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삶을 얼마나 이롭게 하는가에 관한 고찰 2
내가 보통 여행을 준비하는 순서는 이렇다.
1.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그제와 같을 일상을 자각한다.
2. 여기가 아니면 어디든 좋을 것 같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3. 휴가 내기 적당한 날짜를 정한다.
4. 마음이 쏠린 여행지의 항공권을 결제한다.
5. 숙소, 맛집, 관광지 등을 검색해 일정을 짠다.
6. 일상이 좀 버틸만하다.
7. 여행을 즐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준비하는 순서는 이랬다.
1. 방탄소년단이 방콕에서 <Love yourself> 콘서트를 한다.
2. 방콕을 가야 한다.
3. 공연 티켓을 구매한다.
4. 공연 날짜에 맞춰 여행 일정을 짠다.
5. 일상을 버틸 수가 없다. 빨리 공연 보러 가고 싶다.
6. 공연을 즐긴다.
7. 여행은 덤이다.
“진짜 방탄소년단 보러 방콕을 간다고?”
“왜? 그럼 안 돼?"
몇 번이나 반복된 이런 류의 대화는 도리어 진짜 궁금해하는 내 질문으로 대부분 끝이 나곤 했다. 공연은 토, 일 각 1회씩 총 2회. 공연 하루 전인 금요일 오전의 방콕행 비행기를 기다리기 위해 탑승구 앞에 앉아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하나 혹은 둘씩 앉아 있는 여성분들이 꽤 있었는데 ‘혹시' 하고 보면 이 분 크로스백엔 쿠키 인형이, 저분 팔 엔 망이 담요가, 저분의 힙색엔 슈키가, 내 앞에 줄 선 분 목엔 타타가 ‘역시’ 걸려 있다.
방탄소년단이 제작에 참여한 bt21 캐릭터는 일종의 신호나 암시다. 이거 봐. 방탄소년단 보러 방콕 가는 사람이 나 말고도 이렇게 있다고. 모두 나와 엇비슷한 여행을 준비했을 사람들을 둘러보며 일종의 동료애에 이 출발의 근간이 전율처럼 훑어 왔다. 탑승을 시작하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시작도 과정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여행을 하기 위해 재빨리 줄을 섰다.
시푸드 기내식은 새우 두 점을 집어 먹는 걸로 밀어놓고 기내 엔터테인먼트에 들어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라이브 에이드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수 만 명이 들어 선 웸블리 스타디움. 그곳을 가득 채운 음악의 힘, 누군가의 찬란했던 찰나의 청춘, 떼창의 전율. 삼십 년이 지나도 아직도 회자되는 이 전설의 공연장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방탄소년단은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것도 2회나. 빈 속에 마신 화이트 와인 한 잔 덕에 이리 울렁 저리 울렁. 내가 이룬 성과처럼 자부심이 폭발한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악명 높은 4월의 방콕 더위를 마주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고 숨을 들이켤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느껴진다. 호텔이 있는 프런칫 역까진 1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트래픽 잼으로 꼼짝없이 두 시간을 도로에서 허비해야 했다.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도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거스름 돈을 남겨주는 택시 기사의 얼굴은 5년 만에 다시 온 방콕의 첫인사였다.
텅러 지역은 곳곳에 숨겨진 비밀의 정원 같은 카페나 식당을 찾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더운 나라이기에 볼 수 있는 푸른 울창함을 갖춘 카페 한 곳에 들렀다. 시원한 우롱차를 마시며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이어폰에 노래를 연결한 뒤 SNS 앱을 켰다. 꼭 방콕의 텅러 카페가 아니어도 되는 일을 굳이 방콕의 텅러 카페에서 하는 일. 여유를 계산할 수 있는 건 떠나온 자의 낭만이다.
