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

ep 4. 글감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by 달보


자랑은 아닙니다만, 자랑처럼 보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솔직하게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글감이 없어서 고민했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글감은 차고 넘쳐서 문제였는데, 그건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전자필기장에 틈날 때마다 적어놓은 글감들을 시간이 없어서 아직까지도 써먹지 못하고 있는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가 맨 처음 글을 쓸 때는 새벽에 일어나 창가로 쏟아지는 달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 들길래 그걸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 적은 게 다였습니다. 그 당시엔 한 번 그렇게 쓰고 말 줄 알았으나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똑같은 방식으로 글을 써 나갔었습니다. 물론 내용은 달랐습니다. 딱히 별다른 글감도 없이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방법으로 글을 쓰면 비슷한 글이 나올 것 같지만, 막상 써 보면 전혀 다릅니다. 직접 경험한 바로는 매일 색다른 글이 눈앞에 펼쳐지곤 했습니다.


그땐 왜 그런지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우리네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어제와 오늘의 상황이 완벽하게 겹치는 건 단 하나도 없으니까요. '생각'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식될 뿐입니다. 딱히 글감이 없어도 기분이나 감정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전 글쓰기에 대한 흥미가 생겨나면서부터는 하루를 보내면서 틈날 때마다 글감이 될 만한 것들을 수집했습니다. 이를테면 새벽에 알람소리 듣고 일어났는데 유독 잠이 달아나지 않을 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음에도 미칠 듯이 다시 잠들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생각을 적기도 하고, 운전하던 도중 누가 갑자기 끼어들었을 때 평소 감정기복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분노가 삽시간에 치밀어 올랐던 순간을 적기도 하고, 노을 진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노을의 경계는 존재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적기도 했습니다.

정말 무식해 보일 정도로 글로 한 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되는 건 가리지 않고 일단 메모부터 하고 봤습니다. 설사 나중에 글로 안 쓸 수도 있지만, 뭔가가 뇌리를 스칠 때 담아놓지 않으면 다시 생각날 일은 거의 제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글감은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얼마든지 주워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감이 될 만한 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잠식당하지만 않으면요.




KakaoTalk_20240915_221634080_04.jpg 구미 카페(에이바우트 옥계점)


글감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글감은 글쓰기를 보다 수월케 시작하게끔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머릿속에 흘러가는 생각들은 모두 하나의 글감이 될 수 있습니다. '감자'는 글감이 될 수 없고, '지혜'는 훌륭한 글감이라는 생각은 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글감의 한계를 좁힙니다. 감자로 글을 써도 얼마든지 지혜로 매듭지을 수 있으며, 지혜를 재료 삼아 글을 쓴다 한들 충분히 감자로 끝날 수 있습니다. 막상 써 보면 종잡을 수 없는 경로로 뻗어나가는 바람에 글쓰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 맛에 꾸준히 써 나갈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은 정말 써 보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글쓴이조차도요. 그래서 글쓰기는 매력 있습니다.


아직 글쓰기 습관이 없는 사람이 글감으로 삼기 좋은 건 두말할 것 없이 평소 자주 하는 생각들입니다. 머릿속으로 많이 떠올리는 화두일수록 할 말이 많은 만큼 쓸거리도 많을 테니까요. '저 인간은 나를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그 친구는 언제부터 나와 멀어지기 시작했을까', '결혼은 꼭 해야만 하는 걸까'와 같은 것처럼 마음 한켠에 묵혀두고 있는 생각들을 글로 쓰려 하다 보면 비교적 쉽게 써질 것입니다.


가끔 장르도 주제도 완전히 다른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어보면 내용이 한 지점으로 귀결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엔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어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서로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론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인간에 의한 창작물이어서 그런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이런저런 글감을 다 갖다 써도 비슷한 내용이 써질 수 있습니다. 그건 필력이 부족하거나 글감이 문제라기보다는, 글쓴이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혹 그런 일을 겪는다 해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글 쓸 때마다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건 그만큼 그것과 관련된 생각들이 속에 가득 들어차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럴수록 더 많이 씀으로써 내면에 묵은 때를 바깥으로 흘려보내면서 '여백'이 어느 정도는 확보가 되어야 전에 없던 신선한 사유를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새로운 글을 쓰게 되는 과정은 그런 패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언컨대 글쓰기와 관련된 문제는 대부분 씀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쓰고 쓰고 또 쓰는 것만이 더 나은 글, 더 잘 읽히는 글, 더 참신한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딱히 쓸 게 없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세요. 현실과 잠시 동떨어질 목적으로 '침묵'을 적극 활용한다면 분명 쓸만한 거리를 마음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은 글감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채굴한 글감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나를 밝혀주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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