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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y 23. 2019

이유? 그런 거 없는데요?

덕질은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가에 관한 고찰 3


              

 이른 시간 터미널의 고요함은 도대체 익숙해지지가 앉는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나다니는 스산한 플랫폼 앞 의자에 앉아 쩌-억 하품을 했다. 여기서 인천공항까지 4시간, 도착해 수속하고 탑승하는데 2시간, 그렇게 샌프란시스코까지 11시간, 다시 경유를 위해 대기하는 4시간, 마침내 시카고까지 4시간. 장장 만 24시간이 넘는 이동을 앞둔 새벽이다. 퇴근 후 짐을 싼다고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나온 데다 버스나 비행기에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는 편이라 고된 이동이 예상됐다. 다시 하품을 쩌-억 했다. 눈물이 고였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은 진리다. 좁은 좌석에 비틀어가며 얕은 쪽잠을 잠깐 청한 것을 제외하곤 도저히 쉬질 못했더니 몸에 열이 오르는 게 심상치가 않다. 뭘 먹었다간 체하기까지 할 것 같아 기내식을 온통 물렸다. 오늘은 그저 푹 자야겠다 싶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시간에 예약해 둔 레스토랑 일정을 취소했다. 첫날부터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면 이 일주일이 완전히 낭패다. 아플 권리는 덕후 사전에 용납될 수 없는 사치다.     


 세계 주요 도시 스타디움에서 개최되는 방탄소년단의 <Speak Yourself> 월드 투어의 일정이 공개되자마자 날짜를 확인했다. 5월은 북미와 남미, 6월은 유럽이라. 담당 프로젝트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6월 이후는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없을 테니 ‘역사적인’ 웸블리와 ‘내 사랑’ 파리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 고단한 비행 스케줄과 현지 치안 사정 등을 고려하니 상파울루 역시 포기. 휴가를 일주일 정도 낼 수 있으니 LA, 시카고, 뉴저지 중 선택을 해야 했고, 그렇다면 오래전 우연히 본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회색 도시 시카고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카고 콘서트 예매를 성공한 뒤 항공권과 호텔 예약을 바로 마쳤다. 구구절절한 이유나 사연 없이, 그래서 시카고여야 했다.     


 현지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탈 때의 탑승구만큼 이방인의 위치를 자각하는 순간이 또 있을까. 속사포처럼 빠른 영어 안내를 있는 힘껏 집중해 들었다. 이제부터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 좌석은 제일 끝 왼쪽 창가 자리. 빨리 짐을 찾아 나갈 필요가 없기에 맘 편히 가장 뒷좌석을 미리 지정해놓은 것이었다. 시카고까지 또 어떻게 피곤함을 버티나 하며 짐을 정리하는데 옆 좌석에 내 또래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분이 앉았다. 인천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서부터 낯이 익은 분이었다. 까만 후드에 운동복 바지 차림이 ‘혹시…' 하는 마음을 갖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슬쩍 본 핸드폰 잠금화면은 호비(제이홉), 바탕화면은 윤기(슈가)랑 태형(뷔)이다. 나는 아주 특별한 동시에 보통의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해 우버 택시를 타고 밀워키니 인디애나니 하는 길들을 지나 도심으로 진입했다. 현지 시간 오후 6시. 시차 덕분에 시카고까지 고작 10시간만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그래서 모든 피로가 별거 아닌 것 같아졌다. 삐쭉 서 있는 마천루의 능선이 흐린 하늘 아래 부옇게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바로 앞에 있는 마트에 들러 캘리포니아산 와인 한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서 들어왔다. 역시 약보단 와인이다. 따뜻하게 씻은 뒤 보송보송한 호텔 침구에 구겨져 와인을 마시니 긴 시간을 건너 시카고에 도착했다는 실감 따위 느낄 새 없이 깊은 수마에 빠졌다.      



 조금 찌뿌드드한 것을 제외하곤 몸 상태가 다행히 괜찮다. 갓 구운 베이글로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한 뒤 시카고 미술관을 찾았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규모에 고흐, 모네, 쇠라, 자코메티, 앤디 워홀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에 가장 기대했던 곳이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아 작업실처럼 만들어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보곤 하는 태형이가 지난 투어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이 시카고 미술관이라 했던 것이 단박에 이해될 정도였다. 특별 전시로 꾸려진 램브란트의 자화상 코너까지 보고 나니 미술관에 들어온 지 4시간이 넘었다. 미국의 대표 작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엽서를 사서 나왔다. 오전 내 흐렸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개어있었다.      



