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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그래픽, 레터링, 베이스 기타

by 원석


입학한 학교는 기대한 것과 달랐다. 공업고등학교다 보니 남학생들이 많았다. 그중 남녀가 같이 있는 과가 있었는데 통신과와 디자인과였다. 두 과 모두 학생 수가 많지 않다 보니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한 반으로 계속 생활했다. 그렇게 시작한 학교 생활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공고는 기능 위주의 학교이다 보니 기본 학업 외에 방과 후 기능을 더 숙련하는 기능반이라는 게 있었다. 이 기능반이 문제였다. 입학 후 선배들이 실습실 지하에 있는 기능반에 반 아이들 모두를 집합시켰다.


담임 선생님이 반장을 지명했는데 재수를 한 이력 때문이었는지, 열심히 할 것 같아서 그랬는지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그렇다 보니 선배들의 집합 명령을 듣고 내가 아이들을 인솔해야 했다. 고 1밖에 안 된 아이들이 갑자기 변한 환경에 얼마나 당황했겠나.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나만큼 당황하고 실망한 사람이 있었을까. 꼭 가고 싶어서 1년간 힘들게 재수해서 온 학교가 입학하자마자 집합이라니. 그것도 1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우리는 기능반의 넓은 장소에 모여 양쪽 벽에 서서 서로 마주 보고 1열로 섰다. 기껏해야 한 두 살 차이 나는 선배들이 뭐라도 되는양 허세를 부린다.


다들 아무 소리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고 나는 반장이라고 이것저것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이게 내가 원하는 학교라니. 속으로는 원망과 탄식이 쏟아졌다. 그래도 반 대표니 어쩔 수 없이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선배들 비위를 잘 맞췄다.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툭하면 집합을 하고 맘에 안 들면 각목으로 구타하기도 했다. 그게 92년도다. 그때 그랬다. 학교 다닐 맛이 안 났다.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고 기능반에 들어갔다. 기능반에는 슈퍼 그래픽(도장), 목공예, 도자기, 산업 디자인반이 있었는데 나는 슈퍼 그래픽반에 들어갔다. 쉽게 말해 도장반인데 육교나 행사장 아치나 기념탑 등 그런 곳에 크게 그래픽 작업을 하는 일이다. 종이 도면을 큰 판에 비율에 맞춰 옮겨 그리고 색을 입히는 일인데 작업 자체는 재미있었다.


가장 도움이 된 건 레터링이었는데 전지 사이즈의 모눈종이 위에 자를 대고 글자를 그리는(쓰는) 작업이었다. 빵빵자(템플릿 자), 운형자를 이용해 고딕체, 명조체를 썼다. 이때 배운 레터링이 지금까지 큰 도움이 된다. 자음과 모음의 균형, 삐침으로 인한 정렬, 고딕과 명조의 차이 등. 글자를 아주 크게 그리며 쓰다 보니 글자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그때는 몰랐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대학교 때 서체 수업을 도강하면서 디자인에 눈을 뜨고 그때 배운 수업이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책에서 봤다. 그만큼 디자인에 있어서 레터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디자인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이나 성인 모두 레터링을 꼭 해보길 바란다.


이렇게 집중하며 신나는 작업도 있었지만 대부분 선배들의 폭력과 술, 담배 문화는 학교를 가기 싫게 했다. 마침 반에서 기타를 치는 친구들을 만났다. 통기타 정도 칠 수 있는 나와 다르게 친구들은 일렉 기타를 쳤다. 디자인이 점점 싫어지고 음악으로 관심이 갔다. 정확히 말하면 디자인이 싫어진 게 아니라 학교가 싫고 사람이 싫었다. 그걸 방치하는 조교도, 선생도 싫었다. 음악에서 탈출구를 찾고 친구들과 매일 모여 기타를 치고 음악을 들었다. 나도 일렉 기타를 사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밴들를 결성하게 됐다. 기타가 여러대 있을 필요가 없은 난 베이스를 선택했다. 평소 음악을 들을 때 저음 소리가 그렇게 좋앟다. 그렇게 베이스 기타를 친구의 친구에게 중고로 사서 함께 연주하게 됐다. 내 인생의 밴드 첫 포지션은 베이시스트였다. 그렇게 학창 시절 스쿨밴드가 시작됐고 이후 수많은 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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