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방 소년은 어떻게 왕의 얼굴을 그리는 거장이 되었나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토머스 로렌스'의 작품들

by 김상래

요즘은 '빙판길 조심' 같은 문자가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 밖은 춥지만, 미술관 조명 아래 초상화 한 점이 따뜻한 위로를 건넵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한 토머스 로렌스의 1825년 작 <찰스 윌리엄 램튼>입니다. 우리에게는 '레드 보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그림이지요.


이 작품은 2021년 내셔널 갤러리가 930만 파운드, 한화로 약 150억 원대이라는 거액을 들여 소장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토머스 로렌스는 인물의 외형을 넘어 그 내면에 깃든 '인생의 무게'까지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여정은 낯선 이들이 쉼 없이 오가던 어느 여관방에서 시작됩니다.


한 조각 목탄이 운명을 바꾼 밤

여관방 한구석, 어린 소년이 앉아 있습니다. 손에는 목탄 한 조각, 눈앞에는 낯선 손님이 있습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소년은 손님의 눈빛을 쫓으며 종이 위에 선을 긋습니다. 그가 머물던 곳은 미술관도 작업실도 아닌 여관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곳은 작은 전시장으로 변해갔습니다. 로렌스가 목탄과 파스텔로 손님들의 얼굴을 그릴 때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마주했습니다. 미세한 미소의 떨림이나 흔들리는 눈빛을 소년은 놓치지 않고 포착했습니다. 손님들은 소년의 재능에 감탄하며 기꺼이 그림값을 지불했습니다.


여관은 소년의 재능을 담기에 좁았습니다. 그는 귀족과 상인의 초상화를 그리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속에는 언젠가는 런던으로 가겠다는 다짐이 생겨났지요.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배스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로렌스는 1787년 런던에 입성해 로열 아카데미 스쿨에 등록합니다. 낯선 도시의 공기와 마차 소리, 상인들의 외침과 굴뚝 연기까지, 그 모든 풍경이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로열 아카데미 전시실에 들어선 로렌스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레이놀즈, 게인즈버러,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의 작품 때문이지요. 그는 낮에는 전시실에서 거장의 선을 스케치하고, 밤에는 숙소로 돌아와 모작을 반복하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정규 교육은 짧았지만, 자신의 눈을 스승 삼아 스스로를 단련했습니다.


집념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1794년 로렌스는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왕실과 상류층의 의뢰가 쏟아졌습니다. 여관 구석에서 목탄을 쥐던 소년은 이제 영국 사회가 가장 신뢰하는 초상화가로 거듭났습니다.


대표작 <레드 보이>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처음에는 노란색 옷을 구상했으나 마지막에 강렬한 빨간색을 선택했다는 설이지요. 확정된 기록은 아니지만, 사람들 사이에 일화처럼 널리 퍼져 있습니다.

▲토머스 로렌스(Thomas Lawrence)가 그린 〈찰스 윌리엄 램튼(1825)〉 유화, 캔버스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모델은 찰스 윌리엄 램튼입니다. 아버지는 훗날 더럼 백작이 되는 정치인 존 조지 램튼입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아이의 초상이 아니라, 가문의 기대와 염원을 담아 의뢰한 작품이었습니다.


화면 속 붉은 벨벳은 시선을 압도합니다. 빛에 따라 결이 바뀌는 화려한 옷감은 소년이 짊어질 책임과 어른들의 기대를 상징하지요. 당시 여섯 살 무렵이던 찰스의 자세는 아이답기보다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지만 아이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그림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옷보다는 눈빛입니다. 앳된 얼굴과 달리 고민이 많아 보입니다. 배경 또한 평범한 실내가 아닙니다. 바다와 바위 언덕,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소년의 복잡한 내면을 무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게인즈버러의 <블루 보이>가 인물의 여유를 강조했다면, 로렌스는 화가의 해석을 통해 인물의 무게감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로렌스의 이러한 시도는 들라크루아의 <루이-오귀스트 슈비터의 초상> 같은 후대 작품에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찰스는 1831년, 열세 살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상화는 결국 '시대의 얼굴'이 된다

<레드 보이>의 눈빛이 유독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림 속 아이는 그 자리에 멈춰 있는데, 현실의 시간만 훌쩍 흘러가 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붓은 곧장 시대의 중심이자 권력의 얼굴로 향합니다.

▲토머스 로렌스(Thomas Lawrence)의 웰링턴 공작〈The Duke of Wellington on Copenhagen〉(1818). 유화, 캔버스 ⓒ Wikimedia

시선을 옮겨 <웰링턴 공작>을 마주하면 전장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는 어두운 망토를 두르고 말 위에 앉아, 손에는 바이콘 모자를 들어 인사하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웰링턴은 1787년 임관 후 페닌슐라 전역에서 연합군을 이끌었고,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꺾으며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인물이죠.


여기서 잠깐, 같은 시대 프랑스로 시선을 돌려 볼까요.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권력이 어떻게 연출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화려한 의복과 장식, 무대 같은 구도가 황제의 권위를 눈앞에 세워 놓지요.


로렌스의 웰링턴이 전장의 여운 속에서 '수호'의 얼굴을 보여줬다면, 다비드는 대관식이라는 장면을 통해 정복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셈입니다. 로렌스는 같은 권력의 무대를 영국식으로도 그려냅니다. 1821년작 <조지 4세>에서는 왕이 대관식 예복을 갖춰 입고 화면 한가운데에 서 있고, 뒤로는 망토와 자수, 커튼이 겹쳐지며 왕권의 장면을 완성합니다. 현재 영국 왕실 컬렉션에 소장된 이 작품은, 초상화가 어디까지 격식과 위엄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문을 나서면 바람이 차고 길은 미끄럽습니다. 그런 날엔 미술관의 초상화가, 내 얼굴보다 내 마음을 먼저 붙잡아 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색,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남기고 싶나요. 빙판길을 조심하듯, 오늘의 마음도 조심스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마이뉴스 미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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