 미시간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스트 잭슨 드라이브를 따라 먼로항을 향해 걸었다.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보고 있는 수평선이 미시간 호수의 것임을 알면서도 꼭 바다 같다. 육지 사람이 상상하는 바닷가 휴식 모습이 꼭 지금의 풍경 같아서다. 규칙적인 물결, 이따금씩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과 자전거 차임벨 소리, 저만치의 대화들. 고즈넉하고 여유롭다. 노래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다 일어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곳을 찾아 잠깐의 휴식을 취했던 남준이와 태형이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그들이 봤던 풍경. 여기에 내 기억을 슬쩍 얹어 남겼다.     



 날이 개니 클라우드 게이트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런 유명 관광지에 오면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어 좋다. 여길 찾게 한 수많은 이유들이 모여 긍정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사진으로 오늘을 남기는 저마다의 표정들이 비슷하게 밝다.     



 방탄소년단의 콘서트가 열리는 주말을 포함해 일주일 정도 오픈되는 <Speak yourself> 팝업스토어는 시카고의 가장 중심 거리인 사우스 스테이트 스트리트에 자리했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찾아왔는데, 그럼에도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끝자리에 섰더니 금세 내 뒤로 몇몇이 더 늘었다. 수 분을 기다린 후 입장한 팝업 스토어는 일종의 방탄소년단 소우주였다. 정면의 대형 스크린엔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가 연달아 나오고 있고, 다양한 MD 상품들이 보기 좋게 디스플레이돼 있었다. 쇼핑을 빨리 마쳤다. 그리고 마치 실제 공연을 보는 양 떼창을 하고 춤을 따라 추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아 몇 곡을 감상했다. 먼저 다가와 사진을 찍어줄까 묻는 직원들 덕에 환한 웃음이 담긴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여행에 계획을 철저히 세우는 편과 무계획의 충동에 몸을 맡기는 편 중 나는 전자에 가까운 여행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왕 떠나온 곳들을 이왕이면 좀 더 즐겨보고 싶어 욕심을 많이 낸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조금 더 늦게 자고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먹는. 시카고 셋째 날인 5월 10일 금요일, 나는 동틀 무렵 잠이 들어 점심때 느지막이 깼다. 여권에 수십 개의 도장을 찍으며 여행을 다녔지만 이 시간에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칼바람을 뚫고 들어간 카페에서 따뜻한 말차 라테로 몸을 녹였다. 이른 겨울의 비릿함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챙겨 온 옷들은 온통 얇은 봄옷들뿐. 중심가완 살짝 떨어져 있지만 작은 상점들이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는 밀워키 애비뉴로 향했다. 옷을 사야만 했다. 편집숍 한 군데에 들어와 코듀로이 바지를 고른 뒤 구경하는데 띠링- 트위터 알람이 울렸다. ‘WASSUP CHICAGO’라는 문구와 함께 제이홉과 지민이 함께 찍은 사진이 업로드됐다. 어라? 거리가 낯이 익다. 얼른 가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건너편의 상호명이 사진 속 상호명과 일치하다. 고른 바지를 제대로 입어보지도 않은 채 계산해 나와 도로를 건넜다.    

  


 이미 너 다섯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콘서트를 보기 위해 이 근처 에어비앤비에 묵고 있었는데, 트위터에 사진이 올라오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왔단다. 나 다음으로 도착한 엄마랑 같이 온 어린 딸도, 그들과 호들갑을 떨며 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고 찍어주었다. 이런 반응을 알기에 이곳을 떠난 뒤 사진을 올렸겠지만, 이 사진이 업로드된 때 바로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은 모든 우연이란 이름들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거리를 떠나고 싶지 않아 근처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오랜 시간 앉아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명제에 수렴하고 있단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늦은 점심을 먹어 저녁을 걸렀더니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호텔 근처에서 초밥을 포장했고, 샴페인 한 병을 샀다. 첫날은 호텔 앞 마트 다녀온 거 말곤 한 게 없었으니 고작 어제 하루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을 뿐인데 왜 이렇게 오래 있었던 것 같지. 내가 하는 여행이란 게, 보통 이런 것 같다. 모든 오감을 열고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즐기니 보통의 일상보다 훨씬 더 잘 살아낸다. 게다가 이번엔 걸음걸음에 덕질 대상의 추억도 추가로 덧입히고 있다. 다 잊었다 생각하다가도 돌아오면 분명 기시감에 허덕일, 충분함으로 가득한 하루가 지나고 있다.          

