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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대구지하철화재 이후 15년,
재난망 첫발

52부. 재난안전통신망 구축

by 김문기

재난 대응에서 골든타임은 현실적으로 확보 가능한 시간 중 가장 짧고, 가장 치열하며, 가장 많은 변수를 품고 있는 순간이다. 불과 몇 초, 몇 분의 차이가 생사를 가르고, 대응 실패는 국가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재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지휘·현장·기관’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게 해주는 즉각성의 통신체계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나라 재난안전통신망은 이런 요구와 전혀 맞지 않았다. 경찰, 소방, 해경, 지자체 등 주요 대응기관이 각기 다른 망을 이용했고, 음성 중심의 저속 통신에 머물러 있었으며, 기관 간 상호 연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각 망은 1:1 위주의 저대역폭 구조였고, 데이터는 거의 쓰지 못했으며, 도시·지하·산악 등 환경에 따라 품질 편차도 컸다. 기술적으로 분절된 망이 현장에서 통합 지휘체계를 방해했고, 이는 곧 재난 대응의 병목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전국적 차원의 문제로 부각됐다. 당시 기관 간 통신 단절로 인해 현장의 혼란이 배가되었고, 실시간 상황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자 구조가 지연됐다.


이 사건은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통합 재난통신망” 필요성을 제기한 전환점이었지만, 이후 진전은 더뎠다. 정부는 테트라(TETRA) 기반 재난망을 추진했지만, 수차례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탈락했다. 경제성 부족은 언제나 발목을 잡았고, 예타 기준은 공공성보다 경제성을 우선했다. 결국 공공안전망은 ‘중요하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수년간 실질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2010년에는 와이브로(WiBro)가 재난망 후보 기술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와이브로를 국가적 기술 자산으로 키우려 했고, 일부 지자체는 와이브로 기반 재난망 시범사업을 검토했지만, 기술 생태계 붕괴 속에서 장기적 지속 가능성이 확보되지 않아 예타를 넘지 못했다. 공공망 구축에 수조 원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기술 기반이 약한 표준을 선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사이 재난망 논의는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업’으로 공회전했다.


그러던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이 비극은 단순한 기술 실패가 아니라 ‘정보 공유 실패’, ‘기관 간 연동 실패’를 포함한 총체적 재난 대응 체계의 문제였고, 국민 전체에 충격을 던졌다.

다운로드.jpeg SK텔레콤 관계자들이 재난망 시스템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SK텔레콤]

반복된 비극 앞에서 정부는 더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미래창조과학부 등 범정부 차원의 재난안전통신망 구축 태스크포스(TF)가 꾸려졌고, 더 이상 예타 탈락이나 부처 간 협의 실패로 사업이 지연되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2014년 5월 대국민 담화 이후 정부는 재난안전통신망을 2017년까지 조기 구축한다는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며, 사업을 ‘정치·행정·국가적 과제’로 끌어올렸다.


재난망 구축의 핵심은 기술방식이었다. 미래부는 2014년 6월 20일 재난안전통신망 기술방식 결정을 위한 정보제안서를 공개 모집했다.1) 후보는 세 가지였다. 아날로그 기반의 테트라(TETRA), 국산 무선데이터 기술인 와이브로(WiBro), 그리고 장비·단말·칩셋·망 생태계가 빠르게 커지고 있던 LTE. 당시 세계 각국에서 논의되던 PS-LTE(Public Safety LTE) 모델이 이미 검증단계에 있었고, 미국·영국·호주 등 여러 국가가 LTE 기반 재난망으로 기울고 있었다. 반면 테트라와 와이브로는 기술 생태계가 축소되고 있었으며, 신기술 개발도 사실상 멈춰 있었다. 재난망은 10년 이상 운영해야 하는 장기체계이므로, 사라져가는 기술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통신장비업체들도 LTE 전환을 강하게 지지했다. LTE 기반 재난망은 상용망과 기술·장비·망 구성 요소를 공유할 수 있어 구축·운영·유지보수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었다. 또한 경찰·소방 등 필수 공공서비스에 영상 데이터를 즉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방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정보처리 능력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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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전문지에서만 10년 넘게 근무하며 전세계를 누볐습니다. 이전에 정리했던 이동통신 연대기를 재수정 중입니다. 가끔 다른 내용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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