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벗 삼다.

실베스터 슈체드린(1751-1825, 러시아)_ 포도로 덮인 베란다

by 전애희

지난 5월 러시아로 여행을 다녀온 HJ 선생님이 러시아 화가의 작품을 소개해주었다. HJ가 러시아에서 본 그림일까?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이 작품을 소개해줬을까? 호기심이 생겼다.


900_1754715975828.jpg 실베스터 슈체드린(1751-1825, 러시아)_ 포도로 덮인 베란다, 1828 캔버스에 유채


노을이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바닷가 옆 오래된 건물 안까지 들어온다. 먼 길 떠나는 이들이 잠시 휴식을 위해 멈춘 이 공간이 노을 덕분에 따스해졌다. 따뜻한데 적막감이 느껴졌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한 시선과 침묵이 이 적막감을 설명해 주는 듯했다. 아빠와 아들, 임신한 아내, 함께하는 일꾼 모두가 지쳤다. 모두 쉬고 있구나! 생각했을 때 저 멀리 포도를 따고 있는 여자 일꾼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임산모가 포도를 먹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들며 그림을 보고 있으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던 그림에서 자연의 소리가 들려왔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와 하얗게 일어난 파도거품 소리가 들리더니 갈매기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당나귀의 투레질 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포도잎과 앙상블을 이루며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그림이 근사해졌다.



러시아에도 이렇게 따사로운 곳이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러시아는 추위에 털옷으로 무장해야 하는 나라인데, 그림 속 장소와 사람들의 복장, 주렁주렁 열린 포도는 우리나라 늦여름의 모습 같았다. 구글창에 Сильвестр Феодосиевич Щедрин을 붙여 넣은 후 엔터를 쳤다.



실베스터 페오도시예비치 셰드린(슈체드린)은 17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어나 1830년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 나폴리현에 위치한 해안 도시 소렌토에서 생을 마쳤다. 조각가 F. F. 셰드린의 가문에서 태어난 실베스터 셰드린은 아카데미의 "풍경화 수업" 교수였던 삼촌 S. F. 셰드린을 첫 스승으로 시작하여 1800년부터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M. M. 이바노프와 F. 야. 알렉세예프(1806–1811)의 지도를 받았다. 1811년 아카데미에 남아 수련을 하던 작가는 1818년부터 로마에서 아카데미의 연금 수급자로 일하며 나폴리를 여행했다. 1825년 나폴리에 정착한 작가는 여름에는 소렌토, 아말피, 카프리 등 나폴리 근교에서 거주하며 작업을 했다.


작가의 일대기를 살피자 그림의 배경과 날씨, 공간이 이해가 됐다.



실베스터 슈체드린은 다양한 주제로 풍경화를 제작했는데, 이 중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포도 덩굴로 뒤덮인 테라스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1825년~1828년 동안 수많은 '테라스'작품을 그렸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포도로 덮인 베란다>는 1828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테라스 작품의 내공이 담긴 작품 일 듯하다.



광복절 연휴 동안 강원도 삼척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해가사의 터 옆에 정자가 있었다. 뜨거운 8월의 태양을 피해 잠시 정자에 올라앉아 자연을 둘러보았다. 푸르른 동해와 촛대바위, 파란 하늘이 한눈에 보였다. 사방이 뚫려 주변 경치를 360도로 볼 수 있었다. '외국에 테라스(베란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정자가 있구나!' 작은 깨달음에 혼자 감탄하며 즐거웠다. 우리 그림을 찾아보았다. 겸재 정선의 화첩 '경교명승첩'에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갈매기와 가까이하며 친하게 지내는 정자로 한명회가 만든 정자라고 한다. 자연과 벗 삼을 수 있는 곳에 쉬어 갈 수 있는 정자,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가 담긴 공간에 으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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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해가사의 터 옆에 정자, 증산해수욕장과 촛대바위가 보인다. / 삼척 쏠비치 내 테라스 2025.08.15.


image.png 겸재 정선의 화첩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압구정(갈매기와 가까이하며 친하게 지내는 정자). 간송미술문화재단

실베스터 슈체드린은 '테라스' 작품을 통해 바로 가까이에 있는 축복받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의 조화로운 삶의 이상을 구현했다고 한다. 자연과 어울릴 때 심신이 조화로워지는 건 동서양 똑같은가 보다.



유럽 미술계에서 최초로 야외 미술의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보인 화가 중 한 명인 실베스터 슈체드린은, 나폴리의 "포실리포 화파"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9월에 <이탈리아 국립 키포디몬테 미술관 19세기 컬렉션: 나폴리를 거닐다> 전시를 보러 마이아트뮤지엄에 갈 것이다. 실베스터 슈체드린의 영향을 받은 '포실리포 화파' 작품들, 자연과 어우러진 사람들의 모습을 볼 생각에 무척 설렌다.


이렇게 그림 하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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