    

 오늘은 콘서트를 보는 것 말곤 특별한 일정이 없어 호텔 가까이에 있는 시카고 현대 미술관을 찾았다. 조용히 미술 감상을 하고 공연장에 가면 되겠다 했는데 미술관 마당에서부터 로비까지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물어보니 오늘은 패밀리 데이로 11시부터 3시까지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는 날이란다. 토요일 이 시간이면 완벽히 피크 타임이고 관람객이 가장 많을 시간인데, 이럴 때 아이들 동반한 가족들을 위해 무료 프로그램을 연다니. 선심 쓰듯 평일 오후에 내어놓는 우리의 한정된 할인 혜택이 비교되어 스친다. 작가의 의도를 유추하며 보는 현대 미술 작품들 대신 아이들이 마음껏 뒹구는 모습들을 감상했다.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기어코 비가 내린다. 콘서트가 시작되는 저녁엔 그친다고 하는데 그냥 맞고 다닐만한 수준의 비가 아니다. 우산을 하나 사서 나왔다. 옷을 여러 겹 껴입긴 했는데 섬유조직 사이를 뚫고 찬 기운이 스며든다. 밥을 먹고 호텔에서 몸을 좀 녹인 뒤 나왔다. 거리는 방탄소년단의 팬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방탄소년단 팬이라는 게 그들을 표현하는 아이덴티티로 작용하는 듯했다. 솔저필드까지 곧장 가는 146번 버스 안이 전부 팬들로 메워졌다. 이 미국 대도시의 일반 시내버스를 자신들의 팬으로 채우는 가수가 내 가수구나. 직접 보니 피부로 느껴진다.      


 초행길이라 서둘러 나왔더니 오히려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비에 젖은 몸을 녹일 곳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공연장에 일찍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핫도그를 사 먹곤 차양 밑에 잔뜩 움츠리며 섰다. 옷을 좀 더 챙겨 입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추위를 당해내기엔 역부족이다. 가만히 있어도 턱이 덜덜 떨린다. 다행인 건 일기예보처럼 비가 잦아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추울 거, 다리라도 덜 아파야겠다 싶어 일찍 좌석에 앉았다. 계단형 1층 좌석이라 무대를 보는 시야가 괜찮았다. 춤을 추듯 떨리는 허벅지를 누르는 손이 하얗게 텄다. 그렇게 한 시간 여의 시간을 버텨내니 저녁 7시 30분이 되었다. 비는 완벽히 멈췄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터졌다.      



 첫 곡 <디오니소스>가 방금 시작된 것 같은데 어느새 끝 곡 <소우주>의 전주가 흘러나온다. 분명 <Not today>, <Fake love>며 <전하지 못한 진심>, <Mic drop> 등을 크게 따라 부르고 즐기긴 했는데 벌써 끝날 시간이라니.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리프트 아래로 사라지는 멤버들의 마지막의 마지막 모습이 사라지자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허공을 향해 파바박 터지는 허무의 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세 시간의 시간이 지났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콘서트는 끝났고 이 밤이 되었다. 몸이 꽁꽁 얼었다.     


  몸을 한껏 움츠리며 경기장을 빠져나오는데 이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는다. 호객행위를 하는 인력거 기사들은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크게 틀어놓았고, 버스킹을 하는 퍼포머는 ‘BTS’를 외친다. 곳곳에 경찰들이 있음은 당연했다. 내 앞 뒤로 마치 두터운 바리게이트마냥 함께 걷는 이 많은 사람들 안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밤 11시. 시카고의 밤은 무섭다는 말에 지레 겁먹어 마주하지 못했던 이 시간의 색감을 안전함 속에 감상한다. 걷다 보니 조금씩 사라지는 사람들. 그러나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은 BTS 후드 집업을 입고 있고, 내 뒤 저만치 걷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슬로건을 들고 있다. 함께라는 안정감은 이 밤을 선물해주었다.      



