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족

춤추는 별이 되다

by 진정성의 숲


졸업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집을 나갔다. 전에도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던 적이 많았기에 별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엄마도 한동안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조금은 답답했지만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의 부재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나와 남동생은 점점 더 엄마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매일 아빠를 원망하며 우리를 버리고 간 사람은 생각하지도 말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 아빠는 나쁜 사람이었다.


우리를 버린 사람.


아빠는 술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했다. 여자와 바람이 나서 엄마가 지방까지 쫓아가서 아빠를 데리고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의 언어로는 잡아 온 거라고 했다. 엄마가 누군가와 하는 전화 통화에서 “이번엔 부산에서 잡아 왔어”라고 말한 걸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미안하다고 말했어도 무슨 말로 받아쳐야 하는지 몰랐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냥 세상 모든 아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이 보통의 삶이 되니깐.


그런데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엄마가 며칠을 방 안에 들어가 혼자 흐느꼈다. 친하게 지내던 동네 이모들이 엄마를 집으로 찾아와 엄마를 위로했다. 물론 나와 동생은 덤으로 위로받았다. 그 위로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러나 모든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빠가 우리를 완. 전. 히 떠났다는 것을.


아빠가 집을 나가고 얼마 후 아빠와 엄마는 부부의 인연을 정식으로 마무리했다. 아니 정식 이기라기보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빠를 그냥 포기한 거라 하는 게 맞을 거다. 자세한 절차는 알지 못했지만 일정기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유로 자동이혼이 된 걸로 알고 있다. 이제 내가 기댈 유일한 어른은 엄마밖에 없었다.


내 나이 열네 살.

밤마다 엄마가 죽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죽음.


그 자체도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지만 '내 옆에서 엄마까지 사라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죽음이란 단어 자체에서 오는 공포보다 홀로 남겨지는 게 더 두렵고 무서웠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고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급기야 갑상샘이 좋지 않아 져서 수술을 했고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있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의 체중은 전보다 20kg나 늘었고 얼굴은 늘 부어 있었다. 계속 누워서 생활을 하다 보니 엄마의 뒷머리는 베개에 눌려 항상 푹 꺼져 있었다. 엄마는 이미 여자도 누구의 아내도 아니었다. 그냥 환자에 가까웠다.


상황이 이러니 집안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그동안 연탄도 갈아보고 설거지 같은 집안일도 종종 했었지만, 엄마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 더욱 막막했다. 당장 학교에 가져갈 도시락이 문제였다. 나는 그날부터 도시락을 쌌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방법 중 가장 강력한 건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거라고 했던가. 밥은 몇 번 해보니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반찬이었다. 나는 자꾸 세상에 없는 음식을 탄생시켰다. 어느 날은 슈퍼에서 50원짜리 분홍색 소시지를 사서 칼로 잘라 기름에 튀겨 동생 반찬통에 넣어주었다. 뭔가 신메뉴를 발견한 듯 으쓱해하면서 말이다.


내가 우리 집 주방을 책임지면서부터 집에는 바퀴벌레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퀴벌레는 번식력이 강해 한 마리만 보여도 몇 천 마리가 있는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늦은 저녁 불이 꺼진 상태에서 냉장고를 열면 바퀴벌레가 후드득 떨어졌다. 바퀴벌레 알레르기까지 생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녀석들을 다 없애기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동거인처럼 생각할 수밖에. 이불을 털어 먼지를 없애는 것처럼 집도 마구 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우리 세 가족은 아빠가 나간 그해부터 생활보호대상자가 됐다. 매달 정부 보조금과 새마을금고에서 나오는 후원금 몇십만 원이 전 재산이었다. 그것도 엄마가 아는 사람이 알려줘서 신청한 거라고 들었다. 넉넉한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그저 감사할 수밖에. 그런데 그런 감사와는 별개로 정말 싫은 게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연말이 되면 새마을금고에 가야 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애들과 같이 사진을 찍어야 했다. 애들의 옷은 후줄근했고 표정은 어두웠다. 사실 그 애들을 보면 내 모습도 그럴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더 싫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느낌.


그것도 깨끗하지 않고 먼지가 붙고 손때가 아주 많이 묻어 있는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사춘기였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갑자기 마음속 깊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은 내 의지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와 화, 안쓰러움과 애처로움. 많은 감정이 뒤섞여 나를 괴롭혔다. 그렇지만 난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탔던 엄마는 너무 낡아서 전선이 튀어나온 전기장판에 매일 누워 있었다. 어디선가 전기장판이 사람의 피를 마르게 한다는 소리를 듣고 엄마가 더 아플까 봐 마음을 졸였다. 안 그래도 엄마는 혈액순환이 안 된다며 매일 이곳저곳을 주물러 달라고 했다. 한번 시작하면 30분은 넘게 주물러야 했기에 마음속으로 밀려오는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힘든 내색은 잘하지 않았다.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내야 했다. 의젓해야 했고 어른스러워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어른들은 철이 빨리 들었다고 칭찬을 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말했다.


