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nerplate May 28. 2024

우산을 쓰지 않는 이유

어릴때부터 비오는 날이라면 유독 반겼다. 빗방울에 온 세상이 축 가라앉은 듯한 고요함과 적막함이 좋았고 빗물 처럼 내 마음도 깨끗하게 씻겨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비가 내리기 직전 비가 곧 내리기 시작할거야.라고 예고하는 듯한 바람과 땅속에서 올라오는 흙 냄새에 애정이 있다.


간밤의 비에 땅이 촉촉하게 젖은 모양이다. 아침 저녁 스트레칭과 잠깐의 명상이 루틴인 나는,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그로인해 내 온몸의 감각을 깨웠다. 비가 오는 날은 아무런 이유 없이도 그저 기분 좋은 날이 된다.


심플하게 살고 있는 지금, 내게 남은 우산이라곤 달랑 2개 인데. 하나는 에코백에도 쏙 들어갈 정도의 접이식 우산 하나와 비가 펑펑 쏟아지던 날, 어쩔 수 없이 사게 됐던 5천원 짜리 비닐 투명 우산 하나다. 키스 해링의 그림이 한쪽에 그려져 있어 나름 괜찮고 또 비닐우산치고는 생각보다 짱짱하다. 어쩌다가라도 우산의 용도가 필요할때면 이 우산을 챙긴다.


사실 난 우산을 쓰지 않는다. 설령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갑자기 소나기라도 혹은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들, 가히 무심하다. "비가 오네?" 그러고 만다. 비를 피하기 위해 좀처럼 어느 건물에 잠시 들어가 있다거나 그런 일이 내겐 없다. 어릴 때부터 비를 좋아했다는 건, 여전히 비 내리는 날 기분이 좋아지는 건, 창밖 너머 비내리는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빗소리를 천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것과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뛰놀았던 좋은 경험이 있다.는 것의 방증이다.


지금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쫄딱 맞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본래 내 걸음 그대로의 속도로 유유히 걷는다. 혹은 냅다 달린다. 얼굴에 촉촉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그리고 내 피부 살갗에 스며드는 그 감촉을 나는 사랑하게 됐다. 뷰러와 마스카라로 완벽하리만치 힘껏 올린 속눈썹 위에 떨어진 빗방울의 그 무게감 또한 나름 짜릿하다.


비에 쫄딱 맞은 내 모습은 집 엘레베이터를 타고서야 실감하게 되는데, 나는 그 모습 조차 나답고 내가 기분 좋았으면 되었다. 만족한다.고 말하곤 내린다. 집에 돌아온 직후, 곧장 욕실로 향한다. 그러곤 말끔하게 빗물을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란, 청량 그 자체다.


비 내리는 날의 한강시민공원도 사랑하는데, 비 내리는 날 그곳은 어느 방향이던지 인적이 드물다. 그곳에서 난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는 자유.를 만끽하는데. 내 뺨 사이에 흐르는 물이. 이것이 콧물인지 눈물인지 빗물인지 싶을 정도로 있는 힘껏 달리곤 한다. 그럴때면 나는 살아있다.고 느낀다.


우산을 쓰지 않는 이유는 없다. 싱거울 만큼 시시할만큼 이유가 없다. 그저 우산을 쓰지 않아도 상관 없는 거 아닌가. 딱 그 마음.에서다. 이건 이래야 해.라는 것들에 대해 비틀어 보거나,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기회를 내 스스로에게 주는 것. 내겐 재밌는 놀이이자 상상이다.


오늘도 찬란한 너에게. 노래를 재생했는데. 확실히 난 가사보다 멜로디에 흠뻑 젖는 성미인 듯하다. 그런데 이 노래 제목 너무 취향저격이다. 오늘도 찬란한 너에게. 괜찮아. 뭐든 상관 없는 거 아니니. 상관 없는 거 아닌가.의 무심한 태도로 살아보니, 한 껏 더 자유로운 내.가 된다. 그런 마음, 딱 그마음이면 된다.

작가의 이전글 잠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