 시카고에서 꼭 먹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피자, 햄버거, 핫도그다. 이렇게 미국적일 수가 있을까. 늦은 점심으로 선택한 햄버거로 해장을 마쳤다. 오늘은 애석하게도 공연이 시작되는 시간부터 비가 온단다. 목에 두를 손수건도 사고, 두툼한 양말도 사고, 짐을 좀 더 챙기기 위해 큰 사이즈의 PVC 가방도 사고, 우비도 샀다. 콘서트도 예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식 MD를 판매하는 부스가 어제 입장한 곳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도, 투명한 PVC 가방은 크기가 조금 커도 융통성을 발휘해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도, 우산이 반입 금지이므로 우비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두 번 고생할 일은 없었을 텐데.      


 어제 바로 입장하느라 구매하지 못한 MD 상품도 사고, 공연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기 위해 어제보다 더 빨리 출발했더니 146번 버스가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이제는 익숙한 거리를 바라봤다. 공연장 가까운 식당에선 bt21 머리띠를 나눠 낀 가족들이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다. 자녀의 관심사를 지지해주고 같이 나누려는 부모들의 노력과 콘서트 관람을 앞둔 아이들의 떨림이 그대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자면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영원히 면역되지 않을 부분이다.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는 솔저 필드. 꼼꼼한 가방 검사 덕에 입장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 온 다른 한국인 팬과 말을 트지 않았더라면 무척 지루했을 시간이었다. 파우치 하나하나 다 열어 반입 금지 물품이 없음을 확인받은 뒤 공연장에 입장했다. 한국인 팬과 서로 공연을 잘 보자고 인사한 뒤 그라운드 석으로 들어섰다. 무대와 나름 가까운 좌석이라 시야가 좋은데 싶다가도, 첫 곡부터 바로 스탠딩 해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현지 팬들의 열정을 알기에 키 작은 나는 벌써 걱정이 푹. 빗방울이 거세지길래 우비를 입었는데 공연 보는 내내 비 오고 추울 생각을 하니 벌써 걱정이 푹. 빗물에 무대가 미끄러워 혹시나 공연하다 멤버들이 다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벌써 걱정이 푹- 그랬다. 큰 탈 없이 공연만 잘 끝났으면 좋겠다.     


 첫 곡 <디오니소스>의 전주가 흐르자마자 역시 모두가 일어나 응원봉과 슬로건을 높이 들고 흔든다. 덕분에 요리조리 피해서 봐야 했다. 머리에 쓴 우비는 자꾸 뒤로 넘어가서 쓰나 마나 한 상태로 몸이 비에 젖어갔고, 핸드폰엔 물이 들어갔는지 액정에 금이 생기더니 급기야 피사체가 여러 겹으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도저히 안 돼 이건 무조건 남겨야 해’ 하는 곡엔 다시 꺼냈다가, 일정 부분 포기하고 소리 높여 노래를 따라 부르고 응원을 하다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 영상에 담곤 했다. 완전히 난리 부르스.     


 직선이었던 ‘사람’이 너를 만나 모서리가 잠식당해 ‘사랑’이 된다는 남준의 솔로곡 <Love>가 끝나면 멤버들이 한 명씩 올라와 런웨이처럼 걸은 뒤 본 무대에서 시작하는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전주가 흐를 때와 침대 위에 누운 것처럼 눈을 감고 있다가 노래 시작과 동시에 삼백안의 눈을 치켜뜨는 태형의 <Singularity>에선 속절없이 울어버렸고, 수 만 명이 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는 <Wings>나 <Make it right>에서는 마냥 행복해서 웃었다. <Just dance>에선 누구보다 크게 제이홉의 이름을 외쳤고, 공연장에 핸드폰의 불빛으로 가득 메운 <소우주>에선 마치 무대에 선 멤버들의 마음처럼 벅찼다. 어제와 같은 순서의 공연이었으나 완벽하게 다른 공연이었다. 매일 봐도 매번 다를 것이다.      


