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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Aug 01. 2019

날 위로해 준 Magic Shop

덕질은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가에 관한 고찰 4

               

 나는 여행하면 으레 이국을 떠올렸다. 드넓은 태평양이나 낯선 간판이 어지럽게 늘어선 도로 혹은 노천카페의 와인 같은. 그럴싸한 배경이 되어 준 상점이 알고 보면 ‘파리바게뜨’라든가 ‘명랑 핫도그’처럼 그들에겐 특별할 것 없는 곳일지라도 그 언어가 의미가 아닌 시각적 효과로 작용하는 곳을 늘 여행지로 떠올렸다.  

    

 이왕 시간과 돈을 쓰려고 작심한 이상, 이왕 ‘여행’이란 걸 떠나려고 결심한 이상, 그곳은 나만의 세트장이 되어 주는 곳이어야만 했다. 현실에선 보잘것없는 나를, 이방인으로서의 나를, 드라마 배역을 맡은 양 특별해 보이게 하는 배경을 선택하는 것. 내게 여행은 일종의 환생을 위한 장치였다.   

   

 거스름돈을 속아 잘못 받거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해 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도 그럴듯한 에피소드처럼 얘기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여행 얘기를 들려줄 수 있냐는 선배의 말을 단박에 수락한 것도 이 마음의 연장선이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4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은 멋들어진 선곡 몇 곡이 포함된 시간을 오롯하게 부여받은 주인공일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국내 여행지를 묻는 어떤 이의 질문이 날카롭게 파고든 건 그래서였다. 운전을 못해 이동이 어려웠다거나 일이 바빠 겨를이 없었다는 건 누가 봐도 핑계였다. 이국처럼 특이성을 부여받은 공간이라야 느낄 수 있는 유별함이 배제된 국내는 내 ‘여행 가능' 카테고리로 분류되지 못했던 거였다. 어떤 답을 해야 하나. 생각보다 입이 먼저 열렸다.    

 

 “전 부산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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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했던 남동생은 가장 촉망받던 대학 시기에 어깨 부상을 당했다. 야구 선수, 그것도 유격수라는 포지션을 소화했던 남동생에게 언제고 재발이 가능한 어깨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하고 다시 선수에 복귀했지만 더 오래 야구를 할 순 없었다. 통증은 면역이 없었고, 까마득한 미래는 그 자체가 통증이었다. 도피처럼 떠난 군대를 치러 낸 남동생은 선수가 아닌 프런트로서의 삶을 찾았고, 그렇게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생업에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남동생의 첫 보금자리의 계약이나 구장에 찾아가 응원을 하는 것은 큰 누나인 내 몫이었다.      


 일단 부산에 닿으면, 이곳저곳을 누볐다. 해운대 바닷가에 자리해 값이 꽤 나가는 스페인 음식점에서 먹은 빠에야나, 분홍빛으로 노을 지는 광안리나, 신경을 조금만 덜 써도 금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투리가 들리는 깡통 시장이나, 씨앗 호떡이나 동래파전이나, 주황색 봉투를 머리에 쓴 채 선수의 응원가를 따라 부른 사직야구장이나, 그때그때마다 인기가 있다는 카페에서 인증샷을 찍기 위해 찾은 전포 카페 거리가 떠올랐다. 국내에서 여행 비슷한 걸 해 본 게 부산 정도밖에 없구나. 말로 뱉고 나니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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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리는 6월 14일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 일찍 들어온 나는 부산에 갈 채비를 마친 채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렸다. 갑작스레 내린 비로 도로가 정체돼 도저히 택시가 잡히지 않은 터였다. 방탄소년단 보러 부산에 간다는 과년의 딸을 아직도 터미널에 데려다주는 엄마다. 버스가 출발하자 남동생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도착 즈음에 데리러 나오겠다는 메시지를 받고 눈을 붙였다.     