땀을 식힌 후 카페 문을 나섰다. 쉼 없이 울리는 단체 톡방의 알람을 껐다. 이 더위가 따뜻한 이불처럼 느껴지게 하는 간단한 행위였다. 점심을 먹고 호텔에 돌아와 태닝과 수영을 반복하며 즐기는 서양인들 옆에 자리 하나를 잡고 쉬다가 나왔다. 응원봉, 슬로건 등 공연에 필요한 짐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챙겼다.
라차망칼라 경기장까지 가까워져 간다는 건 달라진 거리 풍경으로 알 수 있었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차림새는 팬임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서부턴 차라리 걷는 게 빠를 것 같아 적당한 곳에 내린 뒤 그들의 행렬에 동참했다. 좁은 인도는 이때만을 기다렸을 노점상들 덕에 더 복잡해져 있어 가방을 앞으로 안은 뒤 조심히 움직여야만 했다.
중앙 제어가 가능하게 응원봉 페어링을 마친 뒤 공연장에 일찍 들어와 앉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이라 환한 스타디움 내부를 둘러보았다. 주로 혼자 영상이나 글을 보며 좋아했던 사람이라 이렇게 수많은 팬들 사이에 뚝 섞이면 먼지보다 못한 내 아득한 존재감에 회의가 들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은 데도 환호할 충분할 준비가 완료된 이 이국의 팬들 속에 섞이니, 나는 그들의 언어를 통역 없이 직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지닌 사람인 것만 같다. 상대적인 감정은 항상 위험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상대적인 도취를 조금 즐겨보려 한다.
긴 팔 긴 바지에 조끼까지 쓰리 피스로 갖춰 입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더운 나라에서 태어나서 이 날씨가 적응이 이미 돼 있나 보다’ 하며 내 긴 머리를 꽉 묶곤 했는데, 공연장에서 땀 닦는 현지 팬들을 보니 더운 건 다 똑같다 싶다. 공연은 시작도 안 했는데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까지 혼재돼 이 스타디움 전체에 거대한 더위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전광판으로 재생되는 뮤직비디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연신 부채질을 했다. 하늘의 색이 조금씩 짙어진다. 팬들의 입장이 완료될 때까지 조금 기다린 저녁 7시 30분, 조명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2시간의 시차, 6시간의 비행, 30시간의 기다림, 그 모든 이유.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시작된다.
공연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순식간에 흘렀다. 시간을 확인하니 분명히 두 시간 반이 지나있고, 핸드폰 사진첩엔 공연 모습이 영상으로 담겨 있는데도 그랬다. 수십 번을 본 콘서트 실황 영화를 다시 한번 더 보고 나온 기분이다. 어리둥절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떠밀리듯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라차망칼라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메트로는 걸어서 1시간 거리인 데다가 택시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호텔까지 이동할 차량을 미리 예약해놓았던 터였다. 기사 님을 만나려면 정확한 주소가 필요하기에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을 지정했더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이름 적힌 종이를 들고 호텔 로비에 모여 있었다. 여러 이름들 중 내 이름을 찾았다. 주차된 차가 있는 곳까지 함께 이동하면서 종종걸음을 걷는 기사 님의 등과 방탄소년단 상품을 파는 상인들의 손과 모처럼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가게 점원의 얼굴에서 넘쳐 나는 생의 기운을 느꼈다.
경기장 주변을 벗어나니 도로는 한산했다. 방콕에 와서 처음으로 느낀 속도로 금세 호텔에 도착했다. 사다 놓은 와인을 꺼내려다 그마저도 귀찮아져 푹신한 침구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하는 태국어 인사말을 건넬 때를 제외하곤 공연만으로 꽉 채 운 오늘의 무대를 다시 보고 있으니, 공연장에서 나눠 받은 피켓의 문구가 눈에 콕 박힌다. ‘우리라서 다행이다. 함께여서 다행이다’
한산한 현대미술관을 오전에 둘러보고, 콜드 파스타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고, 재즈가 흐르는 올드 타운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하루의 반나절이 훌쩍 지났다. 오늘은 공연장에 좀 더 여유 있게 출발하려다 예외는 언제든 존재할 수 있으니 적당히 서둘렀다. 어제와 엇비슷하게 붐비는 공연장 주변을 빠르게 통과해 입장했다. 정면에 가까운 1층 앞 좌석이라 그라운드 석이었던 어제보다 시야가 훨씬 좋았다. 무대도 가까워 기대감에 떨리기 충분했다.