'철이 빨리 들고 싶어 하는 아이는 원래 없다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엄마는 조금씩 기력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더 안 좋아졌다. 급기야 우리 세 식구는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동안 집이 좁고 허름했어도 산동네는 아니었다. 가장 황당했던 건 집에 수돗물이 안 나온다는 거였다. 아니 어떻게 6.25 시절도 아니고 집에 물이 안 나온다는 말인가?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작은 우물이 있었다. 엄마는 우물물을 퍼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와 동생은 학교가 끝나고 어두워진 저녁에 우물물을 펐다. 마치 과거에 온 느낌이 들었다. 우물 주변에는 사람도 없었고 조명도 어두워서 너무 무서웠다. 우물 옆에는 빨랫줄 같은 걸로 묶인 찌그러진 양동이가 있었다. 동생과 나는 서로 먼저 던져 보라고 옥신각신했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양동이를 들어 우물 밑으로 던졌다.


철썩!


예상외로 큰 소리가 나자 나와 동생은 너무 깜짝 놀라서 서로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물을 떠서 가야 했다. 그렇게 물 양동이를 던지고 퍼 올리기를 몇 번. 양손에 가득 채워진 물통을 들고 우리는 집으로 향해 뛰었다. 그렇게 며칠을 우물물을 퍼서 생활을 하는데 바로 옆집 아주머니가 수도를 길게 잇는 호스를 빌려주며 우리 집까지 연결해 사용하라고 했다. 가난으로 가득 찬 이곳도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옆집 아주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구세주였다. 그 후로 우리는 옆집 아주머니의 시간이 괜찮을 때마다 긴 호수를 연결해 물을 받아서 생활했다. 다시는 우물을 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좋았다. 아빠가 떠난 후 이상하게 별거 아닌 걸로 행복해하는 일이 많아졌다.

우물이란 고민이 해소되고 나자 다른 것들이 보였다. 방 천장은 볼록렌즈처럼 볼록하게 처져 있었다. 천장에는 쥐가 살았다. 밤마다 쥐들이 그들만의 레이스를 했다.


따다 다닥! 따다 다닥!


산이라 쥐들이 더 많은 걸까? 며칠에 한 번 끈끈이로 된 쥐덫을 치우는 게 정말 싫었다. 끈끈이를 이용해서 만든 쥐덫이다 보니 덫에 잡힌 쥐는 몸이 끈끈이에 붙어 있을 뿐이지 살아 있었다. 가까이 가면 얼마나 사납고 매섭게 째려보는지 또 소리는 얼마나 무섭게 내는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을 모를 것이다. 살기가 가득한 쥐들의 눈빛. 현실에서는 ‘톰과 제리’에서 나오는 귀여운 ‘제리’는 없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됐다.

생활환경은 어느 때보다 열악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기에 우리 세 가족은 전보다 웃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조금씩 일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엄마의 활기찬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는 출판사를 했다고 한다. 아빠는 사장 노릇을 했고 엄마가 영업을 맡았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방문 판매가 많았는데 엄마는 늘 영업실적이 최고였다고 했다. 이혼 후 몇 년의 시간을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지만 원래 엄마는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혼 후 엄마가 바로 아팠던 건 몸보다 마음이 아팠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형편이 나아졌다. 얼마 후 우리는 드디어 산동네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이삿날 아침이 다가왔고 작은 용달차에 짐을 실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곳에서의 기억이 찬바람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사 간 곳은 반지하에 작은 방 2개로 되어 있는 집이었다. 큰 대문이 있고 안으로 들어오면 붉은 벽돌로 된 2층짜리 주택이 보였다. 주인집은 1층과 2층이었고 반지하로 계단을 내려가면 양옆으로 2개의 문이 있었다. 오른쪽 문이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누런 스테인리스로 되어 있는 철제문이 왠지 앞으로 우리 가족을 지켜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교도 이제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고, 집 앞에는 바로 슈퍼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당연히 집에 수도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게 행복에 대한 나의 ‘역치’는 정말 낮았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사 오고 며칠이 지나 학교에 가기 위해 누런 스테인리스 문을 열고 반지하 계단을 올라 대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위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얼핏 보니 교복을 입은 것 같았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우리 학교 같은 반 친구. 그랬다. 나는 주인집 아들이 내 친구인 집으로 이사 온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와 내 친구는 얼굴을 마주쳤지만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난 먼저 집을 나왔고 친구는 뒤따라 나왔다. 그 이후부터 아침에 집을 나가기 전에 2층 계단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와 나는 학교에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만큼 친구도 놀랐을 거다. 그러니 당연히 나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거다. 뭔가 내 인생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은 나 혼자 힘들어도 집 밖에 다른 장소에서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도 남이 알지 못하면 아무렇지 않게 연기할 수 있었다. 감쪽같이 내 상황을 속이면 언젠가 내가 동경하는 그곳에서 아무 일 없었듯이 다른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다 틀렸다. 그 친구와는 완전히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분명 누군가에게는 말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대놓고 놀리는 것보다 그윽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시선이 싫었다. 나만의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그 친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 보였다. 그래도 난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 어린 시절 새마을금고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감정을 고르는 연습을 많이 했다. 내 안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가 다시 소멸되기를 반복하는 수많은 감정. 그중에 가장 괜찮을 것 같은 감정을 골라서 현재의 감정으로 교체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뜨거움도 차가움도 없이 미지근하게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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