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알지 못하는 소설가의 10번째 책입니다그려
2년 넘게 방치되었다가 빈집같은 이곳을 다시 들어와 보니
나의 10번째 책은 소개조차 하지 않은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발간하고 보니, 하도 어두침침한 분위기여서 누구에게 읽어보라고
말도 못꺼낸 소설집이다.
소설가를 때려치울까 생각 중인데 소설가는 소설을 안 써고
사람들이 소설가라고 불러주기 때문에 굳이 폐업 선언을 한다고 해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그냥 냅두기도 했다.
요즘 젊은 기운이 느껴지는 소설집을 몇 권 읽고 있는데 나름 좋다.
혼자 멜랑꼴리하고 혼자 깊은 고뇌에 잠긴 척하고 혼자 뭔가 인생을 달관한 듯한 제스처를 하고
혼자 고통스러워하던 우리 시대의 주인공들은 이제 자취를 감춘 것 같다.
근데 그땐 주인공을 그렇게 만들어야 뭔가 그럴 듯해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
상큼발랄한 작품이 두 개 정도는 들어가 있어서 양념 맛은 날 거라 자위한다.
소설을 오래 쓰다보면 (썼다기보다 오래 궁리하다보면)
업다운이 심해져 자칫 우울증 비슷한 병을 앓기도 하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병이 도졌다가 어느 순간 제풀에 나은 것 같다.
다행이다. 나이도 먹었는데 우울증까지 있었더라면 살 맛 안 날 뻔 했다.
이런 잡소리나 늘어놓고 사는 게 내 인생에서 좀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고 살짝 푸념하는 아침이다.
그래도
좋은 아침~
2006년에 출현했지만 그분(!)들의 자애로운 볕 한쪽 쬐지 못하고 음습한 응달에서 올드하기 짝이 없는 글만 써왔다고 푸념하는 소설가 이숙경이 세 번째 소설집 『곧 죽어도 로맨티스트』를 선보인다. 에세이를 포함하면 10번째 책이다.
이번 소설집 역시 작가 특유의 독보적인 우울함과 도발성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불행을 한껏 부조시키는 스토리텔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찌하여 등장인물 태반이 황지우의 시구처럼 “나, 이번 生은 베렸어.”라는 고백을 하는지 의문이지만, 이숙경 문학 특유의 매력이자 지표인 가족서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사는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엄마의 결혼식을 기억한다. 그날은 그녀의 쉰여덟 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P. 37 트렁크와 작은 백이 거실 한가운데 있다. 한 시간 후에 나는 떠날 예정이다. 혁명은 고속도로가 막힌다고,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고 전화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정지된 화면을 보는 것처럼 고요한 밖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저 고요 속으로 나는 기꺼이 들어갈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잠이 들고, 세상의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는 곳. 길 위에는 오직 나의 남자만 있는 곳. 헤드라이트를 끈 혁명의 차가 미끄러지듯 집 앞에 서자 나는 문을 열었다.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리 걸어도 그와의 간격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꿈이라도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걸어가고 있다. 끝없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아침이 되어도 결코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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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0 다음 날 경아는 떠났다. 쪽지는 간결했다. 나, 드디어 유곽에서 빠져나왔네.
남해 금산도 나를 떠났다. 나도 떠났다. 나의 이생은 저 생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통짜로 여민 옷을 벗고 예의와 학습된 문장과 구깃구깃해진 ‘가다마이’를 다시 입었다. 모든 것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숨이 끊어지려 하는구나. 떠나려 하는 나에게는, 그 헐떡거림조차 눈부셨다. 부욱 찢어 문에 붙여놓은, 초판이라고 애지중지하던 시집 한 장도 가냘프게 헐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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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1 나는 몸을 일으켰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발을 질질 끌며 형 쪽으로 다가갔다. 다친 곳은 발뿐인데 어째서 온몸에 고통이 솟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슴이 쩍쩍 벌어졌다. 저, 새끼, 들은 이제 온몸에 상처를 내는구나.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쪽 무릎마저 꺾여 엎어졌다. 낮은 포복 자세로 형을 향해 기어갔다. 팔꿈치가 아스팔트에 긁혔다. 뒤집힌 카우보이모자가 손끝에 닿았다. 순간, 비죽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탕을 넣어 줘야 하는데. 씰룩이는 입가가 자꾸 떨려왔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멜랑콜리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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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9 J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페북, 인스타그램, 블로그부터 개나 물어갈 첫 소설집은 물론 어느 땐 아침부터 술을 찾는다는 증상까지 늘어놓았다. 술술 나발을 불면서도 내가 왜 이럴까 생각했지만 탄력 받은 고백은 끝날 줄 몰랐다. 술 때문인지 글 때문인지 모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관자놀이를 쪼아대는 편두통, 가장 나를 격렬하게 쪼아댔던, 언젠가는 꼭 죽이고 말 것이라는 평론가의 이름, 헤어진 두 남자의 편재 프로필까지, 급기야는 술김을 빙자해 울먹이면서 쓰다만 글까지 들이밀었다.
“글을 쓸수록 나는 미쳐가는 것 같아요...”
P. 142 “울지 마.”
그에게 다가온 아내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명줄은 아주 짧게 끊어져 있다.
“내가 말했잖아. 이런 손금은 오래 못 산다고.”
그녀가 짧게 웃었다. 어느 틈엔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나이프.
P. 155 “피아노를 배우시려고요?”
남자는 원장의 눈길이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의 손은 유난히 거칠고 힘줄이 솟아 있었다. 쇼팽의 왈츠를 치고 싶다고 하자 원장은 더욱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은 언제라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자는 원장이 자신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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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84 젊은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하고 싶었다. 나는 남편을 찌르고 싶어요. 나를 찌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내 눈을 찌르거나.
그때부터였을까, 날카로운 것들만 보면 몸의 어딘가를 찌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듯한 위태로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너무 편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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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26 정미는 머플러 매듭을 잡아당겼다. 아이의 목을 누르던 때보다 더욱 더 힘주어 매듭을 잡아당겼다. 흑싸리가 이삭을 펄럭이며 바다에 떨어지고 있다. 정미의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캐스터네츠를 치켜들고 춤을 추는 여인처럼 길게 팔을 뻗었다. 아름다워. 아름답고 자유로워. 정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검은 머플러가 바람에 휘날리며 흑싸리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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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34 책과 영화와 연극과 각종 드라마에서는 늙음을 너무 미화하거나 비하했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늙는다는 것은, 능력이 없어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없는 상태이며 몸의 기관들이 부실해져서 제대로 들을 수 없고 먹을 수 없고 걸을 수 없고 잠잘 수 없고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며 행동반경이 조금씩 좁아져서 동네에서 집 앞까지 집 거실에서 드디어는 자신의 방 침대에서만 운신해야 하는 것이며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누군가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못하는 것이며 손주가 용돈을 달라고 해도 돈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매일 다음에 주마,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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