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회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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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트리(Tech Tree),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다음 단계 레벨로 올라가기 위해 기술이나 경험을 습득하는 업그레이드 계통도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현재는 단순 게임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죠.
금융 업계의 커리어에도 오랫동안 일종의 '테크트리'가 존재해 왔습니다. 투자 전문가로 성장하려면 IB나 컨설팅 업계에 발을 들여 ‘훈련’의 기간을 거친 후 사모펀드, 헤지펀드, 벤처캐피탈 등 소위 ‘바이사이드’로 옮겨가는 경로가 정석처럼 여겨져오고 있습니다.
창업의 천국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에서는 또 다른 테크트리가 존재합니다. 바로 성공한 창업자에서 벤처캐피탈리스트로 변신하는 사례입니다. 안데르센 호로위츠의 마크 안데르센은 넷스케이프의 창업자이며 파운더스펀드의 피터 틸은 페이팔 공동창업자, 코슬라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는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창업자입니다. 이런 리스트는 사실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러한 커리어 테크트리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바로 벤처캐피탈리스트에서 창업자로 나아가는 역방향 커리어 패스가 주목받고 있는 것입니다. AI 물결을 타고 새로운 창업 붐이 일어나자 벤처캐피탈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창업에 나서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풀 시나(Bipul Sinha)는 오라클의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시작 라이트스피드(Lightspeed) 파트너로 4년간 근무하다가 2014년 루브릭(Rubrik) 창업에 나선 사례입니다. 시나는 벤처캐피탈리스트로 활동하며 수많은 데이터 관리 및 스토리지 스타트업을 만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기업들이 클라우드 전환 시 데이터 관리 및 보안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솔루션이 부족하다는 시장의 공백을 발견하고 창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라이트스피드에서 일하면서 무에서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 나가는 수많은 창업가들에게 영감을 받았습니다."
"투자자로서 매일 여러 팀들이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지켜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접근법이 효과적인지, 그리고 시장에 어떤 공백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죠."
루브릭은 창업 10년 만에 시가총액 7조 원의 상장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시나의 친정인 라이트스피드는 루브릭의 시리즈A 첫 투자자로 합류, 성공적인 투자 사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밴타(Vanta)의 크리스티나 카시오포 또한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시작, 창업의 길에 들어선 사례입니다. 유니온 스퀘어 벤처스(USV)에서 투자자로 커리어를 시작한 크리스티나는 이후 여러번의 창업 시도를 거쳐 SOC2 보안 인증과 컴플라이언스 SaaS 기업 밴타를 성공시키게 됩니다.
"VC에서 일하면서 스타트업들이 반복적으로 동일한 문제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모습을 봤어요. 이를 자동화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면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업에 지름길은 없다지만 벤처캐피탈 출신 창업자들이 가진 이점은 분명합니다. 투자 심사 과정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시장의 미충족 수요를 발견하고, 다양한 창업팀 평가 경험을 통해 효과적인 운영 전략을 설계합니다. 또한 투자 생태계에 대한 이해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초기 자금 조달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모습입니다.
실리콘밸리의 대형 벤처캐피탈인 안데르센호로위츠(a16z) 출신 창업자들의 행보는 이러한 트렌드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최근 2년 사이 a16z 출신 심사역 및 파트너들이 창업에 나서 시드 투자 유치에 성공한 사례만 10건이 넘는 것으로 집계됩니다.
Moxie: a16z 출신 샘 거스텐장(Sam Gerstenzang)이 설립한 스파 매니지먼트 플랫폼. 간호사와 의료 전문가들이 자신의 메디컬 스파를 쉽게 운영할 수 있는 '비즈니스 인 어 박스' 솔루션을 제공. 시그널파이어가 주도한 시리즈 A에서 1,190만 달러 조달 성공
Quilt: 전 a16z 파트너이자 세콰이어 캐피탈의 파트너였던 댄 첸 (Dan Chen)이 설립한 B2B 세일즈 AI 코파일럿. 세콰이어의 주도로 250만 달러의 시드 투자 유치.
