동거인 ‘로즈 뵈레’와 ‘카미유 클로델’ 이외에도 여 제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닐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였다. 카미유의 아버지는 늘 “로댕에게 너무 몰입하지 말거라. 로댕의 독선적인 면은 네 능력을 갉아먹을 수 있어.”라고 그녀를 걱정하고 예술성을 빼앗길까 염려했다. 젊고 열정 가득했던 카미유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 보다는 ‘로댕’을 얻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카미유 클로델’
코가 주먹만 한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로댕 역을 맡았고 푸른 눈이 매혹적인 알제리계 ‘이자벨 아자니’가 카미유 클로델을 연기했던 영화. ‘카미유 클로델’. 내 아이디 ‘까뮤’는 그녀의 이름을 줄여 만들었다. 근 30년을 한결같이 ‘까뮤’를 아이디로 쓰고 있는 이유는 그녀를 대신해 다른 이의 이름에 얹어지기보단 타고난 이름으로 살아주고 싶어서였다. ‘김상래’란 이름보다 ‘까뮤’가 더 자연스럽게 쓰이던 시절이 오랜 기간 있었다. 그 시절 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내 인생도 그녀처럼 흘러가면 어쩌지’였다.
로댕을 원망했었다. 30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누구도 들여다봐 주지 않는 사람으로 살다 간 그녀가 가엽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서명조차 남겨지지 못한 10년, 로댕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졌다고 믿었다. 가느다란 철창을 연약한 손으로 부여잡은 채 흐느껴 울던 그녀가 안타까웠다. 어린 날의 작품을 깨부수듯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있으리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카미유 클로델’은 내게 잔혹하고 슬픈 영화였다. 그 열정을 닮고 싶었지만, 비극적인 운명이 되는 건 싫었다.
‘카미유 클로델’에 대한 의식 변화
2023년 겨울, 프랑스 미술관 여행 6회차 강의를 준비하며 그 마지막을 ‘클로델 국립미술관 & 로뎅 박물관’으로 주제를 잡았다. 카미유의 작품부터 로댕 작품까지 연대를 거꾸로 공부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댕이 카미유를 만나고 난 이후, 중요한 작품의 손과 발 대부분을 카미유에게 맡겼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조각에서 가장 만들기 힘든 부분임을 생각해 봤을 때 로댕이 그녀의 재능을 어느 정도로 인정했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녀의 재능이 자신을 능가할까 두려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나이드>가 만들어진 1889년도는 그 둘이 격정적으로 사랑하던 시기이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의 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우스 왕의 딸로 다나우스에게는 오십 명의 딸이 있었다. 자신이 사위들에게 죽을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을 듣고 딸들에게 하룻밤을 지낸 뒤 남편을 죽이라고 한다. 마흔아홉의 딸은 다나우스 왕의 말을 들었고 한 명의 딸이 이 말을 듣지 않음으로 평생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물통에 물을 길어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포즈를 취하기도 힘든 상태의 <다나이드> 속 여인을 보면 젊음이 마치 형벌인 것처럼 조각되어 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매혹적이고 탄력 있는 신체의 곡선, 앞으로 쓸어 넘긴 부드러운 머리칼, 주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매끄러운 대리석 피부, 하지만 더는 올바르게 일어설 힘이 없어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자세를 보며 이건 로댕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카미유’의 것처럼 보여졌다. 그를 가질 수 없어 몸부림치는 여인의 삶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더는 살아갈 힘이 없어 고꾸라져 있는 것 같은 느낌,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지 않나. <다나이드>는 <지옥의 문>에 들어갈 이백 명의 군상 중 하나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이 작품을 <지옥의 문>에 넣지 않고 크기를 키웠다.
우:다나이드/존 윌리엄 워터하우 1903, 좌:자신의 남편을 죽이는 다나이드/로비네 떼타르 일러스트
‘카미유’는 어리석었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해 조각하며 산 삶보다 더 긴 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원하던 한 남자의 아내로 살지 못할 거였으면 로댕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조각에 아로새겼어야 했다. 강의를 준비하며 그 옛날 순진하고 순수했던 내가 얼마나 철없고 그 깊이가 얕은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는 걸. 누구의 힘도 아닌 나 자신의 힘으로 올바르게 딛고 설 줄 아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