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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나 Dec 09. 2023

부모님이 주셨던 카드 한 장

책을 산다는 것에 관하여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신용카드 한 장을 주셨다. 단, 그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통학할 때 필요한 교통비, 병원비와 약 값, 그리고 책이었다. 그 외의 이유로 돈을 쓰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하셨다. 하루는,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오는 날을 코앞에 앞두고 내 통장 잔고가 바닥이 났다. 그날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수업이 있던 터라 점심값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여쭸다.


"아빠, 저 내일 알바비 들어오는데 오늘 점심 사 먹을 돈이 없어서요. 내일 돈 들어오면 바로 갚을 수 있는데, 오늘 아빠 카드로 밥버거 하나 사 먹어도 될까요?"


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아빠가 한 마디로 대답하시고는 바로 전화를 끊으셨다.


"굶어라~(뚝)"


하지만 카드는 내 수중에 있었기에, 고작 삼천 원도 못 빌려주나 하면서 홧김에(?) 그날 오천 원짜리 밥버거를 아빠 카드로 긁긴 했지만, 그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빚 한번 지지 않고 알뜰살뜰 잘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만큼 카드 사용처에 철저하셨던 부모님은 책을 사는 것에 관해서는 그와 완전히 반대였다. 엄마와 가끔씩 동네 서점에 갈 때면 매번 "사고 싶은 책 있으면 사."라고 하시곤 했다. 그리고 어느 학기에는 필요한 전공서적 값이 비싸서, 아빠께 부모님의 카드로 사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여쭸다. 그랬더니 내 얼굴도 보지 않으시고 이렇게 답하셨다.


"사야지. 책 사는 데 돈 아끼는 거 아니다."


그때 아빠는 큰 기대 없이 이야기하셨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씀은 짧았어도 지금까지 내 삶에 깊이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말 그대로 '책'을 사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책을 산다는 개념이 내가 배우거나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에 기꺼이 지불해야 한다는 가치관으로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옷이나 어떤 물건을 살 때는 그게 정말 나에게 필요할지, 오래 쓸 수 있을지 여러 번 고민하지만 사고 싶은 책이나 경험이 있을 때는 큰 망설임이 없다.


종종 아빠의 말씀을 곱씹기도 한다. 차비와 나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서로 관심을 가졌던 책들을 리스트 업한 후 같이 주문하는데, 대부분은 일반 서점에서 찾기 어려운 특정한 책이거나 집에 두고 봐야 하는 레시피 책이어서 아무리 신중하게 골라도 총 금액이 꽤 나가곤 한다. 그때 차비가 조금 망설이면 나는 운을 뗀다, "우리 엄마 아빠가 책 살 때는..." 하면, 차비가 곧바로 대답한다 "아끼지 말라 하셨지?"


하지만 아무리 부모님이 책 구입에는 카드에 무제한을 설정하셨대도, 사실 그 당시 나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독서를 진심으로 즐기기 시작한 건 서른 살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고작 몇 해 전부터다. 대학생 시절 동안 사 둔 책의 첫 장도 손 대지 않았으면서, 졸업하고 해외에 나오면서 혹시 몰라 중고 전자책을 사 가지고 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책을 다운로드해 읽으며 한국에 대한 향수를 풀다가 재미를 붙였다. 어제도 에세이 한 권을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삼,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어를 포함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책을 몇 분 안에 내 전자책으로 다운로드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싶었다.


한번은, 누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다. '학사를 졸업하면 세상을 다 아는 것 같고, 석사를 졸업하면 내가 알던 세상에 의문을 갖게 되고, 박사를 마칠 때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그건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내가 그 분야에 벌써 빠삭한 것 같지만, 많은 책을 읽고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다 보면 도대체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나 느낌이 든다. 하지만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겸손해지고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을 더 읽고 배우고 싶어진다.


요즘 나는 종이책에 대한 갈증이 있다. 전자책은 한 기기 안에 여러 권을 들고 다닐 수 있고, 새벽에 일어났을 때 불을 켜지 않아도 포근한 이불 속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긴 하지만, 종이책의 입체감을 느낄 수 없고 영감을 주는 부분에 다양한 방식으로 표시할 수도 없다. 내년에 한국에 가면, 그동안 부모님 집에 주문해 놓은 중고책들을 모조리 읽고 도서관도 자주 다니고 싶다.




책 읽다가 갑자기 딴 길로 빠져서 적어 본, 책에 대한 일기.

책 많이 읽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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