“Where are you from?”
응원봉을 흔들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더니 옆에 앉은 팬이 말을 걸었다. 랩 가사까지 곧잘 따라 하는 내 발음 덕에 물어본 듯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눈에 띄게 좋아한 그녀는 태국인이었고, 종종 말을 나누며 공연을 기다렸다. 내가 선택하지 않아 장단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내 국적과 모국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게 하는 특장점이었다. 두웅. 공연의 시작을 울리는 음악이 흐르고 공연장에 다시 어둠이 내렸다. 이 월드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시작됐다.
공연의 3분의 1쯤이 지나고 지민의 솔로곡이 시작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에 형태가 보일 정도로 굵은 빗방울이었다. 우왕좌왕하던 찰나에 옆자리의 태국 팬이 본인의 우비를 함께 나눠 쓰자고 했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과 짐들을 가방에 넣은 뒤 의자 아래에 두었다. 비옷을 머리에 얹고 태국 팬에게 감사함을 표현했다. 공연은 딜레이 없이 계속됐다. 팬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되려 비바람도 이 열기를 막을 순 없다며 더 신이 나서 춤을 추는 멤버들을 두 눈으로 담았다. 손에서 핸드폰을 없애니 공연이 공연으로서 더 다가왔다. 비가 오지 않으면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지나갈 뻔했다.
방탄소년단의 초창기부터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준 나라의 팬들 답게 방콕 콘서트는 이틀 내내 이 곳 날씨처럼 뜨거웠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사를 표현하며 앵콜 무대까지 끝났다. 비옷을 덮어준 태국 팬에게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에 산 멤버 부채 하나를 답례로 선물했다. 그녀의 미소에 내가 되려 갑절로 행복해졌다. 공연의 여운에 빠진 얼굴들을 둘러보며 나를 포함한 우리, 방탄소년단과 함께 비를 맞은 사이, 그것 참 로맨틱한 사이 아닌 가 생각했다. 이 수 만 명의 이름 하나하나는 몰라도,
"2019년 4월 7일, 방콕 콘서트 기억나? 그때 갑자기 소나기 쏟아져서 그 비 다 맞으면서 공연했었잖아. “
"맞아. 바람까지 불어서 시야도 흐려 혼났잖아. 근데 또 신기하게 한 두 곡쯤 하다가 그치고 다시 내리고 그래서 텐션을 적당히 올리기 좋은 분위기였어.”
“그랬지. 기억난다. 진짜 더웠는데 비 와서 괜찮았던 것도 있어. 공연 진짜 재밌었는데. 그치?”
같이 있었기에 추억할 수 있을 하루를 보냈다는 뿌듯한 감정을 안았다. 호텔로 돌아와 땀과 비를 씻어낸 뒤 샴페인을 터트려 하얀 거품을 쪼록 따라 마셨다. 식도를 타고 찌르르 넘어가는 샴페인이 마치 오늘 같다. 존재감이 가득하다.
공연이 끝난 즉시 한국행 비행기를 탄 방탄소년단의 소식을 확인하며 깬 월요일 아침. 방탄소년단은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직 방콕에서의 일정이 남았다. 생각지 않았던 방콕 방문인데, 이왕 온 김에 여행을 덤처럼 더 붙여서 하고 가고 싶어서다. 여유 있게 조식을 먹은 뒤 마사지를 받았다. 원래 짐을 무겁게 메고 다니는 데다가 콘서트 이틀 보고 나오면 몸이 무거울 것 같아 미리 이 날짜에 예약해놓았는데, 나를 제일 잘 아는 나 답게 적확한 타이밍이었다.
