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 뜨개가 찾아왔다
니터들의쪽지 issue2
햇살 좋은 아침이면, 베란다 창가 앞에 무심히 둔 화분들에 눈이 간다.
물조리개도 변변찮은 게 없지만, 큰 계량컵에 물을 받아서,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물을 준다.
이파리가 새로 돋아나고 있는 요즘의 이야기다.
식물 킬러로 누구에게 지지 않던 내가 지난해 갑자기 초록이 들에 관심이 생겨서 들인 몇 개의 화분들,
그리고 아무 화분에나 아무 흙에서도 뭐든 무럭무럭 잘 키워내는 엄마가 주신 화분들까지.
그렇게 화분이 늘면서 나름 반려식물을 키우는 식집사가 되었다.
그러나 식물 킬러였던 어둠의 힘은 어디 가지 않는지,
날이 추워지고, 겨울이 되니 흙을 만져가며 물을 주는데도, 이파리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결국 친정에서 데려온 야래향은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리고 정말 죽은 건가 싶게 가지의 색깔로 잿빛으로 변했다.
추운 겨울 다용도실에 내놨는데도 건강하게 광택이 있는
싱그런 이파리를 무성하게 보여주고 있는 엄마네 야래향을 보니,
아….나는 또 이 생명들을 저세상으로 보냈구나 싶어 화분만 보면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가드닝이 취미이신 선생님께 이런 얘기를 넋두리처럼 하니, 낙엽성 나무들이 있는데,
잘 모르면 죽은 줄 안다고 하셨다.
아쉬움 조금, 게으름 조금, 그리고 의심 조금 으로 가지만 남은 화분을 그대로 두고,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이파리가 없어 생명징후가 보이지 않는 식물엔 여간해 눈이 가지 않기 마련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모르는 새 봄이 와있는 것처럼 그렇게 어느 날,
그동안 초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던 가지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간사한 마음은 염치도 없는지, 생명의 징후가 눈에 보이니 갑자기 물주기에 열심이고,
다른 곳엔 새싹이 안 돋아나는지 살피고, 매일매일 흙을 만지며 그전에 없던 관심을 기울인다.
눈으로 보이자 의심했던 생명을 믿다니.
못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 했던 도마는 성경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얼마 전까지의 일상은 새싹이 나기 전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있던 화분 같은 날들 같았다.
매일매일 해치우고 있는 살림은 하면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나는 이해할 수 있는 결과를 보이고,
지나고 보면 어느 하루 진심이지 않은 날이 없었던 육아의 시간도,
아이들의 사춘기를 지나면서 불안한 정체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연 나의 시간이, 새싹을 돋게 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매일매일 바쁘게 살아가고는 있지만, 과연 나의 매일은 그냥 흘러가고 있을 뿐인가 하는 허전함이
마음 바닥에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어서,
언제라도 불안한 바람이 불면,
그 먼지들이 뿌옇게 내 시야를 가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주저앉힐 수도 있었을 테지만,
감사하게도 다행히 긍정적인 마인드와 오기 같은 것 덕분인지 나름 잘 살아오고 있었다.
실이랑 바늘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심플한 취미라 생각하고
큰 기대나 바람 없이 할머니와 엄마 어깨너머로 배운 뜨개질을 다시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낀 집중과 몰두의 시간들.
그것도 가족이나 회사 등과 관련 없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
일 할 때는 밤새기가 무리인 저질체력이었는데,
뜨개가 재밌을 때는 뭉친 어깨에도, 훅하고 들어온 노안의 위협에도, 달콤한 잠까지 줄여가며 뜨개를 한다. 한 코 한 코 만들어 한단을 만들고, 그 단들을 쌓는 그 반복적인 작업에
나의 일상이 파릇한 새잎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확인되는 성장을 만날 수 있는 매일매일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서 새로 돋는 새싹에, 작은 돌멩이 같던 씨앗을 뚫고 나온 뿌리에 열광하는 건,
오늘 자라고, 내일 자라고, 내가 물을 주고 관심을 주는 만큼 자라는 게 하루하루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뜨개는 내가 잡고 있는 시간만큼 자란다.
그리고 한 코 한 코 뜨는 순간마다 자란다. 뜨개와 함께 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담아 쌓인다. 할머니도, 엄마도 차곡차곡 쌓아가는 매일매일의 확인이 필요했던 그 어느 날에 뜨개를 만나지 않았을까.
뜨개를 다시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난 오늘에 그때의 할머니와 엄마의 그 반짝이는 시간을 내가 만나고 있다.
요즘 많이 쓰는, 발음도 우아한 반려(伴侶) 라는 말을 찾아보니,
짝 반(伴)에 짝 려(侶),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만났던 짝이 되는 동무가 감사하게도 내 인생에도 선물처럼 찾아왔다.
처음엔 쌓아가는 시간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세상 중요한 일 같았는데
이제는 쌓았던 시간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던 ‘푸르시오’ 도 괜찮다.
뜨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때에는 푸르시오는 그동안 떴던걸 도로아미타불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푸르시오는 그동안 자란 뜨개 실력은 둘째치고,
내 맘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인생에서
내 손으로, 내 의지로 다시 시작할 수도, 고칠 수도 있는 리셋 버튼 같다.
푸르시오를 한다고 뜨개 했던 시간 동안의 이너피스가 사라지는 게 아니란 걸 의심하지도 않게 되었으니,
뜨는 동안 이너피스를 얻고, 푸르시오의 콧수만큼 어른이 되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랑도 확인받고 싶듯이, 내가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듯 나 스스로 확인받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뜨개를 하며 한 코 한 코, 한 단 한 단 시간과 마음을 쌓는 걸 눈으로 확인할 때,
나의 머리를 쓰담쓰담하고, 그리고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참 잘했어요” 라고 속삭여 주는 반려 뜨개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