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 어린 나는 막걸리 심부름이 너무나 무서웠다
가장 오래된 내 기억은 할머니의 축 늘어진 젖꼭지를 손으로 만지며 잠이 든 장면이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마 다섯 살쯤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해 뜨기 전부터 해 진 후까지 늘 논밭에 나가 있었고, 우리 네 남매를 품어 준 사람은 오로지 할머니뿐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방이 겨우 두 칸이었다. 작은방은 부모님의 공간이었고, 큰방은 할머니와 네 남매가 함께 뒹굴며 지내는 방이었다. 그 큰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이불 위에서 우리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둥글게 누워 잠이 들곤 했다. 가장 어린 막내 여동생은 때때로 엄마, 아빠 옆으로 가서 잤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는 늘 할머니 품이 우리의 안식처였다.
아,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아주 어릴때 막내고모는 결혼 전이라 같이 살았었다고 한다. 예전 앨범을 넘겨 볼 때면 그 때의 기록들이 하나 둘 남겨져 있다. 막내고모는 아마 지금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별채를 사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장작을 넣고 방을 데워서 살았다고 한다.
1970~80년대 시골에서는 집에서 아이를 받는 일이 흔했다. 산부인과에 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배가 남산만 해도 일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이 그 시절 농촌 여성들의 현실이었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네 남매 모두 그 작은방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남동생은 나와 두 살 터울이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네 살 터울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의 일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날 아침, 할머니가 분주히 뜨거운 물을 끓이고 깨끗한 천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동생이 어느 정도 목을 가누고 몇 개월이 지난 후, 여섯살 쯤 되었 던 나는 동생을 너무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어린 나이에 포대기를 매고 동네마당까지 업고 나간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아마 언니나 동네 어른이 함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나이에 아이를 혼자 업고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동생이 생겼다며 동네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엄마가 애기 낳았어. 한 번 볼래?"라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여동생은 지금 마흔이 넘은 나이인데도 여전히 어린 동생으로만 느껴진다.
엄마는 출산 후 몸조리도 제대로 못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농사일을 나가셨을 것이다. 이건 순전히 나의 추측이지만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1980년대 농촌의 여성들은 출산 후에도 생계를 위해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몫이 되었고, 할머니의 품은 우리에게 엄마보다도 더 익숙했으리라.
어린 시절 우리 시골 동네를 떠올리면 정말 많은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리 집 바로 건너편에는 동네 유일한 점방(작은 가게)이 있었다. 조그만 도랑 하나만 건너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 도랑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몇 발자국 위로 올라가서 다리를 건너는 방법과, 도랑으로 바로 내려가 징검다리처럼 놓인 돌다리를 밟고 건너는 방법이었다.
낮에는 당연히 돌다리를 통해 건넜다. 더 가깝고 빨랐으니까. 하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시골 밤길에는 가로등이 없어서 달빛이 유일한 등불이었다. 그나마 달이 밝은 날이면 은은한 달빛으로 길을 찾을 수 있었지만, 구름이 달을 가리거나 초승달이 뜬 날이면 정말 '칠흑 같은 밤'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어둠이 온 동네를 덮었다.
그런 깜깜한 밤에도 아빠는 가끔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셨다. 아빠는 하루 종일 힘든 농사일을 마치고 나면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달래시곤 했다. "얘들아, 점방에 가서 막걸리 한 되만 사 와라." 아빠의 말씀에 우리는 한 되짜리 주전자를 들고 그 무서운 어둠 속으로 나가야 했다.
한 손에는 묵직한 주전자, 다른 한 손에는 희미한 불빛을 내는 후레시를 들고서 말이다. 그 어린 나이에 귀신과 도깨비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특히 도랑을 건널 때면 발밑이 보이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이 모험이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도랑에 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서 나는 혼자 가기가 너무 무서워 언니와 함께 심부름을 갔다. 언니도 나만큼 무서워했지만, 그래도 언니가 있으면 조금은 용기가 생겼다. "언니, 혹시 귀신 안 나오겠지?" "괜찮아, 같이 가면 안 무서워." 이런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점방까지 가곤 했다. 언니도 이 기억을 똑똑히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서운 밤길에도 불구하고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점방에서 과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특권 때문이었다. 바삭한 과자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시간은 그 어떤 순간보다도 행복했다.
때로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점방에 가기도 했다. 각자 몇 원씩 모아서 과자를 사 먹거나,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점방 앞 평상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과자를 먹으며 떠들던 시간들이 지금도 그립다.
칠흑같은 밤, 막걸리 심부름을 갔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지금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기억의 창고 한구석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다가, 이렇게 세상 밖으로 꺼내보고자 마음을 먹으니 추억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요즘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유행이다.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놀리며 하는 말이지만, 정말 맞다. 지금 내가 바로 그 '라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차근차근 기억을 소환해서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그 소중했던 "그때 그 시절" 말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점방과 막걸리 심부름 이야기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할머니와 연결된 기억들이다. 할머니가 계셨기에 우리가 안심하고 밤길을 나설 수 있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할머니 품에 안겨 하루의 무서움을 털어낼 수 있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하자면 정말 끝이 없다. 책 한 권은 물론이고 여러 권이 나와도 모자랄 만큼 그때 그 시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누가 특별히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냥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진 소소한 추억들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기억들을 꼭 끄집어내어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억은 흐릿해지고, 그때의 감정들도 점점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 이야기들을 글로 남기려고 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기, 승, 전, 결이라는 구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없을 것이다. 누가 봐도 그저 잔잔하고 평범한 이야기가 될 테니까. 때로는 산으로 가고 때로는 강으로 가면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와 문장들이 서투르게 춤을 출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작해 보고 싶다. 우리의 뇌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잊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억지로라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면,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할머니의 따뜻한 품, 무서웠던 밤길, 달콤했던 과자의 맛,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감싸안고 있던 시골 동네의 정겨운 풍경들. 이 모든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밑바탕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