 이런 추위의 야외 콘서트는 방탄소년단도 처음이었을 테다. 연신 새어 나오는 입김이 마치 개인 구름처럼 개인을 에워싸고, 추워 빨개진 코를 감싸 쥐며 동동거리는 건 나와 똑같았다. 같이 비를 맞은 사이, 라는 달콤한 문장은 이미 방콕에서 선점했으니, 우리 함께 추위를 나눈 사이, 라는 다정한 문장 하나를 더할 때다. “와 진짜 인간적으로 시카고 너무 춥지 않았어?”하면 “5월에 체감 기온 영하가 말이 돼? 진짜 너무 하더라”하고 대꾸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경험을 나눈 사이.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픈 데다 발목과 발가락이 완벽히 얼어 도저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껴 버스에 올라탔다.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뿌예진 창문에 발도장 만드는 장난을 하며 오늘도 거짓말처럼 흘러가 버린 시간을 반추한다. 얇은 봄옷 몇 가지를 껴입은 채 추위에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공연을 즐겨보겠다고 부득불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나를, 방탄소년단이 아니었다면 결코 견디지 않았을 일 하나를 완수한 이 애정을 함께 덧붙여서.     



 시카고 떠나기 전날. 아침 일찍 링컨 공원 동물원을 찾았다. 남준이와 태형이가 작년 시카고 공연 때 이 동물원에 다녀갔었다. 도심과 가까이 무료로, 인공적인 장치를 최대한 배제한 동물원은 산책로로도 손색이 없었다. 날이 화창하게 개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이 나서 다녔던 건 알파카를 실제로 처음 봐서도, 얼룩말을 보고 눈이 동그래진 아이의 재잘거림이 귀여워서도, 풀을 질겅질겅 씹어먹는 고릴라가 정말 사람 같아서도 아닌, 알파카와 아이들과 고릴라를 보며 웃었을 남준이와 태형이를 생각해서였다.      



 첫날 저녁으로 예약했다가 컨디션 난조로 취소한 후 마지막 저녁 식사로 다시 예약한 랄프 로렌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예약한 자리에 앉아 메뉴를 살폈다. 마지막 저녁답게 조금은 사치스러워도 좋다. 아스파라거스 전채 요리에 필레미뇽 스테이크, 피노누아 와인을 주문했다. 멤버들이 올려주는 사진과 팬들이 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서빙된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황송하게, 행복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도심의 색감이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레스토랑과 멀지 않은 존 핸콕 센터로 걸음을 빨리 했다. 도심에 어둠이 내리기 직전. 전망대 가기에 가장 알맞은 시간이다. 전망대까진 운이 좋게 전혀 줄을 서지 않고 도착했다. 94층까지 순식간에 도착하는 엘리베이터도 혼자 탔다. 이런 작은 행운으로 여행을 마무리한다. 통유리로 내려다보는 시카고의 풍경에 가만 넋을 놓았다. 자연보다 도심에서 위안을 얻는 나 같은 도시 성애자에게 이토록 완벽한 뷰가 있을까. 산책하기 좋았던 네이비 피어도, 수없이 걸어 다닌 직선의 거리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는 솔저 필드도 이 높이에서 보니 완전히 아득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빌딩의 네모난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선명해졌다. 어느새 완벽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미련 없이 전망대를 빠져나왔다. 지도를 한 번도 살피지 않은 채 호텔까지 도착했다. 일주일 새, 시카고는 아는 곳이 되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때. 다시 오헤어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뉴저지 콘서트를 위해 곧 뉴욕으로 이동할 멤버들인데, 언제 출발하려나. 그걸 생각하며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쏜살같이 흐른 시카고의 일주일, 그중 신기루 같았던 이틀의 공연을 생각한다. 수속을 마친 가벼운 몸으로 탑승구 앞 스타벅스에 앉았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Intro: Persona>를 재생시켰다.      


 '야 이 짓을 왜 시작한 건지 벌써 잊었냐. 넌 그냥 들어주는 누가 있단 게 막 좋았던 거야.’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제 올 때와 똑같은 과정으로 만 24시간이 넘는 이동을 해야만 한다. 바닥에 놓았던 가방을 챙겨 들며,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신이 음악을 시작한 처음을 잊지 않으려는 남준이의 가사가 자연스레 개사됐다.      


 '야 이 여행을 왜 시작한 건지 벌써 잊었냐. 넌 그냥 그들이 있단 게 막 좋았던 거야.’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그 모든 것들이 수렴한 하나의 명제.


 아, 역시 나는 방탄소년단이 진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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