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예진 Dec 07. 2019

은발의 뮤지션과 노란 장미

실패하지 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


정신없이 살다가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을 주는 장소에 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내가 떠나온 곳으로 잠깐 시간 여행을 와 있는 느낌을 주는 곳이랄까.


물감 냄새가 나고 이젤이 늘어서 있는 공간, 졸업작품전을 앞둔 미대 작업실 주변, 방음벽과 문으로 차단이 되었음에도 어떻게든 새어 나오는 여러 종류의 악기 소리가 휙휙 날아다니는 복도 같은 곳이 그렇다.


말하자면 예술학교의 기억을 소환하는 곳. 대개 아이들에게 과외 활동을 시키면서 가게 되는 장소들인데, 이런 곳에 가면 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천부적 재능을 묻고 사는 예술혼 이기라도 한 양 사무치는 감정이 된다.


천부적 재능은커녕, 어릴 때 배운 피아노는 하루 삼십 분 하겠다고 약속한 연습도 겨우 겨우 하다가 때려치웠고, 미술을 해서 대학을 갔다고는 해도 심오한 예술혼 따위는 오히려 걸리적거리기가 쉬운 디자인 계열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소에 몸을 들여놓기만 하면 어딘지 아프고, 아련하고, 따뜻하고, 그리운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어떤 성당에 앉아서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작은 아이의 바이올린 선생님은 이 지역 현악 연주자들의 터줏대감 격인 할머니 뮤지션인데 일 년에 한 번, 소울메이트급으로 가까운 뮤지션 친구들과 작은 음악회를 하신다. 장소는 늘 같은 곳으로, 구시가지에 위치한 자그마한 성당이다.


다른 행사는 몰라도 이 음악회만큼은 꼭 참석한다. 한 지역에서 평생을 어울려 지내온 노인 음악가들의 은색 머리카락, 활을 잡은 주름진 손,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지지대 삼아 섬세하게 어우러지는 현악 합주가 소박한 성당의 천정에 가 닿을 때의 고적한 위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작은 음악회를 기념하기 위해 모여들어 드문드문하게나마 자리를 메꿔주고 있는 동년배 청중들의 의리와 우정을 아직 더 ‘늙어야 하는’ 내가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지역 유스 심포니 단원인 학생들 절반이 선생님의 제자들이고, 매해 졸업 학년 중에서 선발되는 콘서트마스터 역시 대개 선생님의 제자 중 하나가 뽑힌다. 음악을 전공할 것도 아닌데 외부 오케스트라 활동까지 하면서 대입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면 힘들고 치열한 고교시절을 보내는 학생들이라 다들 주말까지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로 허덕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주자고 청중이고 노인들 일색인 이 음악회를 보러 오는 학생은 거의 없고, 어쩌다 학부모가 데리고 오더라도 바빠서 그런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은 아는 엄마가 딸을 데리고 와서 잠시 앉아있다가 자리를 떴고, 바쁜 아이 대신 잠깐 와서 있던 어떤 아빠도 마지막 곡이 끝날 때쯤 보니 떠나고 없었다.


마지막 곡이었던 파커벨의 캐논 연주가 끝나고, 선생님을 비롯한 연주자들이 악기를 정리하고 있는 걸 잠깐 지켜보다가 아이를 앞세워 다가갔다. 우리를 보자 환하게 웃는 선생님.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고마운 것도 있고 해서 꽃도 준비해 가져 갔는데, 아이가 내민 꽃을 받아 든 선생님이 지나치게 기뻐하셔서 다른 연주자들한테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아이와 선생님과 노란 장미 꽃다발이 중심에 있는 그 광경을, 비올라 연주자 할머니, 첼리스트 할머니, 오르가니스트 할아버지가 말할 수 없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능, 질투, 열정, 좌절이라는 감정들의 진폭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를 사랑하는 걸 끝끝내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나의 단편소설 <미뉴에트>는 이런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는 걸 오늘 깨달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성의 발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