Merit Systems: a16z 암호화폐 투자팀 출신인 샘 랙스데일 (Sam Ragsdale)과 메이슨 홀(Mason Hall)이 공동 창업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기여자 보상 시스템. a16z 크립토 펀드가 주도한 시드 라운드에서 1,000만 달러를 조달
Ferry Health: a16z 바이오테크 펀드의 파트너 메훌 메타 (Mehul Mehta)가 공동 창업한 AI 기반 환자 내비게이션 플랫폼. "모든 환자를 위한 AI 내비게이터"를 표방한 페리 헬스는 a16z Bio + Health 펀드로부터 약 600만 달러의 시드 투자 조달
Grepr: a16z 파트너 자드 나우스 (Jad Naous)가 설립한 AI 기반 인프라 모니터링 솔루션. 볼드스타트 벤처스 (Boldstart Ventures)와 a16z가 공동 주도한 시드 라운드에서 900만 달러 유치
ISSEN AI: a16z 크립토펀드 출신 마리아노 소르젠테(Mariano Sorgente)가 창업한 AI 언어 학습 플랫폼. 생성형 AI를 활용해 사용자가 외국어 능력 향상을 위한 실시간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와이콤비네이터 2024년 겨울 배치 출신
Manifest: a16z 출신 에이미 우가 설립한 Z세대를 위한 정신 건강 앱. "기분을 위한 샤잠"을 목표로 사용자의 감정을 분석하고 맞춤형 웰니스 활동을 제안. a16z의 스피드런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통해 340만 달러의 시드 투자 유치
수십명의 심사역이 근무하는 a16z의 규모 때문에 해당 펀드 출신 창업자들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사실 이는 a16z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다른 주요 벤처 펀드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이 늘고 있는 것을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실리콘밸리 전반에는 '지금이 창업할 때'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벤처캐피탈리스트에게도 예외는 아닌 것이죠. 게다가 창업 분야 또한 AI, 소프트웨어, 헬스케어, 크립토, 디펜스 등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팬데믹 당시 회자되던 ‘실리콘밸리의 전성기는 이미 지났다’라는 평가가 무색해지는 모습입니다.
수사 벤처스(Susa Ventures)의 파트너 프라티유시 부디가(Pratyush Buddiga)는 초기 스타트업에게 경쟁 우위는 거의 없다고 단언합니다. 시장이 안정적이고 산업의 구도가 이미 고착화되어 있다면 소규모 스타트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는 것이죠.
스타트업이 가진 유일한 경쟁 우위는 '불확실성'입니다. 시장이 너무 작거나, 기술이 초기 단계이거나, 비즈니스 모델이 검증되지 않은 등의 요소가 부각될 때 작고 민첩한 팀이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작은 시장부터 독점하며 유일한 '탈출 속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2010년 한국에서 소셜커머스가 등장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이커머스의 판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모바일 전환까지 빠르게 진행되자, 위메프, 티몬, 쿠팡 같은 스타트업들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죠. 반면 2025년의 이커머스는? 정부가 아무리 자금을 공급해도 스타트업이 메기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현재의 실리콘밸리는 2010년의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 같으면 창업과 거리가 멀었을 사람들도 속속 창업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물론 핵심 동력은 AI가 열어가는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기존 산업의 가치 사슬이 재구성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창업의 기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죠.
지난주 구글의 공동창업자 래리 페이지가 제조 AI 기업 다이나토믹스(Dynatomics)를 창업했다는 소식은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0년 만에 새로운 창업에 나선 페이지의 행보는 현재의 기술적 변곡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방증하는 사례입니다. 전세계 인재 뿐 아니라 스타트업에 투자하던 벤처캐피탈리스트, 그리고 성공한 창업자까지 다시 창업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힘, ‘지금은 창업할 때’라는 현재 실리콘밸리의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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