 부산행엔 늘 남동생과 관련 있는 목적들로 가득했다. 집 계약, 엄마 심부름, 짐 전달. 바다를 찾거나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보는 건 이 목적을 달성한 후 수행하는, 일종의 보상이었다. 해외 투어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낸 방탄소년단이 약 2년 만에 국내 팬미팅인 ‘머스터(Muster)’를 부산과 서울에서 개최한다 발표했고, 나는 운이 좋게 부산 머스터에 당첨(가격을 붙여 비싸게 되파는 것을 막고자 추첨제를 도입해 팬클럽 회원임에도 티켓을 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순전히 운에 달려 있었다)됐다. 머스터 참석이라는 나만의 이유를 먼저에 둔, 첫 번째 부산이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는 노포 버스 터미널에서 남동생과 만났다. 캐리어를 뒷좌석에 무심히 올린 남동생이 운전석에 앉았다. 비가 내려 더욱 짙게 어둠이 내린 부산의 밤. 남동생의 까만 승용차가 부산의 도로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남동생은 맥주 한 캔, 나는 와인 한 병. 별다른 대화 없어도 깔깔거릴 수 있는 금요일 밤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연달아보고 일어난 토요일. 옅은 숙취가 느껴지지만 지체할 수 없다. 지하철을 타고 서면으로 향했다. 이번 머스터의 주제는 '매직샵(Magic Shop)'. 힘이 들 때 우리가 함께 있는 네 마음의 매직샵의 문을 열고 들어 와 언제든지 쉬어도 된다는 가사를 지닌, 동명의 방탄소년단 팬 송(Fan song) 제목을 따 왔다. 서면의 주요 도로에 이 매직샵 공식 배너가 주룩 걸려 있었다. 복잡한 서면의 지하상가 출구를 몇 번씩 들고 나며 모든 멤버들의 배너를 찾았다.     



 데뷔 6주년을 축하하는 컵홀더를 끼워 주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히츠마부시로 점심을 먹었다. 부산의 경우 전석이 스탠딩이고, 지금부터 족히 10시간은 걷고 뛰고 이동할 테니 장어로 조금이나마 힘을 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고 종합운동장역으로 향했다.     



 모두가 우르르 내린 종합운동장역에서부턴 가히 방탄소년단 세상이었다. 광고 전광판마다 방탄소년단이었고, 공연장 가는 길은 방탄소년단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표기해두었다. 부산 출신 멤버 지민의 데뷔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은 출구로 이어지는 길에 전면 래핑 돼 있었다. 지상으로 나와 공연장으로 이어지는 길엔 개인들이 만들어온 슬로건이며 부채 등 굿즈들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 모든 사람들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흥분들로 가득했다.     



 티켓과 신분증 검사를 마친 뒤 아시아드 주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저녁 7시에 시작인 공연 전까지 팬들이 모여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한 공간이었다. 대형 전광판에서 방탄소년단 영상이 나오는, 우리들만을 위한 장소. 방탄소년단이 모델인 업체들의 부스에 방문해 참여하면 다양한 선물들을 나눠주고 있었고, 얌얌존에는 큐브 스테이크며 소떡소떡이며 배고픔을 달랠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스탠딩 대기가 시작됐다. 입장 구역에 맞춰 나눠 이동했다. 전석이 스탠딩이라 안전문제도 있고 공연장도 규모가 작은 아시아드 보조경기장이기에 입장에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더위에 지친 데다 발목이 벌써 시큰거리며 아팠지만, 공연장으로 입장이 시작되자마자 걱정이 싹 걷혔다. 아무렴 어떠랴. 방탄소년단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고통쯤은 감내해야지.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충동이 가시지 않는 이상 파도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다 공연을 제대로 즐길 수 없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앞이 아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 머스터 무대는 360도로 돌아다닐 수 있게 돼 있었다. 어디든 전체 무대가 잘 보였다. 공연 시작 시간이 됐다. 어둠이 내리고 매직샵의 문이 열렸다.      



 스포일러가 전혀 없는 첫 공연. <둘 셋>의 노래에 맞춰 등장한 방탄소년단이 이제껏 한 번도 무대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수록곡 <HOME>, <Love maze>, <134340>을 연달아 불렀다. 첫 음이 흐르자마자 울컥해 눈물로 시야가 가리지 않게 심호흡을 몇 번이고 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 나이대의 고민을 솔직하게 녹여냈던 그 당시의 앨범에 담긴 노래들로 공연이 쭉 이어졌다. 어떻게 <JUMP> 다음에 <등골브레이커> 일 수 있지 하는 생각밖에 안 했다. 실제 무대를 처음 보는 곡들이 많아 상념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파트를 나눠 부른 <땡>이며 <팔도강산>, <Ma city> 등의 무대가 계속되었다.      


