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속에서 나를 본다

Charles Rebel Stanton, Lady at the pond

by 김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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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림 속에서 나를 본다


연못가의 여인, 빛을 품은 고독

“연못을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그 속의 얼굴은 언제나 조금 낯설고, 조금은 흔들려 있습니다.”

어깨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연못 가장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의 상체는 앞으로 기울어 있고, 왼손이 물 위로 떨어지는 원피스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눈은 고요히 연못 안의 자신에게로 가 있다. 그녀의 시선은 물결을 뚫고, 그 아래 감춰진 어떤 세계를 더듬고 있다.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진다.

연못은 하늘을 받아 적는다. 바람에 흩날린 구름은 순간의 그림자로 스며들고, 나뭇가지의 흔들림은 어둑한 음영으로 깔린다. 연못은 언제나 시선을 품는다. 드러나는 것은 늘 부서진 파편뿐이다. 여인의 얼굴 또한 물결마다 갈라지고, 조각난 유리처럼 반사되며, 뚜렷한 형상을 거부한다. 그녀는 그 불완전함도 웃음으로 묵묵히 지켜본다.

연못 위에는 연꽃이 피어 있다. 흰 꽃잎은 깨끗하고 고요하게 수면 위에 떠 있다. 뿌리는 그 아래에 깊이 박혀 있다. 불교는 연꽃을 깨달음의 상징으로 보았다. 진흙 속에 뿌리를 두되, 그 진흙에 물들지 않는 꽃. 더러움 속에서 태어나지만 그 더러움과는 다른 빛을 품어내는 존재. 여인의 흰 원피스와 연꽃은 서로 닮았다. 그녀의 자세는 세속의 진흙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자신을 지켜내려는 한 송이 꽃처럼 보인다.

나는 그녀를 보며 나를 본다. 나 역시 삶이라는 연못가에 앉아 있다. 발밑에는 무겁고 탁한 진흙이 있지만, 그 속에 잠기지 않기 위해 애쓴다.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물들이지 않고 버티며, 매번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한다. 연못가에 앉은 여인은 곧 나 자신이고, 나는 그 여인을 통해 내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다시 배운다.

심리학은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 확인은 언제나 또렷하지 못한 채 반사될 뿐이다. 뇌는 외부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편집한다. 감정은 이미지를 물들이고, 기억은 사건을 재구성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단단한 고정물이 아니라, 매 순간 흔들리고 변하는 상이다. 연못 위의 얼굴처럼.

고독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난다. 아무도 완전한 자아를 갖지 못한다. 타인의 눈 속에 비친 나는 흩어져 있고, 내 안의 나 역시 분열되어 있다. 그 불완전함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여인은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듯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연못가의 고요는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린다. 그녀의 시선 또한 그렇다. 그 흔들림 속에서만 인간은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연꽃이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진흙에 닿아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듯.


물결 속 얼굴, 다시 쓰이는 나

아기가 처음 거울 속 얼굴을 자기라고 알아보는 순간이 있다. 그것을 학자들은 ‘거울 단계’라고 불렀다. 아이는 아직 언어를 갖지 못한다. 눈앞의 상을 자기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사실이자 착각이고, 동시에 존재를 세우는 첫 번째 기둥이다.

성인이 된 뒤에도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사진 속에서, 타인의 말 속에서, 혹은 연못의 반사 속에서. 뇌과학은 말한다. 우리가 붙잡는 자아란 실체가 아니라 구성물이라고.

전전두엽은 자기를 바라보는 역할을 맡는다. 편도체는 그 얼굴에 감정을 덧입힌다. 해마는 기억을 꺼내어 붙인다. 이 과정은 언제나 변형을 수반한다. 뇌는 사실의 기록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쓰는 이야기꾼이다. 기억은 보관된 진실이 아니라, 매번 다시 쓰이는 초고에 가깝다. 결국 나란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다시 편집되는 이야기다.

연못 속 얼굴도 그렇다. 바람에 일그러지고, 빛에 휘어지고, 순간마다 다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붙잡으려 하지만, 뇌는 허락하지 않는다. 뇌는 언제나 새롭게 나를 그린다.

신경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기억의 불안정성을 증명했다. 같은 사건을 반복해 떠올릴 때마다 기억은 조금씩 바뀌었다. 다시 저장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원래와 다르다. 기억은 고정된 진실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에 따라 다시 빚어진다. 마치 작가가 원고를 매번 수정하듯.

연꽃 또한 매일 새롭게 피어난다. 어제의 꽃과 오늘의 꽃은 같아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의 자아도 그렇다. 외관상 하나의 얼굴로 이어지지만,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진흙은 늘 똑같이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꽃은 하루하루 달라진다. 인간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흔들리는 연못 위에서 자기를 다시 쓰는 존재다.

나는 나를 붙잡는 대신, 나를 흘려보내야 한다. 완전한 자아를 고집하기보다,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자아를 인정해야 한다. 그 흐름 속에서만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로 남는다.


흔들림 속에서 피어나는 존재

고대의 나르키소스는 물속 얼굴에 매혹되어 연못에 빠져 죽었다. 이 그림 속 여인은 다르다. 그녀는 매혹과 절망의 극단에 빠지지 않는다. 그녀는 오래, 천천히, 고요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릴 뿐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얼굴은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낯선 타인이다.

문학 속 인물들은 종종 이런 자리에 선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자기 얼굴을 바라보지만,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얼굴은 흔들리고, 기억은 왜곡되며, 존재는 모호하다. 바로 그 불안정 속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완전한 자아는 없다. 흔들리는 자아가 인간의 본모습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나는 스마트폰의 반사 속에서, 타인의 말 속에서, 혹은 기억의 수면 위에서 나의 얼굴을 찾는다. 그 얼굴은 언제나 다르다. 그 차이가 바로 시간이고, 삶이고, 존재다.

연못가의 여인은 자기 모습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녀가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불완전한 과정 전체다. 연꽃이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도 물들지 않고, 오히려 그 진흙을 발판 삼아 꽃잎을 펼치듯, 나는 혼탁 속에서도 빛을 향해 몸을 세운다.

나는 이 여인을 나 자신으로 본다. 삶은 언제나 흔들리는 연못 앞에 서는 일이다. 그 연못 속에서 나는 분열된 얼굴을 본다. 그 분열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눈을 감으면 물결 위에 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것은 어제의 얼굴, 오늘의 얼굴, 내일의 얼굴 모두를 포함한다. 연못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살아간다. 연꽃은 그 흔들림 위에서 여전히 피어 있다. 진흙에 뿌리를 두고도 물들지 않는 꽃. 어둠과 빛, 고통과 평화, 불완전과 희망을 함께 품은 존재. 그것이 바로 나이자, 당신이다.

연못 속 얼굴을 오래 바라볼수록, 나는 완벽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며 살아가는 존재의 진실을 배운다. 흔들림 속에서도 연꽃처럼 물들지 않고 자기 빛을 지켜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품는다. 그렇다면, 나의 연못 속 얼굴은 지금 어떤 빛으로 흔들리고 있을까.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흔들림을 멈추는 일이 아니라, 그 흔들림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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