노곤해진 몸으로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단상들을 노트에 적다가 느지막이 식사를 하러 일어났다. 드높은 빌딩 숲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노란 건물 The house on sathorn은 한여름의 더위를 풍경처럼 감상하며 늘어지기 좋을 느낌의 한적한 레스토랑이었다. 미리 예약해놓은 에프터눈 티 세트가 서빙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여 칵테일 두 잔을 먼저 주문했다. 낮술과 늦은 점심.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한 사치를 한꺼번에 즐긴다.
칵테일을 마시며 핑거 푸드 몇 개를 집어먹었더니 배가 불러 샌드위치나 케이크 등으로 차려 나온 메인 음식들을 거의 손도 대지 못해 그대로 포장해 이르게 호텔로 돌아왔다. 한 시가 바삐 돌아다니느라 진이 빠진 채 밤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오곤 하던 여행이 아니다.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이런 여행이 가능해졌다.
크로와상을 전문으로 파는 카페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바삭 부서지는 크로와상의 흔적들을 치워내며 목에 건 사원증으로 소속감을 내포한 근처 직장인들이 여럿 들러 크로와상과 커피를 사서 나가는 모습을 이방인의 눈으로 좇았다. 내일 다시 돌아가면 나도 저 모습이 될 테다. 여행이 끝나면 항상 이런 기분에 목울대가 일렁이곤 했는데, 오늘은 빵을 우물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일 외의 것들로 해야 할 일로 잔뜩 생긴 덕후가 된 이후로 눈 뜨는 매일의 아침이 버겁지 않았다. 오늘은 또 무슨 소식이 있을까,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한 지 꽤 오랜 날이 지났다. 게다가 오늘은 새 앨범이 발매되기 나흘 전이다. 돌아갈 이유가 충분한 사람의 여행 마무리만큼 더없이 아름다운 것은 없다.
예약한 블루 엘리펀트에서 배부른 저녁을 먹은 뒤 지상철을 타고 시암에서 내려 랑수언 로드까지 걸었다. 시암 역에서 칫롬 역까지 회랑으로 연결돼 있어 걷기 좋은 구간이라 미리 한 정거장 전에 내린 거였다. 방콕의 마지막 밤에 루프탑 바 하나쯤은 방문해야 했고, 그렇다면 방콕에 처음 왔던 몇 해 전의 그때, 내 생일을 스스로 축하하기 위해 찾았던 뮤즈 호텔의 스피크이지 바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호텔 최상층에 내리자 시끄러운 클럽 음악이 웅웅 울린다. 마천루가 쏟아내는 불빛이 에워싸는 안정감을 주는 풍경은 여전했다. 이 음악이 아닌 아경을 품고 싶었기에 안쪽 자리에 사람들을 등지고 앉았다. 소비뇽 블랑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고 이어폰을 꺼내 꽂았다.
‘아미 여러분 오늘 하루 뭐 하셨나요?’
그때 울린 트위터 알람 속의 제이홉의 물음. 마신 와인을 핑계로 답글을 클릭했다.
‘응. 너희 때문에 여행하는 하루였어. 공연 보고 방콕에 남아 와인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너희 노래 계속 들으면서’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배경음악이 되었고, 나는 이 여행을 방금 한 문장으로 농축시켰다.
아무리 편히 쉬어도 공항으로 향하는 날은 몸이 천근만근이다. 무거운 짐들이 특별히 추가되지도 않았는데 왜인지 훨씬 무거워진 캐리어를 들어 체크아웃을 마쳤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택시의 차창 너머로 라차망칼라 경기장이 보였다. 관광지도 아니고, 게다가 중심지도 아니어서 이번 공연이 아니었음 평생 이름조차 몰랐을 저기. 더위나 트래픽 잼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으로 찾아본 것보다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휴가 기간이 아닌 4월에 이국으로 떠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나의 단어로 수렴됐다.
수완나품 공항 내 스타벅스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잊히기 전에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하나.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단어를 썼다가 지웠다가 쓴다.
이런 여행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