 360도 무대를 누비는 멤버들 덕에 누구 하나 부족할 것 없이 멤버들과 가까이 호흡할 수 있었다. 남준이가 '자본주의의 힘'이라 지칭할 정도로 머스터만을 위한 연출이며 노래 선정, 안무, 영상 등을 굉장히 신경 써서 준비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해외 투어를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연습했다는 말처럼 오랜만에 하는 한국 공연에 1년에 한 번 있는 팬미팅임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목청이 터져라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르는 팬들과 그런 팬들을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멤버들은 이 매직샵이 존재하는 모든 이유였다.  

   


 마지막 곡이 끝난 멤버들이 인사를 마치고 무대 밑으로 사라졌고 동시에 폭죽이 터졌다. 밤하늘을 수놓는 찰나의 반짝임을 바라봤다. 공허함이나 허무가 찾아오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벅찬 풍만함만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며,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하는 방탄소년단의 팬들을 위해 안전요원으로 나온 경찰들이며 공무원들이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조잘대는 팬들이며 도시의 소음을 즐기며 지하철을 탔다.     


 광안대교, 영화의 전당, 부산 타워가 보라색으로 물든 밤. 지민이가 보라색 광안대교를 보여주고 싶다며, 공연 후의 달뜸을 고스란히 담은 채 라이브 방송을 했다. 와인을 마시며 취기에 미끄러지는 오타를 몇 번이고 수정하며 답글을 달았다. 내 가수가 되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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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노트북을 챙겨 집 앞의 카페를 찾았다. 아메리카노 한 잔에 부은 눈이 이제야 좀 떠지는 것 같다. 괜히 이것저것 글을 썼다가 미뤄뒀던 몇 가지 쇼핑을 마치고 어제 공연 사진들을 저장했다.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비가 올 듯 침잠해 있는 카페 너른 창 너머의 푸른 가로수를 바라봤다.

      

 여행으로 떠난 이국에서 특별한 걸 한 건 아니었다. 알고 보면 'T world'라든가 'CU 편의점' 같은 상점을 내다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거리를 걷고, 식사할 레스토랑을 검색해 고르거나 미술관에 갔다. 그게 다였다. 도리어 여행이기에 여행 같지 않아 보이려 했다. 일상에서 벗어나려 여행을 떠나놓곤 그곳에선 일상을 흉내 냈다. 궁극엔 여행이 흐려졌다.      


 느지막이 일어나 집 앞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는 것. 이국의 풍경이란 허울에 숨어있던 실제 염원은 사실 이토록 평범한 것이었다. 어두운 낮 덕에 채도가 더욱 높아진 샛 초록의 나뭇잎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카페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여행이구나.

 장소가 어디든, 평소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 모든 곳이 여행지구나.     


 불현듯 그랬다.          


 매직샵의 오프닝엔 장미 꽃잎이, 클로징엔 벚꽃 잎이 흩날렸다. 방탄소년단의 노래 <매직샵(Magic Shop)>의 가사, ‘필 땐 장미꽃처럼, 흩날릴 땐 벚꽃처럼, 질 땐 나팔꽃처럼, 아름다운 그 순간처럼’을 따온 연출이었다. 영원히 시들지 않은 종이 꽃잎들이 머리를 스치고 어깨를 스치고 떨어지며 내게 무언가를 묻히고 간 것이 틀림없다. 단지 매직샵의 문을 여닫고 온 것뿐인데 여행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 덜컹거리는 좌석에 앉아 사진첩을 넘겨 봤다. 파리며 베를린, 시카고며 방콕에서 찍은 사진들에서 매직샵 사진으로 넘어왔다. 에펠탑도 브란덴부르크문도 존 핸콕 타워도 왓 아룬도 없는 매직샵에서 나는 가장 활짝 웃고 있었다.     


 방탄소년단이 또 한 번, 내게 마법을 부렸다.


 오랜만에 아주 멋진 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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